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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항일독립에 생애 건 홍범도 장군, 친일행위자와 동거… 꼭 그래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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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현충원에 묻힌 이야기] 진정한 독립운동가 예우를 생각해보다

카자흐스탄에 있던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지난 2021년 8월, 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됐습니다. 8월 16일부터 안장식이 있던 18일까지 대전현충원 현충문 앞에는 국민분향소가 설치됐고, 안장 당일에는 당시 문재인 대통령까지 참석해 안장식을 성대하게 진행했습니다.

홍범도 장군 유해가 대전현충원에 안장되면서 홍범도 장군 묘를 찾는 이들이 무척 많아졌습니다. 잔디가 상할까 묘지 앞에 플라스틱판을 깔아 놓기까지 한 걸 보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장군의 묘를 찾는지 실감할 수 있습니다.

홍범도 장군의 묘를 찾는 분들이 많아지고 장군의 삶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져서 다행이지만, 홍 장군의 유해가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것이 불편하고 안타까운 부분도 있습니다. 오늘은 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물론 홍범도 장군의 삶이나 독립운동 업적을 폄훼하는 건 아닙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들과의 불편한 동거

▲ 홍범도 장군 묘 앞에 쌓인 꽃과 음식 ⓒ 임재근

홍범도 장군은 봉오동 전투를 비롯해 수십 년간 목숨을 걸고 일제와 싸웠던 항일독립운동가입니다. 신출귀몰 의병투쟁에 나선 홍 장군의 귀순을 종용하라는 일제의 강요를 거부해 가혹한 고문을 당했던 부인 단양 이씨는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고, 함께 의병 활동에 나섰던 장남 홍양순(1892~1908)은 일본군 토벌대와 교전 중에 16세의 어린 나이로 전사 전사했습니다.

그런데 홍범도 장군은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있는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이 현실을 홍범도 장군은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간도특설대 출신 백선엽, 신현준, 김석범과 일본군 중좌를 지낸 백홍석, 만주국군 상위를 지낸 송석하 이렇게 5명이 국가기구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됐어도 국립묘지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일본 육사 출신 유재흥과 이형근, 일본군 헌병 오장 출신의 김창룡 등 최소 29명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대전현충원 안장 인물입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상황에서 독립운동가와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불편한 동거는 독립운동가를 제대로 모시는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 홍범도 장군 유해 안장식 날 홍범도 장군 묘를 찾은 시민이 추모 묵념을 하고 있다. ⓒ 임재근

우리 정부가 홍범도 장군 유해 송환을 추진할 때 카자흐스탄 동포들은 반대 입장을 밝혔습니다. 동포들의 입장에서 홍범도 장군은 정신적 지주와 같은 존재였는데, 유해가 송환되면 동포들의 상실감이 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죠. 정부는 홍범도 장군 유해 송환을 추진하면서 카자흐스탄 동포들에게 잘 모시겠다고 다짐하며 설득에 나서 유해 송환을 성사시킬 수 있었습니다.

유해 송환 이후 홍범도 장군을 흠집 내려는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우선 유해 송환 직후 보수언론에서는 묘비에 쓰인 글씨체를 트집 잡기 시작했습니다. 국립묘지 묘비에 새기는 서체나 문구는 유족 요청에 따라 결정되는데, 홍범도 장군의 경우는 생존 유족이 없어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의 의견에 따라 서체로 어깨동무체(신영복체)를 사용했습니다.

이를 두고 보수언론은 신영복 선생이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이라며 그의 서체를 사용한 홍범도 장군의 묘비를 비난하는 내용의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급기야 윤석열 정부 들어서는 홍범도 장군의 소련 공산당 가입 이력 등을 이유로 육군사관학교에 설치했던 장군의 흉상 철거를 결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홍범도 장군의 업적과 다른 기념물들이 공격당하면서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홍범도 장군의 묘까지 위협을 받는 것은 아닐지 우려까지 생겼고, 카자흐스탄 동포들은 “모셔갔으면 제대로 모셔라”며 분노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먼 타국에 있을 때는 ‘정신적 지주’로 추앙받던 홍범도 장군이 정작 고국에 와서는 여러 수난을 당하고 있으니 잘 모시겠다던 다짐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겁니다.

