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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생존력의 극치를 보여준 친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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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김갑수

한국 친일파들의 정치적 생존력은 경이적이다. 그들이 섬기던 일본제국이 패망했는데도 거의 아무런 피해를 보지 않았다. 해방 직후에 그들을 겨냥한 민중항쟁이 대구와 제주와 여수·순천에서 일어났는데도 별 타격을 받지 않았다.

그들을 비호하고 계승하는 세력은 4·19와 부마항쟁(부산·마산)과 6월항쟁과 촛불혁명에도 살아남았다. 해방 80주년을 1년 앞둔 지금까지도 친일 청산이 지지부진한 원인 중 하나는 이들의 생존력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런 생존력을 온몸으로 보여준 인물이 있다. 지금의 한국인들에게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알고 보면 꽤 경이적인 인물이다. 이승만 집권기인 1953년부터 1960년까지 대법관을 지내고 4·19 직후에 대법원장 직무대리를 겸했던 김갑수(金甲洙)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김갑수는 지금의 헌법재판관인 헌법위원직도 이승만 집권기와 박정희 집권기에 각각 역임했다. 또 독립운동가이자 진보 정치인인 조봉암에 대한 사형선고를 확정한 주심 대법관이었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에 비해 한국 현대사에 남긴 족적이 꽤 큰 인물이다.

일제와 미군정에 이어 이승만 정권과도 제휴

김갑수는 일제 강점 2년 뒤인 1912년 3월 7일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다. 1935년 3월에 경성제국대학 법과를 졸업한 그는 그해 8월 공주지방법원 판임관견습이 되고 11월에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다. 이듬해 5월에는 사법관시보가 됐고, 대구지방법원에서 검사국 검사대리로 부역했다. 법원과 검찰이 분리되지 않은 시절이라 ‘법원 검사국 검사대리’라는 직책이 가능했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 김갑수 편은 “사법관시보를 마친 후 1937년 12월 평양지방법원 예비판사(고등관 7등)에 임명”됐다고 한 뒤, 1938년에 평양지방법원 판사가 되고 1941년에 평양복심법원 판사까지 겸했다고 설명한다.

▲ 1973년 12월 17일 자 <경향신문> 기사 “내가 겪은 이십세기 – 백발의 증인, 원로와의 대화”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그는 61세 때인 1973년에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는 인터뷰를 <경향신문>과 했다. 이 인터뷰에서 그는 조선총독부 판사로 근무하던 시절에 별일이 없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해 12월 17일 자 <경향신문> 4면에 얼굴 사진과 함께 대문짝만하게 실린 이 인터뷰 기사는 “해방이 되던 45년까지 7년 반 동안 판사로서 단조로운 사건만을 다루어왔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일본인들은 한국인 법관에게 큰 사건은 맡기지 않고 고작 민·형사 단독이나 배석 자리만을 주었”다고 강조했다. 한국인이라서 일본인 법관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던 처지를 설명하는 의미도 담기고, 자신은 굵직한 독립운동 사건을 맡은 일이 없음을 어필하는 의미도 담긴 발언이다.

“단조로운 사건”을 다뤘든 비중 있는 사건을 다뤘든, 일제 통치 시스템의 최상부에서 한국인들을 사법적으로 지배하는 위치에 있었다. 거기다가 1935년부터 9년간 조선총독부의 녹봉으로 친일재산을 모았다. 그의 이름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는 것은 불가피했다.

평양지방법원 및 평양복심법원 판사 시절인 1945년, 김갑수는 서른세 살 나이로 해방을 맞이했다. 섬기던 주인이 패망하는 이 위급한 상황에 대한 그의 대응은 꽤 신속했다. 위 <경향신문> 인터뷰 기사는 “해방과 함께 이북에는 소련군이 진주, 법원을 해산해버려 김씨는 38선을 넘었다”고 기술한다.

남하한 김갑수는 곧바로 직장을 구했다. 그해 11월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로 취직했다가 1946년 9월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을 했다. 그달부터 그는 새로운 나라를 주인으로 받들었다. <친일인명사전>은 “미군정청 사법부 조사국장에 임명”됐다고 기술한다.

일반적인 친일파들이 그러했듯이, 그 역시 일본제국과 미군정에 이어 이승만 정권과도 제휴한다. 1945년에 출범한 이승만 정권하에서 법전편찬위원, 법무부 법무국장 겸 대검찰청 검사, 법무부 차관, 내무부 차관에 이어 대법관을 지낸다. 그러다가 1960년 4·19혁명을 맞이한다.

조봉암 탄압 사법적 합리화에 관여

윤석열 정권이 검사 출신들을 중용하는 것과 달리, 이승만 정권은 판사 출신들을 중용했다. 1971년 8월 14일 자 <조선일보> ‘전관(轉官)’은 이승만 정권하에서 ‘인재는 법원에서’라는 말이 유행했다면서, 대법관 백한성이 “경무대의 호출 전화를 받고 이 대통령에게 불려가 그날로 내무부 장관 감투를 얻어 들고 얼떨떨했다”는 에피소드를 전한다.

전직 판사이자 검사인 김갑수는 위 에피소드 4년 전인 1949년에 ‘내무부 차관 감투’를 썼다. 경무대가 김갑수 역시 ‘인재’로 봤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 뒤 대법관으로 옮겨간 김갑수는 47세 되던 해에 이승만 정권에 큰 공로를 세운다. 1959년 2월 27일 이승만의 정적인 조봉암에게 사형을 선고한 주임 대법관 2명 중 하나가 바로 그였다. 조봉암에게 간첩죄 및 국가보안법 위반죄 등을 적용해 이승만 정권의 조봉암 탄압을 사법적으로 합리화시키는 데 관여했던 것이다.

