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조진태
일제는 고위층 친일파의 통장 잔고에도 신경을 썼다. 이는 일본의 의리가 좋았기 때문은 아니다. 친일파들의 협력이 없으면 한국을 지배하기 힘들 정도로 민중의 동향이 심상치 않았다. 우호세력을 지켜주고자 주요 친일파들의 재정 상태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1894년에 일본은 동학혁명군을 진압하고자 군대를 출동시켰다. 이 군대는 조선 정부군과 청나라군에 이어 동학군까지 제압했다. 하지만 이런 군사적 우위만으로는 조선을 강점하기 힘들었다. 의병 투쟁 등이 만만치 않은 데다가 러시아를 비롯한 국제사회의 견제도 무시할 수 없었다.
전면전 방식으로 조선을 강점하기 힘들었던 일본은 1905년에 외교권을 빼앗고 1907년에 군대를 해산하고 1910년에 경찰권을 빼앗는 방법으로 대한제국을 약화시켰다. 1894년의 군대 출병으로 우위를 확보하기는 했지만, 일반 민중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대한제국을 멸망시켰다. 그래서 친일파들의 협력이 더욱 절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협력을 받자니, 그들이 경제적으로 곤란해지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했던 것이다.
임야 착취에 친일파 참여시킨 일제
일제는 주요 친일파들이 재테크에 대해 새로운 안목을 갖게 만들었다. 이들을 위해 특강도 열어줬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 10월 20일에 훗날 한국외환은행(하나은행)이 들어설 조선귀족회관에서도 그런 강좌가 열렸다.
강사는 바다 건너온 사람이었다. 그달 23일 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2면 중간은 그를 혼다 박사로 부른다. 일본 박사인 혼다의 강의를 듣기 위해 이완용 백작 등을 비롯한 저명인사들이 이곳을 찾았다. 기사는 “이완용 백(伯), 박제순 자(子), 조중응 자, 조진태 씨, 윤덕영 자, 조동윤 남(男), 한창수 남, 권중현 남” 등과 일제 식민당국 관계자들을 거명했다.
귀족이 아닌 조진태(1853~1933)의 이름이 백작 이완용보다는 뒤에 있지만, 남작 조동윤보다는 앞에 있다. 또 자작들의 맨 끝이 아닌 자작 조중응과 자작 윤덕영의 중간에 있다. 친일세력 내에서 조진태의 위상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조진태는 재테크 강의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 해에 62세인 그는 42세 때 공직을 그만두고 20년간 경영과 재테크의 노하우를 축적했다. 그래서 이 시점에는 상당한 경제력과 지식을 갖고 있었다.
혼다는 조진태처럼 부담스러운 수강생을 앞에 둔 상태에서 “국가의 명예를 대표할 귀족의 체면을 유지함에난 차(此)에 상당한 재산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현 상황에서는 국채 등의 채권 투자가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일러줬다. 유럽에서 벌어지는 전쟁으로 인해 채권 수익이 좋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추천한 것이 “영구(永久)의 세습재산”이다. 영구불변인 산에 대해 투자하라고 권했던 것이다.
혼다는 조선처럼 산이 많은 곳에서는 임업 투자가 제격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광업은 위험하고 공업·상업·수산업은 경쟁자가 많아 귀족의 포트폴리오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일러줬다.
일제의 식민지 수탈을 지탱한 양대 축은 토지조사사업과 임야조사사업이다. 혼다의 말에서도 나타나듯이 일제는 한국이 산악지대임을 감안해 농지 수탈뿐 아니라 임야 수탈에도 주목했다.
그러나 이를 단독으로 벌이기는 힘들었다. 임업과 연관된 한국인들의 저항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친일파를 비롯한 소수의 한국인들에게 참여의 길을 열어줬다. 이들을 동맹자로 만들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일제의 농지 지배뿐 아니라 산림 지배에도 친일파들의 협력이 나타나게 됐다.
토지조사사업은 1910년에 개시됐다. 임야조사사업은 토지조사가 완료되기 전년도인 1917년에 시작됐다. 일본이 강점 이전부터 준비했던 한국 임야 착취가 이때부터 본격화된 것이다.
