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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청일전쟁, 3국 자료 모으는데만 10년 넘게 걸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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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조선인들의 청일전쟁’ 펴낸 조재곤 서강대 학술연구교수

조재곤 교수가 인터뷰 뒤 사진을 찍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이번 책을 내려고 10년 이상 자료를 모았어요. 일본만 수십 차례 찾아 국회도서관과 방위성 도서관부터 각 현 단위 도서관까지 훑었죠. 청일전쟁에 참전한 일본인 병사가 남긴 책 2권을 시마네현 도서관에서 찾아 복사하려고 하니 안 된다고 하더군요. 어쩔 수 없이 제가 20쪽 분량을 직접 옮겨 적었죠.”

지난 2월 ‘조선인들의 청일전쟁-전쟁과 휴머니즘’(푸른역사)을 낸 조재곤(63) 서강대 국제한국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의 말이다.

일본은 1894~5년 조선 지배권을 놓고 조선과 만주에서 청과 전쟁을 치러 승리한다. 그 결과 청이 조선 종주권을 포기하면서 한반도는 사실상 일본 손아귀에 들어갔다. 이 전쟁으로 일본의 조선 보호국화 정책이 시작되었고 한반도 민중은 자기 땅에서 벌어진 남의 나라 싸움에 큰 고통을 겪었지만 그간 이 전쟁에 대한 국내 학계의 연구 성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 청일전쟁을 다룬 일본과 서양의 연구서적을 토대로 동맹이나 조약 등 외교적 틀에서 살핀 연구들이 대부분이었다.

“자료 문제 때문일 겁니다. 청일전쟁 연구를 위해선 조선과 중국, 일본 자료를 다 봐야 하니까요. 언어와 시간, 비용 측면에서 어려움이 있었죠.” 조 교수의 이번 책은 이런 어려움을 뚫고 삼국 자료를 섭렵해 청일전쟁 때 한반도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고찰한 저술이다.

‘조선인들의 청일전쟁’ 표지.

지난 5일 저자를 강원 강릉시에서 만났다. 그는 보부상을 연구한 박사 학위 논문 출판물(한국 근대사회와 보부상)로 2002년에 월봉저작상을, 러일전쟁을 다룬 저술로 2017년에 임종국상을 받았다. 그는 이번 책을 위해 일본 쪽 자료는 청일전쟁 참전 병사나 전쟁 기획자들이 남긴 문집이나 일기, 메모와 1894년 일본 9개 신문의 청일전쟁 관련 보도를 훑었고 중국 자료는 10여년 전 중국 안후이성에서 출간한 청일전쟁 당시 중국 쪽 지도자 이홍장 전집(전 24권)과 청국 내 대표적 주전파였던 옹동화 문집(전 6권) 등을 살폈다. 한국 자료는 청 군대 영접관이었던 이중하 기록을 비롯해 인부와 물자 동원을 보여주는 규장각 자료 등을 활용했다. “이중하 자료를 통해 청군에 의한 조선인 인부와 우마동원은 물론 뱃사공 동원 내용까지 파악할 수 있었죠. 저도 그동안 몰랐던 자료인데요. 제보를 받고 확인했어요.”

책은 3부로 나눠 청일전쟁에 앞선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청·일의 조선 출병 그리고 충남 성환과 평양에서 치른 청일 전투 상보와 조선 민중 피해를 기록했다. 그는 일본군 자료에 근거해 평양 순안 지역 1371호 가옥 대부분이 평양 전투를 거치며 소실되어 100호만 남았고 전투 과정에서 일본군이 조선인 민가를 태우는 화공까지 펼친 사실을 드러냈다. 평양 전투 중 일본군에 붙잡힌 조선인 포로 13명을 비롯해 일본군이 동원한 조선인 인부들도 버선 절도 등 비교적 가벼운 범죄로 참수라는 극형을 당한 일도 보여줬다.

