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어느 ‘장수 청년’의 사이판 종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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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글방 12]

어느 ‘장수 청년’의 사이판 종횡기

김명환 선임연구원

어르신을 만난 것은 2007년 5월의 햇살 좋은 날이었다. 당시 필자는 태평양전쟁 동안 남양군도로 동원되었던 분들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운 좋게 연락이 닿아 전라북도 장수군으로 내달렸다. 어르신의 집은 첩첩산중이라는 말이 너무나도 아울리는 곳에 있었다. 당시 82세였던 어르신은 이 고장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다고 하였다. 젊었을 때 고향을 떠난 적이 한번 있었는데, 그 시절 이 땅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했던 시국 때문이라고 했다. 이 불가피한 사건은 너무도 강렬하여 여든이 넘은 노인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가 젊은 시절 겪었던 일의 대강을 이 지면을 통해 소개해보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편의상 이야기의 주인공을 ‘장수 청년’으로 부르고자 한다.

고향을 떠나 사이판으로 가다

장수 청년은 1926년생으로 고향에서 농사를 짓던 평범한 사람이었다. 학교는 4년제 보통학교를 다녔는데, 그나마도 다 마치지는 못하였다고 했다.

보통학교는 식민지시기 조선인 아동을 대상으로 한 교육기관이었다. 보통학교는 4년제 혹은 6년제로 운영되었는데, 장수 청년이 살던 곳은 한적한 시골이었으므로 4년제 보통학교가 설치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도 다 마치지는 못하였다고 했는데, 그 때문인지 장수 청년은 일본어를 못하였다고 했다.

고달픈 일상이 연속이던 ‘소화16년’ 어느 날 장수 청년의 눈길을 끄는 일이 있었다. ‘흥발주식회사’라는 곳에서 이민을 모집한다는 것이었다. 흥발주식회사의 이민 모집원들이 남원, 순창, 임실 방면을 돌며 노무자를 모집하고 있었다.

‘흥발주식회사’의 본 명칭은 ‘남양흥발주식회사(南洋興發株式會社)’로 1921년에 설립된 민간회사였다. 줄여서 ‘남흥(南興)’으로 불렀다. 주요 사업 분야는 제당 및 주정업으로 사이판(Saipan) 및 티니안(Tinian)에 공장과 농장을 가지고 있었다. 민간회사였음에도 남양흥발은 일본해군 및 남양청 등 당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사업은 날로 번창하여 1930년부터는 남양흥발의 출항세만으로도 남양군도 예산을 충족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남양흥발이 1939년부터 조선에서 노무자를 대규모로 모집해가기 시작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후 일본에서의 노동자 모집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매년 수백 명의 조선인들이 남양흥발의 ‘이민모집’으로 사이판 및 티니안행 배에 올랐다.

장수 청년이 듣기에 모집원들의 선전은 솔깃한 것이었다. 그들이 말하기를 ‘남양군도’라는 곳은 상하(常夏)의 나라로, 이곳에 가면 학문도 배울 수 있고 사탕수수 재배로 돈도 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들이 보여준 남양군도의 풍경 사진은 홀딱 빠질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귓속에 박힌 말은 “야간 학교 가서 공부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사진도 이색적이고 돈을 벌 수 있다는 것도 좋았지만,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선전에 마음이 크게 움직였다. 또 모집에 응하지 않으면 탄광 간다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돌고 있었다. 어찌 됐건 고향에서 농사만 짓고 살기 어려운 시국이라는 것은 장수 청년도 알고 있었다. 당시 그는 16세에 불과했으나 모집에 응했고 모집원들에게 최종적으로 선발되었다. 2년 기한이라고 하였고, 떠나기 전에 선불로 10원인지 20원인지를 받았다고 한다.

출발날짜가 다가오자 장수 청년은 ‘모집’에 붙은 사람들이 모이기로 한 남원군청으로 향했다. 거의 2,000명쯤 되는 것 같았다. 여기에서 신체검사를 받았고 여수로 이동하여 대기하다가 마침내 ‘가마쿠라마루(鎌倉丸)’라는 배를 탔다.

