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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아버지는 독립운동가인데… 수해 복구까지 방해한 친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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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서병조

▲ 대구시 중구 대신동 서문시장 입구. ⓒ 조정훈

조선 후기 3대 장터였던 대구 서문시장이 현재 위치로 이전한 것은 3·1운동 4년 뒤의 일이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1923년 3월 30일 자 <매일신보> 기사 ‘대구 서문시장 이전’은 4월 1일에 시장이 새로 문을 연다고 보도했다. 일제 식민당국이 전년도부터 신정(新町) 부근의 저수지인 천왕당을 메우고 그 위에 시장 부지를 조성한 결과였다.

이 일은 신정과 그 부근인 동운정 같은 곳에 재앙이 됐다. 이듬해인 1924년 7월 20일 가뭄 끝의 단비가 내리더니 21일부터 23일까지 큰 비가 내려 신정 일대가 잠기고 가옥 1068채가 침수됐다. 그달 25일 자 <조선일보> ‘대구시의 참상’은 “시장통 부근은 젼부 바다가 되고 피난민들은 갈 곳을 몰으고 방황” 중이라고 보도했다.

이는 전형적인 인재(人災)였다. 빗물이 흘러들어갈 천왕당을 메워버린 뒤 사후 대책을 강구하지 않은 결과였다. 2019년 <민족문화논총> 제71집에 실린 조명근 영남대 교수의 논문 ‘일제시기 대구부 도시개발과 부(협의)회의 활동’은 이렇게 설명한다.

“원래 신정 근처에서 들어오는 물은 천왕당으로 흘러가서 이전에는 물난리 없이 살아왔다고 한다. 또한 못을 메우기 위해 달성공원 앞 둑을 헐어서 객토로 쓰고, 산정 아래쪽에 물이 빠져나가야 할 곳을 막고 높게 쌓았다고 한다. 결국 신정은 한 번에 많은 비가 올 경우 배수가 불가능한 상태로 되었던 것이다.”

일제 당국은 배수에 대한 고민도 없이 천왕당 저수지를 메웠다. 이로 인해 서문시장 부근이 침수 피해를 입었다. 누구 봐도 인재였으므로 주민들은 대구부에 구제책과 예방책을 요구했다. 하지만 마쓰이 신스케 부윤은 지역민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주민 수십 명이 부청으로 몰려가 부윤을 면담하고 부청 안에서 농성 시위를 벌이고 수해이주민대회와 수해대책 시민대회를 열었다. 일제 당국은 여전히 끄떡도 하지 않았다. 지방의원 성격을 약간 띠는 자문위원인 대구부협의회 회원들도 수해대책 시민대회에 가세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일본계 지역 신문인 <조선민보>는 실제 피해는 미미하다며 여론을 호도했다. 동운정의 경우에는 침수 피해가 없었는데도 한국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선전했다. 그러면서도 “<조선민보>의 광고란에는 동운정에 있는 조선제사공장의 수해 위문 사례 광고가 게재”됐다고 위 논문은 말한다. 동운정에 대한 수해 위문에 감사하는 광고는 실어주면서 그 같은 가짜뉴스를 내보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8월 10일 시민대회에서 ‘수해 복구를 위해 시가지 정리 예산으로 계상돼 있는 70만 원의 일부를 사용하라’고 촉구하는 결의가 나왔다. 그 돈으로 침수 지역의 하수도와 도로를 정비해달라는 요구였다.

그런데 이 요구가 나오자 발끈하는 한국인들이 있었다. 왜 그런 데 돈을 쓰냐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친일파 서병조를 비롯한 대구부협의회 회원들이 바로 그들이다.

독립운동가 아버지를 둔 친일파

▲ 서병조 ⓒ 민족문제연구소

1919년판 ‘피플 파워’인 3·1운동에 놀란 일본은 1920년에 지방제도를 부분적으로 개정했다. 12개 부(府)와 24개 면에서 주민 직선으로 지방협의회 회원을 선출하는 제도 개편을 단행했다. 연간 5원 이상의 지방세를 납부한 주민들이 이런 투표에 참여할 수 있었다.

지방세 5원 이상 납부자는 이른바 ‘상위 1%’였다. 이를 충족하는 한국인은 일본인에 비해 소수였다. 2017년에 <대구사학> 제129집에 실린 조명근 교수의 또 다른 논문인 ‘1920~30년대 대구부협의회·부회 선거와 조선인 당선자’에 따르면, 1923년 대구부협의회 회원 선거 때 투표권을 받은 한국인은 전체 주민 4만 3047명 중 570명이고, 일본인은 1만 9316명 중 1150명이다. 지방세 5원 이상을 내는 주민이 일본인 쪽에 훨씬 많았던 것이다.

이 선거에서 일본인 12명과 함께 당선된 8명의 한국인 중 하나가 관선 3선까지 포함해 5선 의원인 서병조다. 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독립운동가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 서병조 편은 “아버지는 한말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서상돈”이라고 알려준다.

김옥균의 갑신정변 2년 뒤인 1886년 대구에서 출생한 서병조는 18세 때인 1904년에 계정일어학교 교사가 되고 통신국 전화과 주사가 됐다가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경영 수업을 받았다. 그런 뒤 23세 때인 1909년 대구잠업전습소장 및 조선중앙농회 경북지부 간사가 되고 1912년에 경남은행 대주주 등이 되면서 지역 유력자의 반열에 들어갔다.