“청일전쟁 때 ‘10실9공’이란 말이 있었어요. 청군과 일본군이 들어오는 지역민 대부분이 집을 비우고 도망갔다는 말이죠. 피난을 못 간 노인이나 부녀자들은 청, 일, 조선군에 의해 동원됩니다. ‘삼중의 쥐어짜기’였죠. 전쟁으로 물가는 5배까지 올랐고요. 특히 평양 쪽 피해가 컸어요. 평양 인구가 2만명이었는데 그만큼 청군이 들어옵니다. 조선의 요청으로 파병된 청군은 군량을 현지에서 조달하려고 했는데요.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유폐시킨 터라 조선 중앙과 소통이 어려웠던 청군은 끊임없이 평양 주민에게 군량미 조달을 요구하고 참호와 성벽 쌓기에도 동원했죠.” 그는 조선군 포로 참수 기록은 일본 국회도서관에서 찾았단다. “참전 일본군이 나이가 들어 쓴 책에 나오더군요.”

그는 전쟁의 바람잡이 역할을 했던 당시 일본 언론의 보도 태도도 자세히 다뤘다. “청일전쟁 일본 종군기자는 모두 124명입니다. 오사카 아사히신문사의 한 기자는 전쟁 취재에 나설 때 신문사로부터 칼 1자루와 권총 1정을 직접 받았더군요. 당시 일본 언론 보도를 보면 자국군의 경복궁 점령은 일부만 간략히 보도하고 그나마 “작은 해프닝” 정도로 다루지만 ‘동학농민군의 공미(공물로 바치는 쌀) 탈취 사건’은 각 신문이 경쟁적으로 크게 다루면서 대부분 언론이 농민군 토벌을 주장했어요. 또 승전에 기여한 자국 병사의 영웅 만들기에도 열을 올리며 가짜뉴스도 속출했죠.”

삼국 자료 섭렵 첫 청일전쟁 연구서
일본 수십차례 찾아 ‘현 도서관’ 훑어
참전 병사 등 남긴 일기·문집 수집
조선땅에서 청·일 벌인 전쟁으로
조선 민중이 당한 고통 상세히 밝혀
“한말의 역사, 반복하지 않으려면
국민과 사회 통합, 가장 중요해요”

보부상 연구로 2002년 월봉저작상

이번에 새로 밝힌 내용 중 가장 큰 게 뭐냐는 질문에는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때 조선 수비병에게 전투를 중지하라고 지시한 고종의 전교가 날조되었을 정황을 밝힌 것”이라고 답했다. “그간 이 사건을 두고 ‘무기력한 조선군, 용맹한 일본군’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는데요. 일본군 등 사료를 보니 경복궁 점령 당일 조선 수비병들이 궁성 안팎에서 다섯 차례나 일본군과 전투를 했더군요. 그러다 ‘만약 왜인을 상하게 하면 삼족을 멸하리라’는 고종 전교가 나온 뒤 평양 병사 500명 등 수비병들은 울면서 무기를 내려놓고 해산합니다. 의문은 일본군이 고종의 소재를 파악하기도 전에 전교가 나왔다는 점입니다. 일본인이 편집 책임을 진 ‘고종실록’ 말고, ‘일성록’이나 ‘승정원일기’ 같은 조선 사료에도 고종 전교 기록은 없어요. 저는 궁에서 일본군과 내통한 안경수(몇년 뒤 독립협회 초대회장이 됨)가 전교를 날조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그는 이번 책에 앞서 러일전쟁(1904~5)과 대한제국기(1897년 성립)를 각각 다룬 ‘전쟁과 인간 그리고 ‘평화’:러일전쟁과 한국사회’, ‘고종과 대한제국:황제중심의 근대 국가체제 형성’을 펴낸 바 있다. 조선이 일본의 보호국에서 식민지로 떨어지는 시기를 상세히 검토한 것이다.

