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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쇠사슬 끊으려는 프로메테우스, 우상을 파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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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리영희] 리영희와 으악새 모임의 기억

리영희는 사회과학, 좁게는 언론과 국제정치 분야, 넓게는 인문사회과학을 식민사회과학에서 민족주체적 관점으로 방향 전환한 지성이었다. ‘식민사관’이란 역사학에만 국한하기 쉽지만 따지고 보면 모든 분야에서 비겁하게 식민의 눈으로 보기에 익숙해졌음을 부인할 수 있을까. 한국 정치학을 심하게 비하하여 식민정치학 혹은 구호물자 정치학이라 부르면 분노하겠지만 미국과 일본이 쳐놓은 반소련 반중국의 방역망 안에서 분단 고착과 반북 정서를 기조로 삼아왔음을 부인할 수 있을까? 이 방역망을 처음으로 넘어선 용자가 리영희 아니었던가.

분단 시대 민족지성사에서 이런 우상파괴의 선두에 섰던 두 갈리아의 수탉은 함석헌-리영희였다. 둘 다 평안북도 출신의 호랑이적인 지성의 포효 기질인데, 리영희보다 28년이나 먼저 태어난 함석헌은 냉전체제 아래서 외롭게 분단 시대가 조작해 낸 허깨비들을 짓부수고자 ‘생각하는 백성론’을 거론했다.

그는 이미 1971년에 민족사의 가장 화급한 과제로 “남북이 불가침조약을 맺는 일이다.”라고 밝히며, 불가침이란 곧 평화로운 삶인데 이를 가로막는 건 “정치업자 전쟁업자들의 집단”(<평화운동을 일으키자>)이 만든 남북 적대시라고 폭로했다. 그는 “외세가 아무리 남북에 싸우라고 부추겨도 우리가 스스로 안 싸우겠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함석헌은 환상주의자일까? 그렇지 않음을 사회과학적으로 입증해 준 지성인이 리영희이다. 함석헌의 포효가 분단한국사에서 1950~60년대까지 강력하게 울렸다면 1970~90년대의 지성은 단연 리영희였다.

운 좋게 나는 평안도 출신의 이 두 호랑이를 가까이에서 사숙할 수 있었다.

유신 치하의 ‘으악새 모임

리영희의 필화와 투옥을 비롯한 가시밭길 생애는 널리 알려져 있기에 구태여 반복할 필요는 없겠고, 다만 나와 직접 연관된 항목만 간략히 훑어보기로 하자. 내가 그의 이름을 처음 본 것은 월간 <정경연구>였던 것 같다. 박정희의 총애를 받던 학자이자 정치인으로 차세대 지도자로 거론되기도 했던 엄민영의 정경연구소(1976년 문화방송-경향신문이 잡지와 함께 인수)에서 1965년에 탄생한 이 월간지의 편집책임자는 안인학으로 그 아이디어가 잡지계에 신화처럼 떠돌기도 했다. 당대 가장 진보적이었던 사회과학 논문을 게재하여 소수정예 독자층만 가졌던 이 잡지에 리영희의 글이 언제 처음 실렸던가는 기억에 없으나 그 글은 리영희를 부각시켰다. 뒤이어 <창작과비평>에도 리영희의 글이 실리면서 그는 대중성을 확보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두 잡지에 멋진 필자 리영희를 소개한 이는 김정남이었다. 1964년 겨울, 6·3사태 배후 조종자로 서대문구치소에 독방에 수감당했을 때 같은 사동의 리영희와 첫 대면 후 계속 관계를 갖다가 서울대 출신인 안인학에게 소개한 것으로 보인다.

내가 리 선생을 처음 뵙게 된 건 <조선일보> 해직(1969) 후였으나 이미 명문을 읽은 뒤였다. 정계의 마당발 김상현이 주축이 되어 월간 <다리>지를 창간한 게 1970년인데, 그 이듬해에 나는 <경향신문>을 그만두고 그 잡지사로 옮겨 첫 특집(1971.9)으로 중국 문제를 다뤘다. 당연히 특집 머리꼭지를 리영희에게 청탁, ‘중공 연구: 그 초보적 시도’를 실었는데 반응이 가히 폭발적이었다. 이를 계기로 자연스럽게 박현채, 장을병을 비롯한 반골 지식인들이 <다리> 사무실을 자주 들락거렸다. 아슬아슬한 사건을 넘기면서 리영희는 <합동통신>에서도 해직당한 뒤 한양대 교수로 전직했으나, 작가 김승옥의 외삼촌인 윤현 목사가 주도했던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의 한국지부 창립에 참여하는 등 깊숙하게 민주화운동과 우상파괴 이론의 정립에 앞장섰다.