‘친일’ 발판 삼아 거상이 된 조진태
혼다는 귀족에게는 공업과 상업을 추천하지 않는다고 강의했지만, 조진태는 이미 그 분야에 몸을 담고 있었다. 철종 임금 때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나 22세 때인 1875년에 무과에 급제하고 1892년에 종3품 사령관인 오위장(五衛將)에도 오른 그는 “1894년 9월 순무영 대솔(帶率)군관으로 동학농민군 진압에 참가”(<친일인명사전> 제3권)했다. 42세가 된 이듬해에 관직을 그만둔 그는 혼다가 추천하지 않는다는 분야에서 이력을 쌓기 시작했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17권 조진태 편에 정리된 프로필을 보면 을사늑약 이후인 1906년에 경기도 풍덕군수가 되는 등의 일이 있기는 했지만, 41세 이후의 조진태는 기업 경영 분야에서 주로 활동했다.
관직을 떠난 그해에 군부피복회사를 설립하고 1899년에 대한천일은행(훗날의 우리은행) 설립에 참여한 그는 한성공동창고회사 사장, 한성수형조합장, 한성농공은행 창립위원, 선린상업학교 평의원, 대한권농주식회사 상담역, 동양화재보험주식회사 발기인, 한성재목시탄주식회사 창립위원, 한성은행 감사역 등등을 거치며 재계에서 입지를 구축했다.
그의 입지 구축은 상당부분은 일본의 영향력에 힘입었다. 일제의 한국 침략에 편승한 것이 그의 경영 활동에 영향을 미쳤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친일인명사전> 조진태 편은 대한제국 멸망 2년 전인 1908년 상황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8월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위원을 거쳐 12월부터 1925년 5월까지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로 활동했다”고 기술한다.
그는 가장 대표적인 식민지 수탈 기구의 설립에 관여하고 17년간이나 임원을 지냈다. 1930년대까지 이어지는 그의 경영 활동의 원동력이 어디에 있었는지가 여기서 드러난다.
조진태는 1914년·1916년·1918년·1920년에 관선 지방의원 겸 자문위원인 경성부 부협의회원이 되고, 1927년부터 1933년까지 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의 참의로 재직했다. 요즘 말로 바꾸면, 서울시 의원 4선에 국회의원 재선을 한 셈이다. 중추원 참의를 할 때의 연봉은 1500원이다.
1922년 9월 26일에 경성일보사 직공 강대희가 서울 장충단공원 연못가에서 독약을 먹고 쓰러진 것은 월급 인상을 부탁했다가 해고를 당했기 때문이다. 그달 28일자 <동아일보> 3면 좌중단에 따르면, 그의 월급은 17원이었다. 조진태의 중추원 참의 연봉을 월급으로 환산하면 125원이다. 땅에 쓰러진 강대희는 산책 중인 시민의 신고로 응급 치료를 받고 회복됐다.
조진태는 일제하에서 각종 기업의 사장이나 이사를 지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 창설 멤버이자 감사인 것이 그의 사회 활동을 뒷받침했으므로 각종 기업 활동에서 발생한 수익 역시 엄밀히 말하면 친일재산이다. 그가 받은 ‘친일 월급’은 125원 이상이었던 것이다.
동척 감사 외에, 조진태의 경영 활동이 일제 침략에 편승했음을 보여주는 직책은 조선식산은행 설립위원, 조선총독부 산업조사위원, 대정친목회 부회장 등에 더해 ‘조선산림회 이사’다. 조선산림회를 통한 일제의 임업자원 수탈에도 관여했던 셈이다.
혼다는 친일 귀족들의 안정적인 재테크를 돕는다며 임업 투자를 권했지만, 이 권유에는 친일세력을 산림지주로 변모시켜 임업 자원에 대한 총독부의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의도도 담겨 있었다. 2016년에 <한국민족문화> 제58호에 실린 강정원·최원규 부산대 교수의 논문 ‘일제의 임야대부 정책과 그 성격 – 1910년, 1920년대 대부 실태와 경영을 중심으로’는 “일제는 대부정책을 통해 산림지주를 육성하고 대민 지배를 강화”했다고 설명한다.
그런 뒤 “자본가들은 전국을 대상으로 대규모 산림을 대부받아 지주로 성장하였다”라며 “산림지주는 지역민들과 원활한 협력관계를 구축한다는 명분 아래 지역민을 대상으로 보호조합을 조직하거나 산림 이용을 매개로 지역민을 통제하였다”고 설명한다.
조진태가 조선산림회에 간여한 것은 농지뿐 아니라 임야를 통해서도 한국 민중을 지배하는 일제의 착취 시스템에 그가 가담했음을 보여준다. 친일파인 그의 재산은 이 같은 착취에 편승한 결과물이었다.
일제는 조진태의 삶에 박수를 쳐줬다. 1912년에 한국병합기념장을 수여하고, 1924년·1928년·1929년에 서보장이라는 훈장을 달아줬다.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은 80세 때인 1933년 12월 17일이다.
김종성 기자
<2024-04-28>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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