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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속화보 임시증간 : 일청전쟁도회·정청도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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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 57]

풍속화보 청일전쟁편에 깊숙이 녹아있는
‘문명과 야만’이란 편향된 시선
『풍속화보 임시증간 : 일청전쟁도회·정청도회』(2)

1894년 7월 25일 일본 해군이 풍도 앞바다에서 청국군 군함을 기습공격해 격침시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시사신보(時事新報)』에 「청일전쟁은 문명과 야만의 전쟁」이라는 논설을 기고하였다. 그 논설에서 후쿠자와는 청일전쟁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전쟁은 청일 양국 사이에서 일어났다 하더라도 그 근원을 따지자면 문명개화의 진보를 꾀하는 자와 그 진보를 방해하려고 하는 자 간의 싸움이지, 결코 양국 간의 싸움이 아니다.(「日淸の戰爭は文野の戰爭なり」, 『時事新報』 1894.7.29)

청일전쟁을 ‘문명과 야만의 전쟁’이라고 규정한 것은 조선과 청나라에 대한 침략의 정당성을 담보하고 일본인의 애국심을 고취할 수 있어 당시 지식인과 언론인 사이에서 널리 공유되었다. 『일본신문(日本新聞)』의 사장 겸 주필인 구가 가쓰난(陸羯南)도 청일전쟁이 조선의 현상(現狀)을 좌시할 수 없는 인도상의 후의(厚誼)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 전쟁의 목적은 “동양의 진보를 꾀하기 위해 중국이라는 야만을 치는 데 있다”(「征韓の王師」 1894.8.16)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후쿠자와의 문명개화론에 입각한 정한론(征韓論), 북진론(北進論)은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승리에 힘입어 이후 대동아공영권이란 미명하에 1930~40년대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추동하는 대외침략의 이데올로기로 확장되었다.

청일전쟁은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정부가 벌인 최초의 근대전이어서 전사회적으로 전쟁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대단했다. 이에 따라 『아사히신문』, 『고쿠민신문』, 『요미우리신문』등 주요 일간지나 잡지사들은 조선과 중국의 전장에 수많은 종군 기자와 화가, 사진사를 파견해 그때그때의 전쟁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도하고자 했다. 조재곤의 연구(조재곤 2024, 336쪽)에 따르면, 청일전쟁 당시 육군 종군기자는 66개사 114명이고 종군화가 11명, 사진사 4명이었다고 한다. 『풍속화보 임시증간 제84호 정청도회 제5편』(1895.1.25.) 뒷표지 광고의 “제6편에는 여순함락 후의 전황을 종군해서 직접 전지를 순회하며 실제 목격해온 문호 치즈카 레이스이(遲塚麗水. 메이지·다이쇼 시기의 작가, 신문기자) 씨의 건필로 기술된다.”는 내용에서 보듯이 풍속화보의 제작사인 동양당(東洋堂)에서는 1894년 11월 여순전투 때부터 종군 기자와 화가들을 파견했던 것이다.

일본 정부는 1894년 8월 개전 후에 「신문기자종군규칙」과 「종군심득(從軍心得)」 등을 제정해 종군 신문기자, 화가, 사진사를 그 자격요건에 따라 심사하고 기사 작성 요령 등을 통해 기사 내용도 철저히 관리, 검열했다. 이리하여 “일본인 특파원들은 객관적이고 정확한 사실 보도보다는 일본제국의 나팔수로서 ‘문명과 야만’이라는 도식을 적용, 이웃 나라를 모멸하는 배외적인 충군애국주의로 일관했다.”(조재곤 2024, 334쪽)

충군애국주의에 바탕을 둔 ‘전쟁영웅 만들기’의 대표적인 사례로 앞의 화보 ③, ④, ⑤에서 보듯이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안성 직격의 나팔 병졸’ 시라카미 겐지로이다. 시라카미가 성환전투에서 부대의 선두에서 총탄을 맞으면서도 진군나팔을 불며 입에서 떼지 않았다는 영웅담으로 ????도쿄니치니치신문???? 1894년 8월 9일자에 최초로 실린 다음, 각종 신문잡지를 장식했고 1903년 일본 교과서에까지 수록되었으며, 군가의 가사로도 활용되었다. 하지만 뒤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실제 나팔수는 기고치 고헤이였고, 시라카미는 예비소집병으로서 안성천 도하중에 익사했다고 한다. 이것은 언론 보도 경쟁에 따른 특종 조작 및 날조의 사례로 흔히 회 자된다.

