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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일본은 그의 유해가 서울 시내를 순회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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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민원식

▲ 3.1운동 당시 시위대에 대응하기 위해 도열해 있는 일본 군경 ⓒ 위키미디어 공용

일제강점기는 세계적으로 민주주의 욕구가 증대하던 시기였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계기로 전통적인 왕조체제가 약해지면서 자본가 계급이 세계 주요 지역에서 권력을 차지했고, 이들과 동전의 양면 관계인 노동자 계급 역시 권리를 갖기 위한 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러면서 대중의 지위가 전반적으로 상승하는 현상이 이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 일어난 1919년 3·1운동의 표면적 구호는 ‘대한독립 만세’와 ‘일본 나가라’였다. 하지만 실질적 구호는 동학혁명과 독립협회 등을 거치며 구체화된 민주공화제 실현이었다.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그해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제국’이 아닌 대한’민국’을 수립하고 임시헌장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는 규정을 넣었다. 이는 이들이 확인한 3·1 민심이 민주공화였기 때문이다.

그해 7월 31일 독일 바이마르에서는 바이마르헌법으로 불리게 될 독일 헌법이 국민의회에서 채택됐다. 이 헌법 제22조 제1항은 보통·평등·직접·비밀 선거를 규정했고, 제20조는 국민이 의회를 선출하게 하고 제41조 제1항은 국민이 대통령을 선출하게 했다.

독일은 제1차 대전 당시 일본의 적대국이었다. 패전한 독일에서만 민주주의가 진전된 게 아니라, 일본 지배하인 식민지 한국에서도 민주공화제 욕구가 분출됐다. 적대국에서 민주주의가 확산되는 것은 일본에 유리할 수 있어도 식민지 한국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히 불리했다. 그래서 이 시기의 일본은 민주주의 요구를 교묘히 처리하는 방안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은 한국인들의 민주공화 요구를 무작정 배척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참정권을 줄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은 참정권을 주는 시늉만 하는 것이었다. 일본이 그런 시늉을 할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준 친일파들이 있었다. 국민협회를 만들어 참정권 운동을 벌인 민원식이 대표적이다. 민원식은 식민지 한국도 일본제국의 지역구로 만들자는 운동을 전개했다.

그런 방식으로 3·1운동의 열기를 잠재우려 한 것에서 나타나듯이, 그는 상당히 고단수 친일파였다. 3·1운동 직후부터 그가 벌인 인상적인 활동들을 1993년에 <친일파 99인> 제2권에 수록된 역사학자 조재곤의 ‘민원식: 참정권 청원운동의 주동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 무렵 민원식은 일본 국회에 참정권 청원서를 제출한다. 신일본주의에서 출발한 참정권 청원운동은 일본 국회에 조선인 지역대표를 보내자는 것으로, 일본 당국의 주선으로 민원식은 제42의회(1920.1), 제43의회(1920.7), 제44의회(1921.2) 등 세 차례에 걸쳐 일본 중의원에 참정권 청원서를 제출한다.”

민원식이 표방한 신일본주의는 ‘일본민족뿐 아니라 한민족도 함께하는 새로운 일본이 등장했다’는 의미를 내포했다. 2006년에 <사총> 제62권에 수록된 송규진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교수의 논문 ‘일제하 참정권 청원운동의 논리’는 고양군수 민원식이 1919년 10월에 신일본주의를 제창한 일을 언급하면서 “신일본주의는 일본과 조선 민족공동의 국가인 새로운 일본제국의 신민으로서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민원식의 외침이 어떻게 비쳐졌는지는 역사학자 신채호가 김원봉의 의열단에 써준 조선혁명선언(의열단선언)에 나타난다. 이 선언에서 신채호는 “내정 독립이나 참정권이나 자치를 운동하는 자가 누구이냐”라고 한 뒤 “3·1운동 이후에 강도 일본이 또 우리의 독립운동을 완화시키려고 송병준·민원식 등 한두 매국노를 시키어 이따위 광론을 외침이니, 이에 부화뇌동하는 자가 맹인이 아니면 어찌 간사한 무리가 아니냐?”라고 질타했다.

친일 노선에 결정적 영향 준 유년기의 경험

▲ 민원식 ⓒ 위키미디어 공용

민원식이 34세였을 때이자 3·1운동 1년 뒤인 1920년에 일본은 한국인들의 분노를 가라앉힐 목적으로 지방제도를 개편했다. 1995년에 <이대사원(梨大史苑)> 제28집에 실린 역사학자 최유리의 논문 ‘일제 말기 참정권 논의와 그 성격’은 “의결기관이 아닌 자문기관을 두는 것이 그 골자”였다고 설명한다.

이 논문에 따르면, 일제는 자문기관 성격을 갖는 지방협의회의 구성 방식을 이원화시켰다.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에서는 부(府)의원이나 면의원을 주민투표로 선출하고, 한국인들이 대다수인 지역에서는 면의원을 임명제 방식으로 선출했다. 주민투표가 허용된 면은 경기도 수원과 지금의 서울 영등포 등을 포함한 24곳이다. 이런 곳에서 주민투표가 어떤 식으로 시행됐는지를 논문은 이렇게 설명한다.

