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조민희
일본의 대한제국 강점을 도운 고위층 친일파들은 1910년 가을부터 대박을 터트렸다. 국권이 넘어간 해인 그해 10월, 이들은 왕족급인 공족(公族)이나 조선귀족에 편입돼 일본 작위를 받았다.
뒤이어 연이율 5%의 이자가 지급되는 은사금도 받았다. 1911년, 이들에게 최고 83만 원에서 최하 2만 5000원까지의 국채증서가 주어졌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3-1권은 <역사문제연구> 제21호에 실린 이기훈의 논문을 근거로 “가장 많은 금액을 받은 이재면은 83만 원을 받았는데, 환산 기준으로 하면 166억 원에서 830억 원 정도로 환산”된다고 설명한다.
한국 강점 당시에 일본은 2명의 공족과 76명의 조선귀족을 선정했다. 이들은 일종의 선전용으로 활용됐다. 일본의 한국 지배로 인한 혜택이 한국인들에게 돌아간다는 인상을 조성하는 데 이용됐다.
하지만 이들의 부귀영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강점 당시만 해도 조선총독부가 후원하는 조선귀족일본관광단에 합류해 무료 여행을 즐기며 세상의 이목을 끌었던 이들은 3·1운동 뒤인 1920년대에는 전혀 다른 시선을 받게 됐다. 한마디로, 알거지들이 이들 중에서 대거 속출했다. 1928년 3월 3일 자 <조선일보> 기사 ‘몰락의 심연을 질주하는 조선귀족’에 이런 대목이 있다.
“요사이 조선귀족들의 재산이야말로 봄눈 녹듯이 하나식 둘식 소리 업시 사라저버리는 모양인데, 요지음 자작 됴민희 씨도 파산선고로 인하야 이월 이십 구일부터 그 례우까지 뎡지되었는데”
파산선고로 귀족 예우가 정지된 자작 조민희는 이완용의 손위 처남이다. 그가 파산선고를 받은 직접적 원인은 1925년 4월 6일 자 <동아일보> ‘횡설수설’의 “이완용의 처남, 자작 조민희는 도박자금을 어드랴다가 사기·횡령의 혐의로 고소를 당하엿다든가”라는 문장에서 확인된다. 1925년 기사에는 ‘조민희’로 표기되고 1928년 기사에는 ‘됴민희’로 표기된 것은 나중 기사에는 그의 이름이 한글로 적혔기 때문이다.
친일파 지위 이용해 상당한 재산 축적
인생 막판에 가서는 도박·사기·횡령·파산 등에 얽혔지만, 청년 시절의 조민희는 상당히 전도유망했다. 이완용보다 1년 뒤인 1859년 한성부에서 출생한 그는 26세 때인 1885년 과거시험 대과에 급제하고, 승정원 부정자 등을 거쳐 20대 후반에 고을 원님이 됐다. 28세 때 지금의 경기도 안성시 일원인 양성의 현감이 되고 뒤이어 용인의 현령이 됐다. 31세 때인 1890년에는 국립대학을 이끄는 성균관 대사성이 됐다.
그 뒤 차관급인 법부협판과 군부협판을 지내고 뒤이어 주미공사·주일공사를 역임한 다음에 1907년 황제 비서실의 수석비서관급인 비서감승이 됐다. 그해부터 친일단체인 신사회나 동아개진교육회의 간부 쪽으로 방향을 튼 그는 1910년 대한제국 멸망 직후에 자작이 되어 은사공채 5만 원을 받았다.
그 후에는 사업 경영 쪽으로도 비중을 뒀다. 권업주식회사와 조선무역주식회사를 세우거나 관여했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는 중추원 고문이 되어 연봉 1600원을 받고, 1921년에는 지금의 국회의원 급인 중추원 참의가 되어 연봉 3천 원을 받았다.
독립운동가 조봉암의 회고록 <나의 정치백서>에 따르면, 조봉암은 18세 때인 1915년에 군청 임시직인 고원(雇員)이 되어 월급 7원을 받았다. 연봉으로 환산하면 84원이다. 조민희가 받은 은사공채나 중추원 연봉이 얼마나 거액인지를 알 수 있다. 친일파 지위를 이용해 사업에도 관여했으니 그가 축적한 친일 재산은 상당했다.
그런데도 몰락했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조민희 편에 인용된 일본 문서에 따르면, 그의 동생인 이완용의 부인이 매월 50원을 보조해줬지만 그의 몰락을 막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69세 때인 1928년에 파산산고를 받고 조선귀족 예우를 정지당했다. 이 지경까지 내몰린 것은 그 자신이 도박에 빠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코 그 개인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의 파산을 보도한 위의 1928년 <조선일보> 기사는 “요사이 조선귀족들의 재산이야말로 봄눈 녹듯이 하나식 둘식 소리 업시 사라저버리는 모양”이라고 전했다. 1927년 2월 28일 자 <조선일보> 사설 ‘조선귀족론’은 친일 귀족들의 몰락이 1920년대의 일반적 현상이었음을 보여준다.