28세 때인 1914년·1916년·1918년에 관선 협의회원이 되고 1920년·1923년에 민선 협의회원이 된 그는 그 뒤 경북도평의회 회원을 거쳐 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 참의까지 진출했다. 일제강점기 후반에는 한국인들을 침략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과 국민총력조선연맹 등의 간부로 활동했다.

중추원 등에서도 고액 연봉이 나왔지만, 다른 데서도 수입이 발생했다. 경상농공은행 취체역(이사), 조선화재해상보험 취체역, 조양무진주식회사 사장 등등의 자리에서도 수입이 생겼다. 친일에 기반한 영향력이 이런 경영 활동의 토대가 됐으므로 이로 인한 수입 역시 엄밀히 말하면 친일재산이다.

그는 일본으로부터 받은 것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했다. 1919년에는 3·1운동을 저지하기 위한 대구자제단 구성에 참여했다. 만세운동을 자체적으로 제압하는 맞불운동을 벌였던 것이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8권에 인용된 대구자제단의 1919년 4월 7일 자 결의문에 따르면, 이 극우단체는 만세시위 참가자들을 겨냥해 “필경 이 무리들의 비행됨이 바로 국권의 침범으로서 국적(國賊)의 짓이라 할지로다”라고 선언했다. ‘대한독립 만세’와 더불어 ‘일본 나가라’를 외치는 시위 참가자들을 국적 급의 도적으로 비하했던 것이다. 서병조가 지켜야 할 나라는 시위 참가자들이 생각하는 나라와 달랐던 것이다.

그런 서병조의 눈에 거슬린 사람들이 수해 복구 예산을 서문시장 쪽에 쓰자고 주장하는 주민들이었다. 그는 한국인 협의회원 5명과 함께 행동에 착수했다. 그는 동료 의원인 김의균·박병태·서병주·서철규·정용기와 함께 주민들을 비판하면서 수해대책 시민대회를 탈퇴했다.

1924년 8월 13일 자 <매일신보> 4면 우상단에 따르면, 이들은 “시가 정리비 70만 원 중으로 금회의 수해를 구제하자 한 것은 도저히 용인치 못할 바”라고 비판했다. 14일자 <동아일보> 2면 좌상단은 서병조 등이 내세운 이유를 “모호한 리유”로 평가했다. 수해복구 예산을 수해복구에 쓰자는데 “도저히 용인치 못할 바”라고 했으니 누가 봐도 이들의 행동은 모호할 수밖에 없었다.

서병조 등이 수해 복구를 반대한 것은 피해 지역인 신정과 서문시장 쪽이 가난한 동네였기 때문이다. 조명근 교수의 2019년 논문은 “신정은 대구에서도 가장 가난한 곳으로 유권자의 숫자 또한 매우 적은 편”이라며 “그들로서는 남산정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인 인구와 유권자가 밀집된 지역의 현안 해결이 우선”이었다고 설명한다. 서문시장 쪽에는 ‘5원’ 이상을 낼 유권자가 적었다. 서병조는 그 돈을 한국인 유권자가 많은 지역에 사용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결국 신정 쪽에는 돈이 쓰이지 않았다. 위 논문은 “부 당국도 근본적인 시설 개선은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라며 그 뒤로도 “4년간에 걸쳐 수해를 입어도 부 당국은 어떤 대책도 강구하지 않았다고 한다”라고 말한다.

기득권 지킬 목적으로 친일했던 한국인

서병조의 모습은 친일파들이 일제에 부역한 동기 중 하나를 드러낸다. 마지못해 억지로 친일을 한 게 아니라, 일본과 연대해 기득권을 지킬 목적으로 친일을 했음을 보여준다. 또 그의 모습은 ‘일제 식민지배 덕분에 한국이 근대화됐다’는 주장의 허구성도 보여준다. 일제가 한국인 노동력과 한국 자원을 토대로 이룩한 경제적 성과의 일부가 소수의 한국인에게 돌아갔을 뿐임을 보여준다.

일제는 서병조의 삶을 칭찬했다. 1928년에는 ‘쇼와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수여하고 1935년에는 시정25주년기념표창을 수여했다. 1940년에는 사회교화 공로자로 선정하고 조선총독 표창을 수여했다.

대한민국도 그의 삶을 나쁘다 하지 않았다. 1949년 3월 친일청산기구인 국회 반민특위가 그를 체포했지만, 이승만 정권은 반민특위를 해체시켜 그가 풀려나도록 만들었다.

한국전쟁 중인 1952년 2월 29일 사망한 서병조의 흔적은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그중 하나는 대구 대륜고등학교 홈페이지다. 이 홈페이지의 학교 연혁 코너에는 1942년 4월 8일 서병조가 재단 이사장이 된 사실이 표기돼 있다.

<친일인명사전>은 “대구 교남학교를 인수하여 대봉교육재단으로 재편하고, 학교명을 천황에 대한 절대적 충성과 효도를 뜻하는 대륜(大倫)으로 바꾸었다”고 설명한다.

김종성 기자

<2024-04-14>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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