위 <경향신문> 인터뷰에도 언급됐듯이, 대법원 재판부 내에서 합의된 형량은 무기징역이었는데도 경무대의 지시에 의해 사형으로 바뀌었다는 의혹이 당시에 존재했다. 의혹이 사실이라면 김갑수를 비롯한 대법관들은 법관의 자질이 없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 지시가 없었다 해도 마찬가지다. 2011년 대법원 재심 판결로도 밝혀졌듯이 조봉암은 간첩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을 간첩으로 몰아세웠다면, 김갑수 등이 법률과 양심에 따라 재판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된다.

김갑수는 3심 선고 5개월 뒤인 1959년 7월 30일에는 조봉암의 재심 청구를 기각했다. 그로부터 17시간 뒤에 전격적으로 사형이 집행됐다. 김갑수가 깊숙이 관여한 정치 재판이 이처럼 비상식적인 사형집행으로 결말을 맺었으니, 그와 이승만 정권의 관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전직 판사이자 검사인 사람이 내무부 차관에 임명된 것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이승만이 쫓겨난 뒤 김갑수도 법원을 나왔다. 위 <조선일보> 기사는 그가 “대학 교수들이 ‘대법관들도 물러가라’고 해서” 대법원을 나왔다고 전한다.

이처럼 그는 자신이 4·19의 성토 대상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4·19 직후에 공직에 재차 도전한다. <친일인명사전>은 “1960년 7월 실시된 제5대 민의원 선거에 경기도 안성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됐다고 말한다. 4·19혁명으로 갈 곳이 없어진 상황에서 고향 안성을 찾아가 국회의원으로 변신했던 것이다.

이익 향해 맹렬히 달려가는 친일파의 모습

그는 제3공화국에서는 집권당 당료로 되살아났다. 52세 때인 1963년에 민주공화당 서울시 부위원장이 되고 1966년에 공화당 서울시 마포구 위원장이 되고 1967년에 당 중앙위원이 됐다. 1971년에는 당 인권옹호위원장이 됐다. 4·19 직전에 헌법위원회 위원이 된 적이 있는 그는 유신체제 하인 1973년에도 61세 나이로 헌법위원이 됐다.

일본제국과 미군정에 이어 대한민국 역대 정부의 고위 공직에 진출한 김갑수는 나이 70을 앞둔 시점에는 전두환 정권과도 간접적으로 인연을 맺었다. 이 인연은 ‘요상한’ 방식으로 맺어졌다.

▲ 1991년 5월 21일 자 <경향신문> 기사 “5공 막후(18) – 신군부 야권분할 4개각본”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전두환의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창당 주역 중 하나가 권정달이다. 그의 증언을 기초로 한 1991년 5월 21일 자 <경향신문> ‘5공 막후 (18) 신군부 야권 분할 4개 각본’에도 보도됐듯이, 전두환 정권은 ‘건전 야당’뿐 아니라 ‘건전 혁신야당’까지 만들어 구색을 갖추고자 했다.

1991년 6월 8일 자 <경향신문>의 ‘5공 막후 (23)’에 따르면, 전두환 정권은 4·19 당시의 혁신계 정치인인 민주사회당의 고정훈이 서울 강남구에서 당선되도록 하기 위해 강남구를 정책지구로 지정했다. 요즘 말로 하면, 여당이 야당 후보를 지원하고자 전략지역을 지정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유력한 관제 야당인 민한당과 국민당은 강남구에 후보를 내지 않았다.

김갑수는 바로 그 고정훈과 합세해 제5공화국하에서 ‘건전 혁신야당’ 건설을 추진했다. 1981년 1월에 신정당을 만들어 이 당을 관제야당 후보군에 넣은 김갑수는 국회의원이 된 고정훈과 합세해 1982년 3월 25일 신정사회당을 만들었다. 고정훈이 총재가 되고 김갑수가 의장이 되는 당이었다. 의석 3석을 보유한 원내 제4당이었다.

전날인 24일, 민주사회당과의 합당을 위한 신정당 임시전당대회가 열렸다. 25일 자 <조선일보> ‘신정당, 합당 결의에 우여곡절’에 따르면, 일부 대의원들은 김갑수에게 “대법원 판사 재직 시 조봉암에게 사형선고를 한 김 총재가 사회주의 정당과 합당한다니 말이 안 된다”며 이의를 제기했다. 신정사회당 창당이 신군부의 관제 혁신야당 구상에 부합한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 당원들의 반발로 볼 수 있다.

김갑수는 자신에게 녹봉을 주던 일본제국이 패망한 뒤에도 공직을 이어갔을 뿐 아니라 자신이 4·19 시위대의 성토 대상인 줄 알면서도 그 직후에 국회의원에 출마해 당선됐다.

거기다가 조봉암 사형선고의 주역이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에 개의치 않고 전두환 정권의 관제 혁신야당 구상에 부합하는 정치 행보를 걸었다. 불리한 과거에 개의치 않고, 그것을 반성도 하지 않고, 이익을 향해 맹렬히 달려가는 한국 친일파의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김종성 기자

<2024-05-12>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생존력의 극치를 보여준 친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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