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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지원병 형님들이…” 한국 어린이들을 이용한 친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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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이원수

▲ 아동문학가 이원수의 생전 모습(창원 ‘고향의 봄 도서관’에 있는 사진 촬영). ⓒ 윤성효

아동문학가 이원수(1911~1981)가 어린이들에게 끼친 영향은 상당하다. 그 아이들이 이제는 아버지가 되고 할아버지가 돼 있으니, 한국인 전체에게 미친 영향이 지대하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로 시작하는 동요 ‘고향의 봄’ 하나로도 파급력은 충분히 설명된다.

대한민국 사회는 그를 거듭거듭 표창했다. 1970년에는 서울교육대학과 노래동산회가 제8회 ‘고마우신 선생님’상을, 1973년에는 한국문인협회가 제10회 한국문학상을 수여했다. 1974년에는 문화공보부(지금의 문화체육관광부)가 제6회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수상자로, 1978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이 제23회 대한민국예술원상 수상자로, 1980년에는 문예진흥원이 흙의문학상·반공문학상·아동문학상을 통합한 대한민국문화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67세 된 이원수가 예술원상을 받은 1978년은 박정희 종신집권체제인 유신체제의 말기였다. 국민들의 저항을 헌법과 일반 공권력으로 막아내기 힘들어 긴급조치라는 탈헌법적 수단으로 겨우겨우 막아내던 때였다.

그런 시절에, 문화공보부 지원을 받는 대한민국예술원이 동시집 <종달새> <빨간열매>와 동화집 <파란구슬> <호수 속의 오두막집> 등을 저술한 이원수에게 대한민국예술원상을 수여했다. 그에게 상을 준 이유가 그해 9월 20일 자 <매일경제>에 설명됐다.

“26년부터 오늘까지 아동문학에 헌신하며 동시집 <종달새>를 비롯, 수많은 동시·동화집을 펴내 아동의 감정과 정서를 순화시키는 데 기여하고 아동문학을 발전시킨 공로가 인정됐다.”

아동의 감정과 정서를 순화시키는 그의 문학 활동은 서른네 살 이전에도 왕성했다. 1945년 이전에 주로 했던 일은 ‘식민지 아동 순화’였다.

국권침탈 이듬해인 1911년 11월 17일 경남 양산에서 태어난 이원수는 서당을 거쳐 마산공립보통학교(훗날의 성호초등학교) 2학년에 편입해 1928년 졸업했다. 문단에 데뷔한 것은 마산공립상업학교(훗날의 마산상고·마산용마고)에 재학할 때였다. 1931년에 이 학교를 졸업한 다음, 함안금융조합에 들어갔다가 1935년에 그만두고 약방 서기를 지낸 뒤 1937년에 복귀했다.

금융조합을 그만두고 약국에 들어간 것은 지금의 국가보안법 사건인 치안유지법 사건으로 체포됐기 때문이다. 1935년에 발각된 이 항일사건으로 10개월 감옥에 있다가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그런 다음 복직했다.

복직한 그해는 일본이 중일전쟁을 도발해 일제의 아시아 침략이 절정으로 치닫기 시작한 시점이다. 이 시기부터 일본은 이광수·홍난파 같은 항일 운동가들을 친일파로 전향시켜 동맹자 그룹으로 만들었다.

그처럼 항일 운동가들이 친일 우파로 전향하는 일제강점기판 뉴라이트 현상으로 인해 친일파 세대교체가 일어나는 출발점이 1937년이다. 이때 이원수도 뉴라이트 대열에 가담했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이원수 편은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킨 1937년을 기점으로 체제에 협력하기 시작했다”고 기술한다.

반발심 누그러트리고자 동심 활용

그의 친일은 식민지 아동의 감정과 정서에 영향을 주는 것이었다. <친일인명사전>에 인용된 1942년 8월의 ‘낙하산 – 방공비행대회에서’는 일제의 전쟁 동원에 대한 어린이들의 저항감을 순화시키는 동시다. 이런 내용이 들어 있다.

“푸른 하늘 나는 비행기에서 / 뛰어나와 떨어지는 사람을 보고 / 앗차 하고 놀라면 꽃송이처럼 / 활짝 피어 훨-훨 하얀 낙하산 / 오오 하늘공중으로 사람이 가네 / 새들아 보아라 / 해도 보아라 / 우리나라 용감한 낙하산 병정 / 푸른 하늘 날아서 살풋 내리는 / 낙하산 병정은 용감도 하다 / 낙하산 병정은 참말 좋구나.”