▲<다리>지, 특집(1971.9) 리영희 선생의 ‘중공연구-그 초보적 시도’ 본문. 합동통신 조사부장으로 직함이 표기됐다. 필자 제공.

유신독재 선포 뒤 김상현 의원은 연행 투옥당했고, 나 역시 1974년 문인간첩단 조작사건으로 감방에 갇혔으나 다행히 1심에서 풀려났는데, 바로 리영희의 유명한 <전환시대의 논리>(초판 1974.6.5)가 나온 직후(6.28)로, 리 선생은 이호철과 내가 틀림없이 석방될 거라며 그날 저녁에 출판기념을 하도록 준비해 둔 상태였다. 그러나 예상이 빗나가 나는 석방됐으나 이호철은 이보다 넉 달 뒤에야 석방되었다.

그러던 중 고대했던 김상현 의원이 석방되는 날(12.9)에 맞춰 출옥환영회 겸 송년 모임을 준비하여 모인 인사들이 거나하게 들뜬 분위기에서 이 답답한 시절을 조금이라도 신나고 즐겁게 지내자면서 즉흥적으로 만든 친목모임이 ‘으악새’였다. 모임 주제가는 <으악새>였고, 그 강령은 기지 넘치는 한승헌 변호사가 즉석에서 끄적거렸는데 가히 명문이다.

오늘 우리는 ‘체’에서 벗어나기로 한다.

허울 좋은 도덕의 멍에 때문에, 처세와 체면 때문에 ‘나’를 속박해 온 ‘체’를 벗어던지기로 한다. 자신을 학대해 온 1년을 묻어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발산하기로 한다. 생각하면 얼마나 거짓 생활에 이끌려 다녔던가. 우리의 고뇌와 피로를 알고 있는 것은 자신뿐이 아니던가. 화려한 위장보다는 처참하더라도 진실의 목소리를 우리는 그리워한다. 남을 속이는 기만보다는 자신을 속이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럽고도 불가한 것인가를 새삼 느낀다…

이에 우리는 겉으로 그럴듯하면서도 내심으로 외롭고 불행했던 자신을 위로하기 위하여, 나아가 그런 위로라도 없이는 이 해를 잊을 수 없는 비밀스러운 가슴을 마주 대하는 공동의 술상 앞에 나와 다음과 같은 행동강령을 전원의 뜻으로 선포한다.

1. 오늘 이 자리에서는 누구나 솔직해야 한다. 솔직할까 말까 망설이는 자는 천추의 한을 면치 못할 것이다.

1. 오늘 이 자리는 저질을 우대하는 자리다. 인간의 태어남이 곧 저질의 부산물인 고로 저질을 욕하는 자야말로, 태어남을 욕하는 자니라.

1. 오늘 우리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도록 한다. 어제와 오늘뿐 아니라 내일도 잊어버리라. 내일 내일 하지만 언제 내일이라는 것이 한 번이라도 있어 봤나. 기다렸던 내일이란 것도 당하고 보면 항상 오늘이었지 않은가.

1. 오늘 우리는 기분에 살고 기분에 죽기를 맹세한다. 사람에게서 기분을 빼놓으면 주민등록증밖에 남을 것이 없다. 괜히 호마이카질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감정발산에 일로매진하기를 다짐한다.

1. 만일 위와 같은 강령을 위반하는 자가 있거나 그로 인해서 이 자리의 무드에 금이 갈 염려가 있을 때에는 사회자가 본의 아닌 긴급조치를 취할 수 있다. 이 긴급조치를 위반하거나 비방하는 자는 아무런 벌도 받는 일이 없다.

▲테니스를 즐기는 ‘으악새’ 회원들. 왼쪽 뒤부터 시계방향으로 리영희, 한승헌, 장을병, 김상현. 리영희재단 제공.

