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장직상
국회의원 5, 6선이 되면 국회의장 후보 물망에 오른다. 미 군정기에 수도경찰청장을 맡아 독립운동 및 좌파 진영을 진압한 장택상(1893~1969) 국무총리의 형인 장직상(1883~1959)도 일제강점기판 6선 의원이었다.
일제강점기 중추원은 지금의 국회와 똑같지는 않지만 총독부 자문기관이라는 점에서 의회와 비슷했다. 대한제국 멸망 1개월 뒤인 1910년 9월 30일 공포된 ‘조선총독부 중추원 관제’ 제1조는 중추원을 “조선총독의 자순(諮詢)에 응하난 바”라고 규정했다.
의원과 동의어인 중추원 의관(議官)의 숫자가 1910년에는 55명, 1921년에는 65명이었다. 의관의 명칭은 1910년에는 찬의와 부찬의로 나뉘었고 1921년에는 참의로 통합됐다. 전국의 유력자 중에서 이 정도 숫자가 선정됐으므로 지금의 국회의원보다 위상이 높았다고 볼 수 있다.
경북 칠곡 출신인 장직상은 1930·1933·1936·1939·1942·1945년에 중추원 관선 참의가 됐다. 1910년 대한제국 멸망 당시에 경북 신령군수였고 뒤이어 비안군수·하양군수·선산군수를 역임한 그는 중추원 참의가 되기 전 도의원 3선 경력을 쌓았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장직상 편은 “1922년 5월 경상북도 도평의회원 보궐선거에서 당선했다”고 한 뒤 “1927년 4월 민선 경상북도 도평의회원에 세 번째로 당선했다”고 설명한다.
군수 경력과 도의원 3선 경력에 중추원 6선 경력이 있었지만, ‘국회의장’은 될 수 없었다. 일본인으로 부활하지 않는 한 불가능했다. 중추원 관제 제3조는 “중추원 의장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으로 충(充)함이라”라고 규정했다. 정무총감이 당연직 의장이었기 때문에, 한국인에게 허용된 최고위직은 부의장이었다. 김윤식·이완용·박영효·박중양 등이 이 자리에 올랐다.
중추원 의장은 원천적으로 될 수 없었고 중추원 부의장은 되지 못했지만, 일제강점하에서 중추원 의관 6선 경력을 쌓았다.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그의 동생인 장택상만 주목하지만, 일제강점기에는 그의 위상이 동생을 훨씬 능가했던 것이다.
일본과 독립운동진영에 기부금 내 양쪽에 보험
경북관찰사를 지낸 경북 대부호 장승원의 아들인 장직상은 대한제국 시기인 1903년에 20세 나이로 경기전(慶基殿) 참봉이 됐다. 이성계 어진을 봉안한 이곳의 하급 관료였던 것이다. 이듬해 1월에 왕릉 사무를 관장하는 산릉도감의 하급직인 감조관(監造官)이 된 그는 일제 강점 직전인 1910년 6월에 경북 신령군수가 됐다.
1915년 6월 경북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이 되어 토지 수탈에 협력한 그는 상당히 통 큰 관료였다. 남의 회사에 근무하는 ‘재벌집 아들’을 연상시킬 때가 있었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15권 장직상 편에 따르면, 그는 총독부에 도로부지를 두 번이나 기부했다. 이 때문에 32세 때인 1915년 12월에 목배(木杯) 2개를 하사받았다.
그런데 목배를 받은 뒤부터 그의 집안은 쇠붙이의 위협을 받았다. 경북 지방에 기반을 둔 독립운동단체인 박상진의 대한광복회가 그의 아버지 장승원을 처단 대상으로 선정했기 때문이다.
1993년에 <친일파 99인> 제2권에 실린 김도형 국민대 강사의 기고문 ‘장직상: 경북지방 최고의 친일 부호’는 대한광복회와 관련해 “이들은 박상진과 상의하여 1916년 6월 이시영으로부터 권총 2정과 약간의 탄환을 받아 칠곡 부호인 장승원을 제거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라며 이렇게 기술한다.
“이후 총사령 박상진은 장승원이 광복회의 군자금 지원(요청)을 거절하였을 뿐 아니라 그 내막을 일제의 관헌에게 밀고하려 하자 1917년 8월 유창순에게 그를 처단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유창순·채기중·강순필은 장승원의 집으로 가, 유창순은 망을 보고 채기중과 강순필은 각각 소지한 권총으로 장승원을 살해한 것이었다.”