제3묘역 안장이유, 알고보니…

▲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안장된 독립유공자 제3묘역. 주차장 왼쪽 붉은색 네모가 홍범도 장군이 안장된 917번 묘지이다. ⓒ 임재근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3묘역 917호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이곳에 안장된 것에도 불편한 점이 있습니다.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은 1987년 4월 6일에 최초 안장을 시작해 현재는 제7묘역까지 조성되어 있습니다. 독립운동가는 300만 명 정도로 추산되지만 그 중에 서훈을 받아 국립묘지 안장 자격을 갖춘 분들은 2021년 기준 대략 1만 7000명 정도 됩니다.

계속 이장해 오는 독립운동가를 모두 모시기엔 독립유공자묘역이 충분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독립운동가를 국립묘지에 모시기 위해 그간 8평 규모로 모시던 묘역 규모를 1평으로 줄여 독립유공자 제5묘역을 조성했습니다.

다만, 당시까지 생존해 있던 고령의 독립유공자에게는 예우 차원에서 8평 안장을 지속할 수 있도록 독립유공자 6묘역을 별도로 조성했습니다. 독립유공자 제5묘역은 국립묘지 밖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이 국립묘지로 이장해 오는 ‘이장 전용묘역’으로 조성했고, 2014년 7월 4일부터 독립유공자 1평 안장이 시작됐습니다. 홍범도 장군이 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될 때는 독립유공자 제5묘역도 다 차서 독립유공자 제7묘역이 조성돼 안장이 진행 중이었습니다. 당시 기준으로 본다면,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독립유공자 제7묘역에 1평 규모로 안장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장군의 귀환’이라 칭하며 공군 전투기 6대의 호위를 받으며 대통령 전용기로 유해를 송환해 왔고, 안장에서 앞서 사흘간 국민분향소를 설치하고 안장식에 대통령까지 참석했습니다. 최고의 예우를 다하는 장면을 연출하기에 1평 규모의 묘역은 부족해 보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유해 송환을 열흘 앞둔 2021년 8월 5일 국가보훈처는 급히 ‘독립유공자 묘역 운영지침’에 이장의 경우에도 필요하면 8평으로 안장이 가능하다는 예외 조항을 추가해 홍범도 장군 유해를 8평 규모로 안장했습니다.

그렇다고 1평 규모로 조성된 독립유공자 제7묘역에 8평 규모의 특별 묘지를 조성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결국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기존에 만장이 되었던 독립유공자 제3묘역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독립유공자 제3묘역은 당시 916번까지 안장되어 있던 터라, 그곳에 추가로 조성된 홍범도 장군 묘는 묘지 번호 917번을 부여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홍범도 장군의 묘지는 916번 묘 옆이 아닌, 묘역 상단에 위치한 주차장 옆으로 조성되었습니다. 그곳은 성대한 안장식을 연출할 수 있도록 공간 확보가 용이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묘지 번호만 생각해 규칙을 따라 홍범도 장군의 묘를 찾다보면 어려움을 겪거나 찾지 못하는 경우도 가끔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홍범도 장군의 업적에 비한다면, 8평 규모의 독립유공자 묘역도 작은 것이 아니냐고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데 독립운동가의 공적이나 서훈의 등급에 따라 묘지의 크기를 달리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홍범도 장군의 삶을 되새겨본다면 그러한 특별한 대우를 달가워하지 않으셨을 거란 생각도 듭니다.