글자 한 자 고치지 않고 만장일치로 통과한 ‘으악새 모임’은 이렇게 해서 리영희, 한승헌, 장을병, 이상두, 윤현, 김상현, 윤형두 제씨가 회원이었고, 나는 심부름을 맡은 막내로 참여했으며, 그 뒤 김중배, 한완상 제씨까지 가세하여 암담했던 유신통치 후반기에서일망정 맘 놓고 떠들고 노래하며 스트레스를 맘껏 풀었다.

이 중 김상현 의원은 노래, 춤, 외설 등 모든 잡기에서 엔터테이너라 남을 즐겁게 해주려는 사명감에 불탔고, 이에 질세라 리영희를 비롯한 한승헌, 장을병 제씨의 재담 역시 잊을 수 없다. 너무 나가면 품위가 손상될 것 같아 자제하지만 단언컨대, 이분들의 상당수가 고인이 된 터에 필시 저승에서도 이 비극적인 한반도에서 제일 통쾌했던 시간이 으악새 모임이었다고 그리워할 것이라 믿는다.

한길사 시기

그 칠흑 같았던 박정희 말기에 리영희는 가장 혹독한 필화로 징역살이(1977~1980)를 했고, 나 역시 1979년 10.26 직전에 남민전 사건으로 구속됐다. 전두환의 12.12도 모른 채 1980년을 서대문 구치소에서 간접 체험하고 있을 때 뜻밖의 이름(리영희)으로 사과가 한 보따리 들어왔다. 광주교도소에서 만기 출옥한 직후였다. 그러나 그는 이내 광주항쟁 배후 조종자로 지목돼 다시 투옥, 석방과 동시에 해직되는 등 이후 만년에 이르기까지 수난은 끊이지 않았다.

나는 서울구치소에서 1980년 9월 광주교도소를 거쳐 이듬해 대구교도소로 이감, 1983년 광복절 특사로 석방됐다. 그래서 1980년대 후반기에 리영희 교수와 나의 만남은 한길사를 매개로 무척 빈번해졌다. <동아일보> 해직언론인 김언호가 1976년에 세운 한길사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으로 유명한데, 전두환 치하에서 진보적인 학술 운동의 중심축으로 굳건히 자리 잡도록 응접실을 차려주었다.

특히 당시 최고 수준의 필진들이 참여했던 월간 <사회와 사상>(1988.9. 창간)은 1980년대 독서계의 지침이었는데, 그 편집위원은 강만길, 고은, 김진균, 리영희, 박현채에다 막내로 내가 끼어들었다. 기획위원은 김세균, 김형기, 이종석, 임영태였다. 이 창간호에 실린 리영희의 ‘남북한 전쟁능력 비교연구’가 큰 파문을 일으켰다.

보수세력이 언필칭 북한의 무장력을 과장 선전해서 언제 남침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조장해 독재와 한미동맹의 정당성으로 삼았던 시대였다. 미국은 무기 수출의 빌미로 북의 강력한 위협이 필요했고, 남은 독재체제의 유지로 그게 절실했기 때문에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관계가 돈독했다. 이게 새빨간 거짓말임을 밝혀준 리영희의 글은 충격이었다. 이 글을 정독한 독자들은 정치적인 상상력을 발동하여 왜 미국이 그토록 열심히 한국에 무기를 수출하는가를 한 발짝 더 나아가서 유추할 수 있어야 한다. 우선 미국은 계속 신무기를 제작하기 때문에 낡은 무기는 재고 처리해야 하며, 그들은 결코 최신예 무기는 팔지 않는다. 재고 처리와 국고 수입이 우선목표임은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한국군이 강력한 무장력을 갖추게 해서 언젠가 미국이 대 중러 전쟁을 전개할 때 한국군을 동원해야 하며, 거기 대비하고자 항상 새로운 무기로 무장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한미연합사와 작전권은 미국이 놓아주지 않는 것이다. 자주국방이란 이래서 어렵고 지난하며, 어렵기 때문에 더욱 우리에게 절실하다. 이런 모든 전략을 위해서 북한은 ‘강력한 무장력을 갖춘 끔찍한 적’으로 존재해야 했다.