그 뒤 그의 집안은 양쪽에 보험을 들었다. 일본뿐 아니라 독립운동진영에도 기부금을 냈던 것이다. 위 진상규명보고서에 인용된 <반민특위 조사기록>에 따르면, 이 집안은 3·1운동 9개월 뒤인 1919년 12월경에 10만 원 상당을 김좌진과 상하이 임시정부에 헌납했다. 히로히토 일왕(천황) 저격미수의 주인공인 이봉창 의사가 1917년에 약국 직원으로 일하면서 받은 월급이 숙식 제공과 10원이다. 장직상 가문이 독립운동에 기부한 금액도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독립운동가들의 위협을 받던 시기에 장직상의 신변에는 크게 두 가지 변화가 있었다. 하나는 1916년에 일제 관직을 그만두고 기업 경영에 나선 것이고, 또 하나는 칠곡을 떠나 남쪽 대구로 거점을 옮긴 것이다. 1917년에 대구은행에 자본을 투자하고 취체역(이사)이 된 그는 뒤이어 선남은행 등에도 투자하는 방법으로 재계 활동을 넓혀갔다.
1917년에 독립운동가들의 공격으로 아버지를 잃은 장직상은 얼마 뒤 독립운동의 혜택을 입게 된다. 3·1운동의 충격을 받은 일제가 한국인들의 환심을 사고자 금융업에 대한 문호를 개방한 것이 그의 경영을 도약시키는 계기가 됐다. <친일파 99인>은 “3·1운동 이후 일제는 조선의 상층 부르주아계급을 회유하기 위해 기업의 설립을 자유화하는 정책과 지주자본을 기업으로 유도하는 정책을 추진”했다면서 이렇게 설명한다.
“일제는 그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1920년 조선인 지주 자본가에게 4개의 은행을 설립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이에 칠곡 장씨가의 장길상과 장직상은 1920년 1월 7일 대구에서 경일은행을 설립하였다. 이는 자신의 자본을 단순히 투자하기만 하던 1910년대의 소극적인 방식에서 자신들이 주체가 되어 금융기관을 설립하는 적극적인 방법으로 전환하게 됨을 의미한다.”
일제 경제 착취에 조력 제공해 이윤 축적
1920년에 왜관금융창고 사장 및 동아인촌(성냥회사) 사장. 1921년에 선남은행 이사 등의 타이틀을 추가로 갖게 된 장직상은 1922년 무렵에 경북 최고 부호로 떠올랐다. 경북 최고 부호인 아버지의 재산을 형제들과 나눠 가진 상태에서 자기 사업을 경영해 도내 최고 부자가 됐던 것이다. 독립운동가들에게 아버지를 잃은 그가 도리어 독립운동 덕분에 재산을 증식해 아버지의 지위를 잇는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장직상은 일제 통치가 개시되는 시점에는 일제 군수였고, 일제가 패망하는 시점에는 중추윈 의원이었다. 행정직을 그만둔 1916년부터 도평의회 보궐선거에서 당선되는 1922년 사이에는 관직이 없었다.
그는 관직을 근거로 일제의 녹봉을 받았지만, 관직과 관계없는 경영 수입도 엄밀히 말하면 친일재산이었다. <친일파 99인>은 “그를 비롯한 장씨가는 일제의 정책에 적절히 조응해가며 토지자본을 금융자본으로 전환”하면서 “예속 자본가”의 길을 걸었다고 기술한다. 일제의 경제 착취에 조력을 제공하는 방법으로 이윤을 축적하는 대일 예속적 자본가였던 것이다.
그의 자본 축적이 일본의 지원에 힘입었다는 점은 ‘재벌집 아들’다운 통큰 희사에서도 나타난다. 도로 부지 2개를 기부한 것 외에도, 전투기 구입비를 즉석에서 내놓는 일도 있었다. <친일인명사전>은 “1937년 8월 애국기 경북호 헌납을 위한 대구 유지 간담회가 열렸을 때 즉석에서 1000원을 헌납했다”고 설명한다. 1930년대 서울에서 식사 제공에 3원 내지 7원을 월급으로 받는 직공들이 많았던 점을 감안하면, 그가 일제에 기부한 돈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
그가 일제에 돈만 기부한 것은 아니다. 이전에도 친일단체에 가담한 그는 1938년 이후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국민총력조선연맹·흥아보국단·조선임전보국단·대화동맹 등에 참여해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원했다. 일제를 위해 돈뿐 아니라 시간도 많이 바쳤던 것이다.
동생인 장택상이 경찰 책임자가 되어 독립운동 진영을 탄압하던 미군정 시기에 장직상은 군정청이 관리하는 남선전기의 사장이 됐다. 뒤이어 조선경제협의회 감사가 되고 대한생명보험 취체역 회장이 됐다. 그런 뒤 “1949년 반민특위에 자수하여 기소유예처분을 받았다”고 <친일인명사전>은 말한다.
중추원 의관 6선과 예속 자본가의 길을 걸으며 경북 최고 재벌의 지위를 누린 그는 76세 때인 1959년 4월 17일에 세상을 떠났다.
김종성 기자
<2024-05-15>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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