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소개]
혁명성지 순례: 간도 신흥학교 회억(回憶) ①
이번에 소개하는 자료는 조선민족혁명당의 선전 주간지 『앞길』에 실린 「혁명성지 순례: 간도 신흥학교 회억」이다. 이 글은 1937년 3월~5월 사이 제4호부터 제14호까지 총 11편이 연재되었으나 현재 4편의 결락본(4호, 8호, 9호, 12호)이 있어 여기서는 7편만 수록하였다. 일부 한자투는 현대어로 풀어 썼고 판독되지 않는 글자는 □로 표시하였다.―편집자 주
간도 신흥학교 회억-1,000여 명 조선건아가 복수의 검을 갈던 곳(2)
조국광복의 위대한 사업을 준비 실행함을 기약하며 혁명 청년과 군중을 양성 훈련한 책무를 자임한 지도인물인 그 선생네가 전 가족을 거느리고 새책원지(策源地)로 이주함은 얼핏 보고 잘못 생각하면 한 큰 실책이며 또는 피란을 겸하여 위함이 아닌가 하는 의혹도 없지 아니 하리라마는 그네들은 당시 사회 정도에 있어서 내외국의 정세에 매우 통달하고 신구 교체 시기의 제반 사회상의 장단점을 잘 이해하는 선각자들이었다. 구구한 자기 가족의 안전을 위하는 피란을 겸(兼)코지 함도 아니오, 또 그 자신의 행동에 허물됨이 없지 아니할 것도 잘 아는 바이었다. 그러나 그분네가 그와 같이 가족을 이끌고 □가 이주함은 두 가지의 큰 결심과 고충이 있는 것이었다.
첫째는 자기네가 조국광복의 대업을 성공하기 전에는 차라리 이성의 원혼이 될지언정 적의 굴레와 유린하에 있는 고토(故土)를 다시 밟지 않고자 함이며 둘째는 자기네의 다정하고 사랑하는 부모, 형제, 처자들로 얼마 동안이나마 적 일본의 노예됨을 차마 보지 못하겠는 까닭이었다. 이 얼마나 확고한 결심이며 침통한 이주이냐, 그러므로 그네들은 비록 초야몽매(草野蒙昧)하고 □□ 황량한 이역(30년 전 서간도의 현상이다)에서 노인을 돌보고 어린이를 이끌며 엄청난 곤경을 당하면서 여장(旅裝)도 다 풀기 전에 그와 같이 열성적으로 예정한 계획의 초기를 개시함이었다.
하늘에는 헤아리지 못할 비바람이 있는 것과 같이 사람의 일에도 뜻하지 않은 걱정이 있다. 이것이 큰 사업을 맡은 이에게 주는 자연의 훈련이라면 자연도 그대로만이 아니라 그 무슨 신비한 뜻이 있지 않은가 하는 느낌이 없지 아니하다. 그 주도면밀한 계획, 그 순진한 적성(赤誠), 그 대범한 행동 일편단심으로 오직 조국광복의 사업 진행에만 헌신 매진하는 그분네의 첫걸음의 앞에 두 가지의 큰 장애가 닥쳐서 곤경 위에 한층 더 큰 곤경을 주었고 진행 초보의 벽두에 큰 좌절을 받게 하였으니 그 하나는 적 일본의 소위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암살음모사건의 발로이오, 또 하나는 토착주민인 청인(淸人)의 배척사건이었다.
소위 데라우치 암살음모사건이란 것은 강도 일본이 소위 일한합병조약을 늑체(勒締)하여 조선민족의 장구하게 하여오던 국가생활의 일체를 파멸 유린한 직후로 한 걸음 더 나가서 전국에 남아있는 애국지사와 광복운동의 영도자들을 일망타진하여 그 운동의 뿌리를 뽑고 강압의 위력으로 전 조선민족을 복종케 하고자 하는 음모로 기회만 엿보고 있던 중 이 사건의 발로를 빙자하여 백방 경직(耕織)하여 1911년 봄부터 수년을 걸쳐 야수의 본능적 사나운 행동을 발로하여 내외의 이목을 경동(驚動)케 한 일대 의옥(疑獄)사건이라. 지금까지 조선민족의 심각한 인상이 새로운지라. 다시 창황하게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국내에 있어 서 서간도 경영의 각 사무를 분담 진행하던 각 동지들은 적에게 거의 모두 피체되어 자금의 조달, 교통망 시설(施設), 우수청년의 징집 파견 등 기타 일체 계획과 진행의 근저까지 파괴되어 사업시설이 중단되고 선두부대로 도래한 지도자인 그네와 그네들을 뒤따라 이주한 기타 동포들은 고립무원(孤立無援)의 비경(悲境)에 빠졌다.