따라서 북한이 아무리 평화를 외쳐도 그것은 거짓이며 더 강력한 무장력을 갖추기 위한 속임수라고 한미동맹은 입 모아 외쳐대며 여기에 일본은 장단을 맞추고 유럽 전체가 춤도 춰준다. 이것이 남북문제의 핵심이다. 남북이 아무리 우리 스스로 평화협정을 체결하려 해도 국제법을 들이대며 안 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아니 유럽과 미국과 일본이 언제 그렇게 법을 지켜서 남의 나라를 침략했던가!

▲한길사 주관 <우리시대 학문과 사상의 민족화 문제> 심포지엄. 1986년 8월 10일부터 2박3일 안동 병산서원에서 각계 진보학자 80여명 참가. 리영희는 가운데 줄 왼쪽에서 여섯 번째. 임헌영 선생은 리영희가 저녁식사 후 여흥시간에 국적이 불분명한 독창적인 춤을 신나게 추어 좌중의 박수를 받았다고 기억했다. 앞 줄 박석무, 이이화, 고은, 강만길, 김진균 등, 가운데 줄 박현채, 김낙중, 변형윤, 송건호, 김윤식, 등, 뒷줄 이효재, 임헌영, 조정래, 백낙청, 박호성, 한정숙, 김언호 등. 리영희재단 제공.

같은 해에 리영희는 <반핵, 핵 위기의 구조와 한반도>(1988)를 썼다. 이 글은 북핵 문제에 대한 탁견으로 오늘의 북미관계를 가장 정확하게 파헤쳐 주고 있다. ‘북방한계선은 합법적 군가분계선인가?'(1989)와 ‘대한민국은 한반도의 유일합법정부가 아니다'(<사회와 사상> 1989.12)는 남북분단이 얼마나 허구와 가식의 모래밭에 세워졌는가를 입증해 주면서, 남북 대결이 우리 민족 내부에서 서로의 증오심을 유발하고자 짜인 각본임을 느끼게 한다.

아무리 리영희가 포효해도 미국은 꿈쩍도 않고 그대로 지구의 헌병 완장을 차고 있다. 그것을 버릴 생각은 전혀 없을 정도가 아니라 더욱 간교해진다. 결국 우리 민족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그 주체가 역시 우리 자신임을 리영희는 깨닫고 제4단계의 연구로 방향을 바꾸는데, 그 시기는 대략 1990년대 전후부터였고, 주요 연구 대상은 통일문제였다. 한반도야말로 동아시아 평화 구축의 중심인데, 중일의 대결도 결국은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다. 이래서 그는 <반세기의 신화: 휴전선 남북에는 천사도 악마도 없다>(1999)를 냈다. 여기서 그는 미 제국주의의 본질과 정곡을 찌른 대담을 한다(서점 ‘그날이 오면’의 발행물 <그날에서 책읽기>의 발행인 김동윤, 편집자문위원 이수강과의 대담 p384~408). 이미 미국은 가면을 쓰던 때에서 21세기는 그것을 벗어던지고 야차가 되었고, 그 야차는 천사처럼 행동한다. 그래서 리영희는 21세기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개혁의 시대라고 진단 내린다. 한반도의 북과 남은 둘 다 양쪽 날개를 필요로 하는 존재로 어느 한쪽을 떼어내면 다른 한쪽도 추락하고 만다는 것이 리영희의 생각이다.

한길사는 편집회의 후 긴 회식을 비롯해 수시로 모임을 소집해 점심과 저녁 자리를 펴서 모두의 사생활부터 동정을 털어놓게 방석을 깔아준 데다 명산이나 사찰에서 심포지엄까지 개최하기도 하여 으악새 모임과는 또 다른 오락의 기회도 넉넉히 제공해 주었다. 아마 리영희의 지적 활동 중 가장 뜨거웠던 게 이 시기였을 것이며, 이때 내가 꼽사리 낀 것은 행운이었다.

이 불굴의 사나이에게는 휴식이 없었기에 영원히 쇠사슬을 끊으려는 프로메테우스처럼 몸부림쳤다. 그는 역사의 뒤를 따라다니는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아니라 새 시대의 여명을 알려주는 갈리아의 수탉이었다.

▲1986년 한길사에서 주최한 ‘삼별초’ 역사기행 중 완도 해변에서 물수제비를 날리고 있는 리영희. 뒤에 서 있는 김언호. 리영희재단 제공.