“근일의 각 신문지는 조선귀족이 영락의 심연으로 질주하고 잇는 것을 보도하엿스니, 후작·자작 등 4귀족이 파산선고를 당하게 되엇다는 것이다. 이와 가티 하야 조선귀족이 몰락하야가는 상태를 우리 안전(眼前)에 볼 때에 우리는 인간적으로 그들의 처지에 연민의 정을 표할 수도 업지 안켓지마는 그들의 몰락을 대관(大觀)할 때에 그들은 귀족 전체로서의 필연한 운명을 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잇는 것이다.”
오늘날의 신문 사설 상당수는 대기업에 대한 정부 규제를 완화하고 대기업을 더욱 많이 지원해야 대한민국의 미래가 밝아진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재벌의 입장을 반영하는 이런 사설들이 끊임없이 쏟아지는 것은 대규모 재산과 정치적 비호의 상관성을 보여준다. 재벌의 정치적 영향력이 약해지면 이들의 재산 유지나 증식이 불리해질 수밖에 없는 구도와 관련이 있다.
조선귀족들은 식민지 한국의 정치적 역학관계에 힘입어 재산을 유지했다. 개인적으로 사업을 하건 않건, 이들의 곳간은 정치와 맞닿아 있었다. 보호막 역할을 해줄 정치 시스템이 굳건해야 이들의 창고도 든든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이들의 재산은 정치적 자본과 정비례 관계였다.
친일 귀족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대표
그런데 1919년 3·1운동은 조선귀족을 에워싼 정치환경을 바꿔놓았다. 이들이 더 이상 전폭적인 정치적 비호를 받기 힘든 상황을 조성했다. 일반 서민층이 대거 궐기한 3·1운동은 이들의 사회적 입지를 크게 축소시켰다. 거기다가 이들을 대체할 세력이 출현해 총독부의 주목을 집중시키는 현상도 그 이후에 나타났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3-1권에 아래와 같은 설명이 있다. 3·1운동의 충격을 받은 일제가 무단통치를 문화정치로 전환한 것이 조선귀족들에게 미친 파급력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문화정치로 전환한 일제의 식민정책과 맞물려 다양한 계층의 지식인들이 성장하였다. 비록 제한된 범위이지만 언론·출판·집회·결사·표현의 자유가 가능하였고 이에 따라 다양한 언론매체들이 탄생하였고, 이를 통해 문화·예능·언론·교육·경제 등의 각 방면에서 전문가 집단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환경의 변화는 정체되어 있고 몰락해가는 조선귀족보다 일제 당국이 선택할 수 있는 협력자의 선택지가 넓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좁게 보면 조선귀족들의 사업 실패나 도박 중독이 이들의 파산을 초래한 직접적 계기이지만, 크게 보면 조선 민중들이 조선귀족들을 더욱 적대하게 되고 총독부가 조선귀족보다 전문가집단을 더 선호하게 된 것이 거시적 원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총독부는 창복회라는 구제단체를 만들어 조선귀족들을 도와줬지만, 1911년처럼 파격적 지원은 베풀지 않았다. 민중의 증오를 받는 조선귀족보다는 새롭게 등장한 한국인 전문가집단을 이용하는 편이 일제 당국에는 더 유리했다.
3·1운동을 계기로 조선귀족들의 정치적 자본은 취약해졌다. 이렇게 정치적 효용성이 떨어진 상태에서 이들의 사업 실패나 도박이 많아졌고 그것이 더욱 도드라지게 대중들에게 노출됐다. 이에 더해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로 세계 곳곳에서 귀족계급의 몰락이 가속화된 것도 이들의 운명에 영향을 주었다.
조민희는 그러한 친일 귀족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대표했다. <친일인명사전>은 “1923년 중순경(중반경의 오자인 듯)부터 채권자들의 소송이 이어지는 한편, 파산신청에 대한 재판에도 20여 차례나 소환에 불응해 조선귀족 최초로 구인장을 받았다”고 설명한다.
20대 후반에 사또도 되고 서른 직후에 성균관 대사성이 되는 등, 한때 전도유망했던 조민희는 친일 전향 이후에 더욱 승승장구하는 듯했다. 하지만 친일 귀족의 몰락을 재촉하는 3·1운동의 충격파를 견디지 못하고 1920년대 후반에 경제적으로 몰락해 세상의 조롱을 받았다. 1931년 1월 2일,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김종성 기자
<2024-04-21>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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