당시는 국가총동원체제가 작동하던 때로 많은 조선인들이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동원되고 있었다. 부산 이외에 여수에서 배를 타는 경우도 있었는데, 전라도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인 장수청년 일행이 그랬다. 그가 승선했다는 가마쿠라마루는 일본우선주식회사 소유로 1만 7천톤에 달하는 거대한 선박이었다.

여수를 떠난 후 며칠 동안 항해를 계속하였는데, 도중에 ‘대동아전쟁’이 터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전쟁이 나서 다시 일본으로 돌아갈 줄 알았으나, 항해를 계속하여 사이판에 닿았다.

여기에서 장수 청년의 동원시기를 명확히 알 수 있다. 1941년 12월 초순경 여수를 떠난 것이다. 조선으로부터 사이판까지는 대체로 1주일가량 걸렸다고 하는데, 장수 청년은 5일가량 걸렸다고 증언하였다.

농장을 전전하며 노동하다

장수 청년이 처음 자리잡은 작업장은 ‘직영농장’이었다. 직영농장은 항구가 있던 마을에서 기차를 타고 1시간 정도 이동한 곳에 있었다.

직영농장은 말 그대로 남양흥발이 직접 관리하던 농장이었다. 당시 사이판에는 남양흥발의 농장이 여섯 군데나 있었다. 이중 제1~5농장 등 다섯 군데는 소작농을 써서 경작하였고, 미나
미촌(南村)의 직영농장은 남양흥발 사이판제당소가 직접 관리하였다. 조선인들은 직영농장을 ‘족구농장’ 혹은 ‘조고에’라고 불렀는데, 직영(直營)의 일본어 발음인 ‘초쿠에이(ちょくえ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직영농장은 장수 청년의 최종목적지가 아니었다. 한 열흘 정도 머물다가 40~50명가량의 노무자들과 함께 ‘제5농장’으로 옮겨갔다. 조선인 노무자들의 숙소로는 교실 형태의 바라크가 배정되었는데, 한 방에 6명씩 들어갔다. 장수 청년은 남원 사람들과 함께 지냈다.

제5농장도 남양흥발이 관리하던 사업장으로 사이판 동부 이즈미촌(泉村)에 조성되어 있었다. 직선거리로 보면 사이판의 관문이자 행정중심지였던 가라판(Garapan)과 가까웠으나, 중간에 산악지대가 있어서 왕래하기는 힘들었다. 다른 촌락과는 철도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종점이었으므로 가라판을 기준으로 보면 가장 먼 촌락이기도 했다.

제5농장은 사탕수수농장으로 소작인은 모두 일본이나 오키나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오키나와 사람들이 많았다. 제5농장에 조선인 소작인이 있었는지 여부는 아직 알 수 없다. 기본적으로 소작인은 조선인 노무자보다 신분상 우위에 있었다. 흥발회사로부터 조선인을 인계받아 부리는 쪽이었기 때문이다.

사이판의 날씨는 매우 더웠으나 장수 청년은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고 한다. 그러나 매일 씨름해야 하는 사탕수수는 거칠어서 애를 먹었다고 한다. 사탕수수 줄기에 솟은 수많은 가시에 찔려서 상처를 달고 살다시피 했다. 더운 것은 견딜 수 있었으나 상처는 아니었다. 땀으로 범벅이 되어 살았으므로 상처가 잘 아물지 않았고, 이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조선인 노무자 관리는 반장이 책임졌다. 장수 청년이 속한 반은 스무 살 전후한 사람이 반장이었는데 일본어를 꽤 잘했다. 몇 달 동안 제5농장에 머물며 소작농들을 도와 일을 했다.

제5농장 일에 적응할 무렵 장수 청년은 다시 이동하여 ‘차란카마치(チャランカ町)’로 왔다. 차란카는 이전에 머물렀던 직영 농장이나 제5농장과 달리 번화한 마을이었다. 여기에는 제당공장이 있었고, 공장에 속한 관리자와 노무자들이 많이 살았다. 병원도 있었고,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각종 상점과 극장도 있었다.