<대화> 전후의 만년

이 불굴의 프로메테우스에게 영혼의 강제 휴식을 준 것은 뇌출혈(2000)이었다. 이후 그는 프로메테우스답게 건강을 회복, 한 시대를 조망하며 인생론에 대한 묵상으로 유유자적했다. 이때 최후의 결실이 바로 <대화: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2005)이었고, 영광스럽게도 내가 대담자로서 그 역할을 맡았다. 애초에 이 대화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에커만의 <괴테와의 대화>를 전범으로 삼았고 어느 정도는 그 목적을 달성했다. 이 격렬한 이론에도 책이 나온 뒤 단 한 건도 개인적인 불만을 표출한 인사가 없었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성숙한 대화였음을 입증해 준다.

진행할 때는 너무나 그분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한두 시간 이상의 대화는 무리였기에 나는 같은 동네인 산본에 살면서 여러 차례 시간을 쪼개서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를 다 풀어서 정리한 원고를 본 리 선생은 도저히 만족할 수가 없어서 거의 고쳐 썼다. 수정한 리 선생의 원고를 내가 읽고 보충한다면 책의 출간이 몇 년 더 늦어질 것 같아 전혀 손대지 않은 채 그대로 출간하기로 했고, 오히려 그랬기에 대인기를 끌 수 있었다. 그러니 <대화>는 리영희의 저작이라 해도 손색이 없고, 나는 다만 그의 모든 저작을 읽고 연도별로 회상하기 좋게 말문을 여는 정도로 만족했다. 리 선생과 나는 둘 다 내장 수술로 쓸개가 없어서 두 쓸개 빠진 인간의 대화라며 낄낄대기도 하는 등 폭소 장면도 빈번했다. 참으로 신통하게도 이 책 출간 후 리 선생의 건강은 확 좋아지셔서 여러 초청 강연과 방송에도 출연할 수 있었다. 아마 독자의 성원의 기가 감전되었을 것이다.

그는 인간적으로도 참 매력이 넘쳤다. 예를 들면 그는 매사에 치밀 정확한 완벽주의자여서 자동차 운전을 할 때면 정지와 출발을 언제 했는지 모를 정도로 서서히 했다. 한번은 서울에서 내 차를 타고 산본으로 귀가하는데, 내가 브레이크를 밟자 운전을 비평하기를 오히려 내 아내의 운전이 더 안전하다고 노골적으로 털어놓았다. 그 뒤 리 선생이 동승할 때면 운전을 아내에게 맡겼고, 그는 이에 만족했다.

정작 내가 크게 한 수 배운 것은 이명박 집권 직후였다. DJ와 노무현이 축적한 민주화 제도와 남북 화해를 실용주의자인 이명박은 그대로 유지할 것이라는 낙관론이 진보적인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팽배할 때였다. 이 분위기, 아무개 아무개도 이렇게 말하더라고 하자 선생은 정색으로 나를 쳐다보며 “임형, 변증법을 공부했다는 사람이 그런 걸 믿어요? 존재의 본질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이명박은 돈밖에 모르기에 돈을 위해서라면 모든 걸 뒤집을 겁니다. 두고 보시오. 아마 온 국민이 고생깨나 할 겁니다. 절대 그에게 기대하지 마시오!”라고 단호히 잘랐다. 이 예언은 명중했다. 그 뒤를 이은 박근혜 역시 마찬가지였고, 지금의 윤석열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실로 나로서는 돈오돈수를 한 기분이었다. 아무리 책을 뒤져도 느낄 수 없는 한 수였다.

선생은 만년에 사모님의 금주령으로 술을 못 드셨는데, 서재의 책꽂이 뒤에다 몰래 숨겨두시고는 익살스럽게 “이건 마누라가 모를 거야.”라며 반 잔씩 즐기곤 할 때마다 우리는 마주 웃곤 했다.

아, 그립다. 아직도 쓸 사연이 많지만 일단 여기서 그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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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길사 창립 20주년에 리영희가 선물한 휘호. 리영희는 스스로 또는 문단의 친한 동료들이 말갈인이라 부르길 즐겼다. 한길사 제공.

임헌영 문학평론가

<2024-05-14> 프레시안

☞기사원문: 쇠사슬 끊으려는 프로메테우스, 우상을 파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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