훗날 백범 김구에게 경교장을 숙소로 내주고 이승만 정권하에서 세무조사를 받게 되는 인물이 친일 재벌 최창학이다. 1937년 7월 16일, 그가 서울 용산 조선군사령부를 찾아가 비행기 한 대를 헌납하겠다고 신고했다. 이 때문에 “군부 당국에서는 최씨의 지성에 감격하고 잇다 한다”라고 이틀 뒤의 <조선일보>에 적혔다.

이런 분위기에서 나타나듯이 일제 당국은 한국인들의 비행기 구입비 헌납에 대해 호들갑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최창학 같은 갑부가 아닌 일반 한국인들은 단체로라도 돈을 모아 비행기 값을 기부해주기를 일제는 희망했다.

그 같은 상황에서 이원수는 일본 전투기와 비행사에 대한 동경심을 아이들에게 확산시켰다. “우리나라 용감한 낙하산 병정”, “낙하산 병정은 참말 좋구나”라는 구절을 삽입했다. 일본군과 일본 전투기에 대한 거부감을 없앨 목적으로 코흘리개들을 이용했던 것이다.

목표물을 직접 공략하지 않고 아동을 건드리는 이원수의 접근법은 지원병 명목으로 전개된 강제징병 문제에서도 나타난다. 31세 때인 1942년에 발표한 ‘지원병을 보내며’라는 동시에 이런 내용이 있다.

“지원병 형님들이 떠나는 날은 / 거리마다 국기가 펄럭이고 (중략) 반-자이 소리는 하늘에 찼네 / 나라를 위하여 목숨 내놓고 / 전장으로 가시려는 형님들이여 / 부디부디 큰 공을 세워주시오.”

형식적인 만세 소리 속에서 강제징병 되는 청년들을 보면서 식민지 아동들이 자랑스러워한다는 내용을 담은 31세 어른의 시다. 일제 징병에 대한 반발심을 누그러뜨리고자 동심을 활용했던 것이다.

좌우익 넘나들며 활동

▲ 창원 고향의봄도서관 내 이원수문학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원수 흉상. ⓒ 윤성효

그가 동심만 건드린 것은 아니다. 1943년에 지은 ‘보리밭에서- 젊은 농부의 노래’는 동시가 아니다. 이 시에서는 전시체제 하의 빈농들이 나라에 감사한 마음을 품도록 유도하는 구절들이 눈에 띈다.

“가뭄 속에 헛되이 말라지고 / 주림의 괴롬만 맛보게 된 원수의 해 / 한해극복의 이 정성도 커다란 힘이려니 / 성전(聖戰)의 내 나라에 목숨 비록 못 바쳤어도 / 우리 힘 나라를 배불리 못할 거냐.”

당장 굶주림에 허덕이는 빈농들이다. 그런 빈농들이 ‘우리 힘으로 우리나라를 배불리 못하겠느냐”라며 나라 걱정을 한다는 시다.

이원수는 1937년부터 8년간 일제에 협력했다. 금융조합 월급만큼은 아니겠지만, 친일 글쓰기를 통해 어느 정도의 친일 재산을 얻었으리라 볼 수 있다. ‘식민지 아동의 감정과 정서를 순화’시켜 주고 벌어들인 민망한 친일 재산이었다고 볼 수 있다.

<친일인명사전>은 1945년 해방 직후의 이원수가 “좌우익을 넘나들며 활동했다”고 말한다. 해방 직후의 좌파는 항일진영과 거의 일치한다. 이원수가 친일 이력에 구애되지 않고 항일 문인들과도 잘 어울렸던 것이다. 그러다가 좌파의 친일청산 시도가 무산된 1949년에 좌파와 절연하고 우파 활동에 전념하게 됐다.

그런 뒤 1970년 이후로 상복이 터졌다. 고마우신 선생님상, 한국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대한민국문화상을 수상했다. 그러면서 대표적인 아동문학가 이미지를 굳혀 나갔다. <친일인명사전>은 이원수 편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1979년 11월 구강암이 발병하여 1981년 1월 24일 사망했다. 1984년 서울 어린이대공원에 문학비가 건립되었다.”

김종성 기자

<2024-05-05>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지원병 형님들이…” 한국 어린이들을 이용한 친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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