일본 정부는 본국에서 시행하던 정촌제(町村制)를 남양군도에서도 시행하였다. 이에 따라 사이판은 2개의 정과 4개의 촌으로 편제되었다. 사이판의 관문 역할을 한 가라판과 남양흥발 사이판제당소가 있었던 차란카는 인구 밀집 지역이었으므로 정으로 편제되었다. ‘차란카’는 ‘찰란 카노아(Chalan Kanoa)’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장수 청년은 제당소가 관리하는 묘목장에 배치되었다. 묘목장은 제당공장 뒤편에 있었는데, 사탕수수나 고구마의 묘목을 키워 각 농장에 제공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미 한 20명 정도의 조선인들이 배치되어 일하고 있었다. 읍내로 나온 만큼 숙소도 회사 사택을 배정받았다. 사택은 함석으로 지붕을 만든 집으로, 한 집에 두 가구씩 살았다.

묘목장 근무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으나 근무지가 소채원(蔬菜園)으로 바뀌었다. 소채원 또한 흥발회사 소유의 작업장으로 말 그대로 각종 야채를 재배하 는 곳이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있다면 이 야채의 납품처가 군부대였다는 것이다. 당시 차란카정에는 군부대가 없었으나, 가라판에는 ‘해군본부’가 있었다. 소채원에는 반장과 기술자 등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조선인들이었다. 먹고사는 일이 항상 큰 문제였으므로 조선인들은 인근 습지를 개간하여 벼농사를 지었다. 기후가 좋아 농사는 참 잘 됐다. 결과적으로 소채원은 장수 청년이 일한 마지막 흥발회사 작업장이었다.

장수 청년의 묘목장 및 소채원 근무 이야기는 당시 조선인 노무자의 일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장수 청년의 제5농장 시절이 보여주듯이 사이판에서 보통의 경우는 사탕수수 농장에 배치 되었으므로 농촌지역의 노동실태를 보여주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소채원 시절은 농업관계의 일에 종사하더라고 시가지 근처에서 생활하였다는 점에서 조금 다르다. 그리고 단순히 장수 청년의 증언에서만 조선인의 존재가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일본인이 남긴 기록에서도 그 흔적이 발견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오키나와현사(沖繩縣史)』 자료편 제17권(2003)에 첨부된 「사이판도 차란카 시가지 견취도(サイパン島チャランカ市街地見取圖)」에는 1940년대 차란카의 번화한 풍경이 묘사되어있다. 이 지도에는 찰란카노아 중심부에 남양흥발 사이판제당소 및 사택지구가 넓게 자리하고 있고 그 주변에 많은 일본인 상점이 포진해있는 정황이 표현되어 있다. 중심부에서 벗어난 곳, 사택지구 옆에 ‘종묘지구(種苗地區)’가 있고 바로 인접하여 ‘조선인 숙사’가 있다. 종묘지구는 장수 청년이 말한 묘목장일 것이다. 장수 청년은 ‘사택’을 배정받았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사택지구에 인접한 ‘조선인 숙사’에서 생활했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인 노무자가 흥발회사의 ‘현업원’으로 채용되는 경우가 드물었다는 점에서 그렇게 볼 수 있다.

소채원에서 재배한 야채를 군부대에 납품하였다는 점도 이채롭다. 남양흥발과 더불어 남양군도 개발에 적극적이었던 국책회사 남양척식은 조선인 노무자를 동원하여 팔라우(Palau) 및 트럭(Truk) 등지에서 채소농장을 운영하였다. 남양척식의 채소농장 운영은 전부 군납을 위한 것 이었는데, 사이판에서는 이 역할을 남양흥발이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수 청년은 조선인들이 차란카 읍내 인근의 습지를 개간하여 벼농사를 지었다고 하였다. 실제로 시가지 안쪽에는 습지가 남북방향으로 넓게 자리잡고 있다. 이런 지리적 특징으로 보아 장수 청년의 기억이 정확하다는 점도 확인된다.