둘째, 평양성 함락 시 혼자 평양성의 현무문을 열어 일본군을 맞이했다는 일등졸(一等卒) 히라다 주키치이다. 히라다 주키치는 아이치현의 빈농 출신으로 청일전쟁 때 재소집되어 1894년 9월 평양전투에 참여했다. 그는 결사대의 선봉에 서서 제일 먼저 평양성 현무문에 올라가 문을 연 공로로 상등병으로 진급하고 공7급 금치(金鵄)훈장을 받았다. 히라다의 전투 장면은 각종 니시키에로 그려져 유포되었고 「히라다의 무용」, 「평양의 전투」 등 각종 군가도 제작되었으며 심지어 군신(軍神)으로까지 추앙되었다. 그러나 히라다는 귀향 후 방탕한 생활을 하다 금치훈장을 박탈당하고 말았다. 실제로 공을 세운 사람은 무라마쓰 메이타로라는 병사라는 설도 있고, 히라다와 그의 지휘관 미무라 키타로 중위, 무라야쓰 메이타로 등 15명의 결사대라는 설도 있다. 히라다는 결국 충군애국을 조장하기 위해 조작된 영웅 만들기에 놀아난 희생자였던 것이다.

끝으로 인간애가 느껴지는 전쟁 미담이다. 우장(牛莊) 시가에서 행군 중에 길가에 버려진 중국인 아기를 발견한 히구치 대위가 그 아기를 들어올리니 울음을 그치자 어쩔 수 없이 아기를 품에 앉고는 적진을 향해 나아갔다는 일화이다. 이 이야기는 각종 잡지의 삽화나 니시키에로 제작되었고 일본의 문호 사사키 노브쓰나가 작사한 「적(敵)의 고아」라는 노래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 일이 실제 전장에서 일어났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일본군의 휴머니즘, 인간미를 부각하고 있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풍속화보 청일전쟁편에서는 일본군의 전쟁영웅 만들기, 휴머니즘과 인간미를 크게 부각시키고 있는 반면에 한병(韓兵)과 청병(淸兵)의 잔혹한 학살 장면과 탐욕스런 만행을 자주 다루고 있다. 앞의 화보에서 나오듯이 갑신정변 당시 서울 거주 일본인들의 조난 장면을 시각화하고 있고 자국민들에게 저지르는 한병과 청병의 패악상을 매우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더욱이 화보 ⑨의 독만두 사례는 엽기적이기까지 하다. 이와 관련한 『풍속화보 임시증간 제92호』의 기사(32쪽)는 다음과 같다.

비소 넣은 만두
복주(復州)에서 온 소식이다. 한 병졸이 중국 만두를 먹고 결국 병사했고 아울러 유수둔(柳樹屯)에서 일본 군부(軍夫) 3명이 목침을 베고 죽었는데 검시해보니 역시 만두를 먹은 것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군의(軍醫)가 이를 듣고는 “청인(淸人)이 독을 우물에 풀어 이를 마시게 하는 일이 적지 않다. 그 만두 안에는 소량의 비소가 있음을 발견했는데 토민 중에 고의로 이것을 만든 자가 있음이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일본군 병사 여러 명이 비소가 든 만두를 먹고 사망했다는 전언이다. 실제 이런 일이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중국인이 의도를 가지고 독극물을 먹게 했으리라고 단정하는 것은 중국인에 대한 잘못된 편견에 의한 것이라 짐작된다. 이 보도의 의도는 중국인의 비문명적인 만행을 기술하여 중국인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하는 데 있음이 분명하다. 이렇듯 유언비어로 떠도는 이야기들이 팩트체크도 없이 사실인양 ????풍속화보????에 보도된 경우가 허다했다.

왕소염(王筱艶)은 청일전쟁기의 전쟁화(戰爭畵)를 분석한 논문(왕소염 2023)에서 ????풍속화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는데 이는 『풍속화보』를 비롯한 당대 일간지들의 성격을 정확히 규정한 것으로 파악된다.

『풍속화보』는 일본군 대본영(大本營)의 발표를 기초로 제작된 작품이 많고, 정부로부터 명확한 지도를 받았고 더 나아가 정부와의 상호 협력과 정부의 허보(虛報)를 선전하고자 했다. 전쟁 합리화를 위한 정부의 선전 간행물로서 (화보) 작품에 당시 일본사회의 군국주의적 열광이 반영되어 있다.

[참고문헌]
조재곤, 『조선인들의 청일전쟁―전쟁과 휴머니즘』, 푸른역사, 2024
박양신, 「청일전후 일본 지식인의 대외인식론―陸羯南과 德富蘇峰을 중심으로」, 『동양학』 제31집(2001.6)
王筱艶, 『日清戦争期における戦争画の萌芽、形成とそのあり方-日本・中国・欧米との比較を中心として』(中央大学大 学院法学研究科政治学専攻博士後期課程, 2023.7)

• 박광종 특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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