조선은 왜 근대적인 자주국가가 되지 못하고 망했느냐는 물음에 조 교수는 “근대 국민국가 상을 제대로 세우지 못한 탓이 크다”며 덧붙였다. “국민 통합과 사회 통합을 제대로 할 역량도 기제도 없었죠. 외압의 강도는 높았고요.” 그렇다면 근대 자주국가로 나아갈 가능성은 있었을까? “의병의 역할로서 동학농민군 활동에 기대를 걸 수 있었지만 일본군의 가혹한 무력 진압에 실패했죠.” 그는 청일전쟁 개전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일본군 실세 가와카미 소로쿠 대본영 참모차장을 꼽으며 그가 동학농민군 섬멸 지시도 내렸음을 떠올렸다. “가와카미는 청일전쟁 1년 전 조선 정탐을 위해 조선을 찾아 직접 고종을 만났고 그의 부하 이지치 고스케 소좌는 1894년 1월에 일어난 고부민란 현장을 정탐해 ‘전라도 고부민요일기’라는 보고서를 작성합니다. 이 자료는 내각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에게도 보고되었습니다. 일본군은 1893년에 이미 대륙 침략을 위한 작전지도를 만들고 있었어요.” 한말 역사에서 뭘 배워야 할까? “역사는 다른 형태로 반복됩니다. 19세기 말에는 러시아, 중국, 일본이 외압 세력이었지만 지금은 미국과 일본·중국이죠. 지금은 그때와 달리 분단 상태이고요. 이런 국내외적 상황을 정확히 알고 대응하지 못하면 언제든 19세기 말과 같은 상황을 맞을 수 있어요. 당시 고종은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농민군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웁니다. 저들 때문에 청·일이 와서 나라가 위태롭게 되어 (농민군은) 죽어 마땅하다고 했죠. 아랫것들이 국기를 흔든다는 인식이었죠. 지금도 사회 분열이 만만치 않잖아요. 그때와 마찬가지로 국민과 사회 통합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연구 계획을 묻자 그는 4~5년 뒤 원고지 3천매 분량으로 ‘한국 상인자본의 원류를 찾아서’ 책을 내려고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객주조합과 상회사, 상무사, 상공회의소로 이어지는 한국 근대 상인단체 자료를 총정리 중입니다. 개항 이후부터 식민지 시기까지 상인 자본의 변천을 살피려고요. 현재 2천매 가량 초고를 썼습니다.”

그가 연세대와 국민대에서 받은 석·박사 논문 모두 보부상이 주제였다. 석사 논문 지도교수는 한국 농업사 연구 권위자인 고 김용섭 교수였고 박사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도 고인의 지도가 있었다고 한다. 조 교수의 보부상 연구를 두고 2002년 월봉상 심사위는 “독립협회와 쌍벽을 이루던 황국협회의 결성과 갈등 구조를 살피는데 비범한 성과를 거뒀고, 국권 함몰 시기 보부상의 변천 과정 등 근대 상인자본의 원류 탐색에 성과가 탁월하다”는 평을 내놓았다.

뒤늦게 경제사 연구로 돌아간 까닭을 두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박사 논문을 쓸 때는 지금과 같은 많은 자료를 확인하기 어려워 라면 한 박스 분량을 가지고 썼어요. 자료가 있었다면 계속 이쪽 연구를 했을 겁니다. 그런데 10여년 전에 일본 히토쓰바시 대학 도서관을 가 보니 일제 시기 지역별 상공회의소 월보나 연보, 통계연보가 다 있더군요. 규장각 객주와 상회사 자료도 지금은 집에서 출력이 가능할 정도로 정리가 잘 되어 있고요.”

그는 이번 책 서문에서, 인용한 일본어 자료 원문 대부분은 2년 전 작고한 부친(조주현)이 직접 번역하거나 감수해주었다고 밝혔다. “1927년생으로 목포상고를 나온 아버지가 책 보는 것을 좋아하셨어요. 메이지 시대 고어들은 번역이 어려워 아버지에게 부탁하면 밤새도록 번역해주셨어요. 일본의 전문가들에게 직접 메일을 보내 뜻을 알아보시기도 하셨죠.”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2024-04-09> 한겨레

☞기사원문:  “청일전쟁, 3국 자료 모으는데만 10년 넘게 걸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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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  조선인들의 청일전쟁-전쟁과 휴머니즘

☞세계일보:  130년 전 청일전쟁과 일그러진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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