전화에 휩싸인 섬에서 살아남다

일이 고되기는 해도 살만했던 시절은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아직 차란카에 군인은 없었으나, 장수 청년에게 점점 전쟁이 다가오고 있었다.

장수 청년이 처음으로 미군의 공습을 경험한 것은 소채원에서 일하던 때였다. 다행히도 소채원 가까이에 규모가 큰 방공호가 있었으므로 공습경보가 울리면 모두 방공호로 대피했다. 폭격이 심할 때는 며칠간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장수 청년은 방공호가 소채원에서 약 1㎞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하였다. 제당공장 인근은 저지대에다가 주변이 습지였으므로 규모가 있는 지하시설을 만들기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제당공장에서 남동쪽 습지 건너편에 방공호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군 기동함대가 처음으로 사이판을 공습한 것은 1944년 2월이었다. 마셜제도 및 트럭제도를 제압한 후 곧바로 북마리아나제도를 공격한 것이었다. 미군의 공습에 놀란 일본군은 사이판의 군비 증강을 서둘렀다. 4월 1일 현지 주둔군은 남양흥발과 협정을 체결하여 흥발회사의 시설과 노무자들을 군무(軍務)에 동원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일본 육군 제43사단도 상륙하여 각지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장수 청년은 당시 주둔하였던 일본군 부대를 만주 목단강에서 온 ‘도라부다이’라고 기억하였다. 이 증언은 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일본 육군 중 ‘도라(虎)’를 통칭호로 쓴 부대는 제19사단으로 알려져 있다. 제19사단은 함경북도 나남에 주둔하다가 1944년 12월 필리핀 루손에 배치되었다. 사이판과는 사뭇 거리가 있는 곳에 주둔하였다는 말이다. 장수 청년이 잘못 기억하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다른 ‘도라’부대가 있는 것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미군의 본격적인 사이판 공격은 1944년 6월 11일 시작되었고, 6월 15일에는 찰란카노아 해안으로 상륙하기 시작하였다. 공격하던 미군이나 방어하던 일본군이나 사활을 걸기는 마찬가지였고, 민간인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방공호로 대피하여 은신하였다. 이 과정에서 각자의 운명이 엇갈렸다. 소채원에서 장수 청년과 함께 일하던 사람 중에는 ‘도라부대’의 방공호로 대피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결국 모두 죽었다. 미군 점령에 즈음하여 일본군이 방공호에 독가스를 살포하여 모두 ‘옥쇄’하였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고 했다.

미군이 상륙한 후 전차를 앞세우고 방공호 근처까지 와서 연일 투항을 권고하였다. 이 과정에서 방공호에 숨어있던 일본군과 미군 사이에 교전이 벌어져 애꿎은 조선인 노무자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많은 조선인들이 미군에 의해 구조되었다.

포로수용소에서 생활하다

미군이 차란카를 장악한 후 장수 청년은 포로가 되었다. 포로수용소는 차란카 읍내 북부에 설치되었다. 조선인들은 원주민 및 일본인과 분리되어 바닷가쪽 제2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인원은 약 1,000명가량 되었을 것이다. 포로들은 민간인과 군인․군속이 구분되어 수용되었다. 전시에 어떻게 될지 몰랐으므로 사정을 아는 사람들이 조선인 군속을 단순 노무자라고 주장하여 민간인 수용소에 들어오도록 한 경우도 있었다. 조선인 중에는 현지에서 원주민과 결혼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원주민 수용소로 이송되었다고 한다.

사이판에서 미군은 난감한 문제에 직면하였다. 다수의 민간인 난민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군의 일차적인 작전목표는 일본군을 섬멸하는 것이었다. 그런 만큼 민간인 처리에 대한 준비는 없었다. 이전에 태평양에서 점령한 섬에는 민간인이 거의 없었으므로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문제였다. 그러나 사이판은 달랐다. 미군이 상륙한 다음날부터 찰란카노아 해안으로 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사이판전투가 끝난 7월 8일 난민은 약 8천 명에 달하였고 8월에는 1만 4천 명으로 늘어났다. 이들 난민을 관리하기 위해 미군은 6월 23일 제1수용소인 ‘캠프 수수페(Camp Susupe)’의 관리자를 지정하였다. 캠프 수수페에는 원주민, 조선인, 일본인 등 사이판에서 구조된 모든 민간인 난민이 수용되었다. 이후 차차 민족별 구분이 생겨서 11월 15일에는 찰란카 노아에 차모로 및 캐롤리니안 등 원주민을 위한 수용소가 설치되었고, 1945년 1월 15일에는 캠프 수수페 인근에 조선인 수용소도 지어졌다.