“임명제가 아닌 선거에 의해 회원을 충원하는 경우에도 부(府)의 경우, 협의회원의 선거 자격을 연령 25세 이상의 독립된 생계를 영위하는 남자로 1년 이상 부내(府內)에 거주하고 부세 연 5원 이상을 납부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결과적으로 지방자치체 참가 계층을 경제적으로 중상 이상으로 제한하고 있었다.”

총독부는 이런 방식으로 24개 면의 “조선인 유권자 수를 일본인보다 소수로 묶어” 두었다. 그 소수의 한국인 유권자들도 “보수적인 노년층과 친일적인 인물들을 중심으로” 채웠다. 한국인들의 참정 욕구에 부응하는 듯이 하면서 실상은 억눌렀던 것이다. 신채호가 “이따위 광론”이나 “간사한 무리” 등을 운운할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민원식은 김옥균의 갑신정변 2년 뒤인 1886년에 경기도 양평에서 출생했다. 그의 유년기의 경험은 친일 노선에 결정적 영향을 줬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 민원식 편은 이렇게 설명한다.

“1895년 8세 때 가족이 흩어지자 청국 상인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갔다. 2년 후 조선에 돌아와 전국을 떠돌다가 일본에 건너갔다.”

청일전쟁 이듬해인 1895년은 패전국 청나라의 위상이 추락했을 때다. 이때 가족과 헤어져 청상을 따라 중국에 갔지만 정착하지 못하고 귀국했다가 일본으로 건너가게 됐다. 위의 <친일파 99인>은 “이러저러한 교제 끝에 후쿠오카에서 현지사 가와지마의 비호와 보살핌으로 마침내 동아어(東亞語)학교 교사가 되기에 이르렀다”고 설명한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5권에 실린 프로필을 살펴보면 그가 19세 나이로 귀국했을 때는 이미 친일파가 되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국내에서 경력과 학력을 쌓은 일이 없고 가족의 지원도 없는 상태에서 1906년까지 일본에 살았던 그가 그해 6월 19세 나이로 귀국해 대한제국 내부(內部)의 위생과장이 됐다. 뒤이어 황실의 회계심사위원이 됐다.

3·1운동을 억누르는 고단수 희생타

▲ 서울 남대문으로 운구된 민원식의 영구 ⓒ 위키미디어 공용

그가 공식적으로 일본의 봉록을 받은 것은 대한제국 멸망 이듬해부터다. 지금의 용인시·안성시 일부를 관할하는 경기도 양지군수에 뒤이어 이천군수가 되고 고양군수가 되면서 친일재산을 축적해갔다. 그러다가 1919년의 거족적인 만세운동을 관찰하면서 참정권 운동의 아이디어를 내게 됐던 것이다.

그가 한국인들의 정치 참여를 확대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억누를 목적으로 참정권운동을 벌였다는 점은 신채호의 글에서도 나타나지만, 또 다른 인물의 행동에서도 나타난다. 독립운동가 양근환이 행동에 나선 것도 그가 벌이는 참정권운동의 위선적 본질 때문이다.

민원식의 활동은 35세 때인 1921년에 절정에 달했다. 국가보훈부의 <독립유공자공훈록> 제8권 양근환 편은 “민원식이 친일단체인 국민협회의 회장이 되어 참정권 운동을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1921년 봄 직접 동경으로 와서 참정권운동을 펴기 위해 일본 정부와 의회에 내는 청원서에 이미 1만여 명의 서명을 얻었으며 각계각층을 방문하면서 목적 달성을 위하여 맹활약을 펴고 있다는 소식이 연일 신문지상에 보도되었다”고 설명한다.

천도교인인 27세의 양근환은 3·1운동에 참여한 뒤 니혼대학에서 유학 중이었다. 민원식에 관한 보도를 접한 양근환은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할 것을 결심하고는 2월 16일 정오경 비수를 간직하고 민원식이 거처하는 제국호텔로 찾아가” 면회를 요청했다.

그때 민원식은 일종의 ‘사인회’를 진행하고 있었다. 민원식이 서명을 하는 행사가 아니라 민원식을 찾아온 사람들이 참정권 청원서에 서명하는 행사였다. 민원식은 양근환 앞에서 망언을 많이 했다. “독립운동이라고? 상해에 있는 놈들은 모두 폭도” 등등의 망언을 했다. 듣다 못 한 양근환은 “품속에 감추었던 칼을 뽑아”냈다. 참정권운동이라는 고단수의 친일 억제책을 구사했던 민원식은 그렇게 고꾸라졌다.

민원식의 ‘희생’은 한국인들이 독립보다는 참정을 원한다는 이미지를 조성하는 데 기여했다. 이를 높이 평가한 일본은 성대한 장례식을 열어줬다. 그의 시신이 부산에 도착했을 때는 경남도지사가 관민들을 이끌고 영구를 맞이했다. 일제는 그의 유해가 서울 시내를 순회하도록 했다.

일본 의회에서는 ‘총리와 내무대신이 그의 영전에 꽃을 바치고 참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고, 일본 의원들은 박수로 화답했다. 일본 입장에서 볼 때 민원식은 3·1운동을 억누르기 위한 희생타를 쳐준 친일파였다.

김종성 기자

<2024-04-07>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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