▲ 917번의 홍범도 장군 묘비 옆쪽으로 182번 묘비가 보인다. 묘지 번호는 보통 안장순서대로 부여하는데, 홍범도 장군의 경우 순서 규칙에 어긋나 묘지 번호로 묘지를 찾다보면 혼선을 겪는 경우도 있다. 묘비명 뒷면에는 묘지 번호 아래 ‘1868년 8월 27일 평양 출생 1943년 10월 25일 카자흐스탄 서거’라고 적혀 있다. ⓒ 임재근
▲ 홍범도 장군 묘가 조성될 때, 4기의 묘를 조성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했다. 홍범도 장군 유해 안장 이후 918번, 919번, 920번 묘가 홍범도 장군 묘 주위로 들어섰다. 이 분들은 생존해 계시다가 사망한 독립유공자로 독립유공자 제6묘역에 안장될 분들이었으나, 홍범도 장군 유해 안장 당시 추가로 조성된 8평 규모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국립묘지에 안장될 때는 홍범도 장군 묘 오른편 뒤에 조성된 묘지처럼, 비목을 먼저 세운 후 이후에 비석으로 교체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홍범도 장군의 경우 안장식 당일에 바로 비석을 세웠다. 일부 보수언론에서는 홍범도 장군 묘 비석의 글씨체가 어깨동무체(신영복체)라는 것을 트집 잡는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군의 묘를 찾는 이들이 무척 많다.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묘지 앞에 잔디를 보호하기 위해 플라스틱판을 깔아둘 정도이다. ⓒ 임재근

홍범도 장군은 스탈린의 고려인강제이주정책에 의해 1937년에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로 강제이주되어 그곳에서 극장 수위 등으로 일하다가 1943년 10월 25일에 7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군은 살아생전에 “내가 죽고 해방되면 꼭 고국에 데려가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홍범도 장군이 그토록 바랐던 해방은 장군이 세상을 떠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아 이루어졌지만 해방과 동시에 고국은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습니다. 결국 장군을 고국으로 모시지 못한 채 세월은 흘러갔고, 78년 만에 대전현충원으로 모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홍범도 장군이 데려가 달라던 고국은 어디였을까요. 장군은 해방된 고국이 지금처럼 남과 북으로 분단될 거라 상상조차 못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해방과 동시에 맞이한 분단은 금세 해결되지 못하고 남과 북은 전쟁까지 치르면서 분단은 점점 강화됐고 아직도 해결이 요원합니다. 분단을 극복하지 못한 상황에서 홍범도 장군을 대전현충원으로 모셔 온 것은 장군의 유언을 제대로 실천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홍범도 장군을 비롯해 외국에 묻혀 있는 독립운동가의 유해를 송환하는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분단은 죽은 독립운동가에게 자신의 고국을 남과 북 중에서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모습입니다. 더 많은 독립운동가를 모셔 오는 것이 마치 체제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으로 인식해 모시기 경쟁에 몰두한 점도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남측에서 홍범도 장군 유해 송환을 추진할 때부터 북측은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고향 평양에 묻혀야한다며 발끈하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타국에 잠들어 있는 독립운동가를 고국으로 모셔 와 잘 모시는 것도 필요하지만 분단된 고국에 모시는 것은 이처럼 불편한 부분도 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이 타국에 잠들어 있는 것이 불편할 수 있지만, 통일된 고국에 모시는 것이 유훈을 진정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통일되기 전에라도 하루빨리 고국으로 모셔 와야 했다면, DMZ 부근에 남과 북이 함께 모실 수 있는 특별한 묘역을 조성하는 등의 방안을 협의했더라면 오히려 통일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 2021년 8월 18일, 홍범도 장군의 유해 안장을 위해 대전현충원 현충관에 임시 안치되어 있던 유해를 독립유공자 3묘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 임재근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대전현충원에 안장되면서 홍범도 장군 묘를 찾는 분들이 많아졌고, 국립묘지의 성격과 독립운동가와 독립운동사에 대한 관심도 부쩍 늘어나 반갑습니다.

그럼에도 앞서 살펴본 여러 가지 불편한 상황을 통해 독립운동가에 대한 진정한 예우는 어떠해야 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덧붙이는 글 | *참고자료
김삼웅,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평전>, 레드우드, 2019.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2009.
“홍범도 묘비도 신영복체… 보안법 연루자 서체 사용 논란”, <조선일보>, 2021.08.19.
“文청와대 “홍범도 1평? 그림 안나와”…법 바꿔 8평 안장”, <중앙일보>, 2023.09.01.
공훈전자사료관(https://e-gonghun.mpva.go.kr)

임재근 기자

<2024-04-21>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항일독립에 생애 건 홍범도 장군, 친일행위자와 동거… 꼭 그래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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