장수 청년은 조선인수용소가 바닷가에 지어졌다고 하였다. 오키나와 사람들이 재구성한 캠프 수수페 견취도를 보면 일본인 수용소에 인접한 해안쪽에 조선인 캠프가 있었다. 캠프에 수용되었던 조선인은 1,350명이 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이판에서 포로가 된 군인 및 군속들은 이후 하와이 포로수용소로 이송되는데,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이 점을 우려하여 군속이더라도 노무자라고 증언하여 사이판에 남을 수 있도록 했던 것으로 보인다.

포로수용소의 조선인들은 자치조직을 꾸리는 한편, 미군이 세운 노동계획에 참여하여 일당을 벌 수 있었다. 장수 청년은 수용소에서 미군으로부터 운전을 배웠다고 했다. 자신을 포함하여 약 90명의 사람들이 운전수로 선발되었다. 운전수들에게는 포로수용소 밖으로 나가 일할 기회가 주어졌다. 주로 가라판의 군항에서 아스리토(As Lito) 비행장까지 군수품을 수송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일당은 50센트로 수용소 안의 일당 30센트에 비하여 많이 받았다.

필자는 수용소에서 운전을 배웠다는 증언을 경북 성주에서도 들은 적이 있다. 아직 문서로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미군이 조선인 포로에게 운전을 가르쳤다는 것은 사실로 판단된다. 항구가 있는 가라판 북부에서 아스리토의 비행장까지의 거리는 약 12㎞였다. 전쟁 전 가라판과 아스리토는 경편철도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미군 상륙과정에서 파괴되었으므로 마땅한 운송수단이 없었던 것이다. 이 공백을 미군은 포로를 훈련시켜 메우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당은 50센트를 받았다고 했다. 여기에서 미군이 조선인 운전사들을 숙련노동자로 대우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아스리토 비행장은 원래 작은 규모였으나, 미군이 점령한 후 일신하여 대규모로 변모하였다. 아직 전투가 한창이던 때 미군은 활주로를 확장하고 격납고 신설 공사를 시작하였다. 10월에 모든 설비가 완성되어 미국 본토로부터 B-29가 날아와 착륙하였다. 11월부터는 아스리토를 떠난 B-29 편대가 일본을 공습하기 시작했다.

수용소 생활을 하던 중 드디어 전쟁이 끝났다. 장수 청년은 1946년 1월 상순에 ‘지코마치’에서 엘에스티(LST)를 타고 귀환길에 올랐다. 차란카의 수용소에 있던 조선인은 모두 엘에스 티 2대에 분승하였는데, 원주민 수용소로 간 조선인들도 귀환 대열에 참여했는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사이판의 조선인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한동안 현지에서 대기해야 했다. 태평양전쟁 동안 일본 육해군 및 민간 보유 선박이 괴멸적인 타격을 입어 해상수송이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사이판의 조선인들은 일본이 아니라 미군이 제공한 선박을 타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당시 사이판에서 귀환길에 오른 조선인 1,354명의 명부가 전하고 있다. 이 명부에는 당연히 장수 청년의 이름도 있다.

일본인 이민사에 정통한 도쿄 호세이대학(法政大學)의 이마이즈미 유미코(今泉裕美子) 교수에 의하면 1945년 말 사이판에 1,411명의 조선인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대략 60명가량은 현지에 남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당시 미군의 방침은 조선인이건 일본인이건 모두 본국으로 송환한다는 것이었으나, 이미 현지인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 조선인들은 잔류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장수 청년은 이들 현지인과 결혼한 사람들의 소식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다른 조선인들이 모두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도 이들은 사이판에 잔류하였던 것이다. 현재 사이판이나 티니안에서 확인되는 킹(King), 싱(Cing), 사이(Shai) 등의 성씨는 이들 조선인 잔류자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수 청년이 거쳐간 곳의 현재

장수 청년의 사이판행 여정은 비교적 명확한 편이어서 지금도 그 경로를 그대로 따라갈 수 있다. 그러나 이미 8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으므로 당시의 흔적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장수 청년이 사이판행 선박에 승선한 장소는 여수였다. 식민지시기 여수에는 수정동 일대의 신항(북항)과 교동․중앙동 일대의 구항(남항) 등이 있었다. 장수 청년의 승선지는 철도와 연결되었던 신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곳에는 엑스포해양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장수 청년이 사이판에서 상륙한 곳, 이후 미군의 수송업무에 투입되었을 때 드나들었던 항구는 가라판 북쪽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의 부두였을 것이다. 장수 청년은 ‘지코마치’로 기 억하였는데, 사이판에서 대형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항구는 그때나 지금이나 푸에르토리코밖에 없다. 푸에르토리코의 항만시설은 증개축을 거듭하였으므로 현재 당시의 풍경을 찾아볼 수는 없다. 다만 당시 항만 북쪽에 일본해군이 운용하는 수상비행장이 있었는데, 수상비행기의 양륙을 위해 건설했던 램프시설은 현재도 남아있다.

장수 청년이 배치되어 사탕수수와 씨름했던 제5농장은 사이판 동부 탈로포포(Talofofo)에 있었다. 사이판 서부 해안 및 남부는 개발된 곳이 많은 편인데, 탈로포포 지역은 현재까지도 대부분 미개지로 남아있다.

제5농장으로 가기 전 잠깐 머물렀던 사이판제당소 직영농장은 사이판 남부 이파당(I Fadang)과 오비얀(Obyan)에 걸쳐있었다. 남양흥발은 1930년대 중반 일본 해군과 협력하여 직영농장 안에 활주로를 건설하였는데, 이것이 아스리토 비행장이다. 미군이 점령한 후에는 이슬리 필드(Isely Field)라고 불렀다. 현재 사이판국제공항이 있는 곳이다. 공황 주변에는 대피시설 등 태평양전쟁 당시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다.

장수 청년이 가장 오랫동안 머물렀던 차란카정의 중심부는 찰란카노아 일대였다. 이곳에 남양흥발 사이판제당소가 있었고, 공장 주변에 흥발사무소 및 사택단지가 정연하게 건설되어 있었다. 공장 관련 시설뿐만 아니라 정(町)사무소, 주재소, 국민학교 등 여러 기관도 모여있었다. 사이판전투 때 공장과 주변 시설은 완전히 파괴되었으므로 당시의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다. 공장이 있었던 자리에는 1949년 마운트카멜 성당(Mount Carmel Cathedral)이 건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당 앞에는 포로수용소 자리였음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다. 마운트카멜 성당이 있는 찰란카노아에는 원주민 수용소가 설치되었었다. 조선인 및 일본인 수용소는 마운트카멜 성당 북쪽의 수수페에 있었는데, 현재 이 지역은 한적한 주택가이다. 성당 뒤편에는 공동묘지가 있는데, 원래 이 자리에는 남흥신사(南興神社)가 있었다. 불과 20년 전만 하더라도 남흥신사 자리임을 알 수 있는 도리이(鳥居)가 있었으나, 지금은 그 흔적이 모두 사라졌다.

[참고문헌]
장수 청년의 증언(1926년생, 전북 장수군 출신, 2007년 5월 15일 면담)
今泉裕美子, 「解題」, 『沖繩縣史 資料編 18 キャンプススッペ』, 沖繩縣敎育委員會, 2004.
Don A. Farrell, Saipan: A Brief History, Micronesian Productions, 2016.
다큐멘터리 <태평양 전쟁의 한국인들> 제작팀·이상아, 『태평양 전쟁의 한국인들』, 청아출판사,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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