그러던 중 토착 청인의 배척사건이 또 잇달아 돌발하였다. 이것이 비록 토착인의 몽매와 유랑동포의 무지와 처음 보는 다수 이주인의 행색들로 말미암아서 일어난 요언(謠言)으로서 생긴 것이나 이것이야말로 참 뜻밖이라. 고립무원의 비경을 당한 그네들은 진퇴양난의 곤경에 빠졌으니 그 곤란한 상황이야 어찌 붓으로 만일이나마 형용할 수 있으랴. 몸소 그 맛을 못 본 이는 도저히 예상하기도 어려울만 하였다.(계속)
『앞길』 제5호(1937.3.29)
간도 신흥학교 회억-1,000여 명 조선건아가 복수의 검을 갈던 곳(3)
원래 서간도라는 일대 지방은 청조(淸朝)의 발상지로서 수백년간 봉금(封禁)되었던 용강[처음에는 백두산 서남산맥의 기원을 지칭함이었으나 그 후 査□官의 호도로 그 산맥의 천여리의 대한]을 총칭하게 되었음의 지역이라. 인민의 주거를 불허하여 산야가 황무(荒蕪)한 대로 내려오다가 청조 말엽에 이르러 산동 직예(지금의 하북) · 하남성의 빈궁민이 점점 이주함에 따라서 약간의 산야가 개척되고 십수 현(縣)의 현치를 설치하였으나 인구는 극소하고 교통은 막히고 정치는 퇴폐하여 호자(箶子. 소위 마적)는 도처에서 날뛰고 간상(奸商. 소위 大粮戶)은 세궁민의 고혈을 착취할 뿐 문화의 개발은 도외로 두므로 인민은 대부분 몽매하여 비록 혁대수(革帶水)인 압록강을 사이에 둔 이웃나라이건마는 그 국명 좇아 바로 알지 못하고 흰옷 입은 한국인을 보면 오직 꿔린(高麗)이라고 불러서 김가는 ‘진꿔리’ 이가는 ‘리꿔리’라 할 뿐이오, 한국인의 의관문물이 어떠한지도 모르는 터이니 어찌 그 정치의 변국(變局)을 알 수 있으랴.
그러던 중 그 시기까지 일대 지방에 몰래 이주한 농민과 유랑하는 약간의 동포가 있었으나 모두 맨 상투바람에 수건만 동이고 겨울저고리 바람으로 다니는 분네만 보던 그네들은 이 흰옷 입은 꿔리로서 의관을 정제하고 용모와 행동거지가 단정한 다수의 남녀노소가 수십 량의 크고작은 수레[이 大車와 小車는 만주지방의 유일한 교통기구인데 그 制式은 우리나라의 소달구지와 같은 조잡하고 무거운 이륜차이다. 소위 大車는 네다섯 마리의 말이나 노새로 끌게 하는데 화물운반에 쓰며 간혹 사람이 타기도 하고 小車는 한두 마리의 말이나 노새로 끌게 하는데 수레 위에 가마같이 휘장을 둘러서 오직 사람만 타며 간혹 가벼운 화물을 운반하기도 하는 것이라. 그런데 이것들도 氷凍期 외에는 거의 쓰지 않는다]로 1대, 1대씩 전진하매 토착인들은 오직 놀란 눈으로 어떠한 큰 부자나 부귀한 대관들의 행동인 것으로 여기는데 더구나 수건을 동이고 유랑하는 무식한 동포님네는 이 주인들에게 무책임한 말로 그네들을 가르치어 한국의 부자이오, 고귀한 대관들이 오는 것이라 하매 요언이 점차 일어나서 혹은 꿔리 ‘임금’이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겨 쫓기어 오는 것이라고 하며 혹은 ‘꺼리’의 역적 이완용의 형제 중에서 일본의 괴뢰로 □□한 병기를 몰래 숨겨서 만주까지 침탈하려고 오는 것이라고 하는 별별 유언비어가 돌아다니게 된다.
무식하고 부패한 지방관헌들은 일방으로는 의심스러워 하며 일방으로 뇌물도 바라고 군대를 파견하여 우선 목적지 유하현 삼원포 등지에 선주한 이들의 거소를 포위 수색하며 혹은 잇따라 전진하는 이들을 중도에서 차단하여 도중 여관에서 체류 방황케 되었다. 그러나 사실 무근의 요언은 사실이 증명하는 바이라. 大□을 임하는 것과 같은 기세로 대하던 무지한 군경(軍警)은 사실무근을 목도하고 또 우리 영도자들의 성심을 다한 친절한 설명에 의하여 오해는 많이 풀리고 각지의 차단지가 무너져 후속 부대가 계속 목적지에 거의 집중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자들은 심중에 은근히 바라던 뇌물도 한 가지 얻지 못하였으므로 탈잡을 거리가 없어 외면으로는 동정을 표시하였으나 가만히 주민을 유혹 · 공갈하여 가옥의 出□ · 곡식과 땔감 · 기름과 소금 · 채소들의 거래, 풀군의 고용, 경작지의 임대를 금지케 하고 심지어 앞서 매매하였던 토지까지도 원 주인을 공갈하여 필경은 도로 물리게 하였다.
『앞길』 제6호(1937.4.5)
간도 신흥학교 회억-1,000여 명 조선건아가 복수의 검을 갈던 곳(4)
이 곤경을 당한 수백 인의 이주동포는 할 수 없이 고액의 세금으로 십수 칸의 방을 얻어 노약자와 부녀자들로 눈비를 간신히 피하게 하고 일부의 장정은 ‘헛간’과 빈 ‘강낭장자’[강낭이삭을 저장하는 우리나라 ‘원두막’ 같은 목책 곳간이나 잡곡이나 콩을 저장하는 토굴 등]에서 기거하며 십수 리 밖의 산촌으로 다니며 2~3배 비싼 식량과 땔감을 근근히 구입하여 그날그날의 호구(糊口)를 할 뿐이었다. 이렇게라도 구매한 조[粟]는 주민들의 먹지 못하게 된 썩은 것이어서 아무리 서너 번 우려낸 후에 지은 밥이라도 그 썩은 악취가 코를 찌를 뿐더러 모양과 끈기는 황송한 말이나마 돼지똥과 흡사하였고 소위 반찬이란 것은 소금물에 조린 콩 또는 ‘메주콩’에 소금 넣어 끓인 급조한 국뿐이었다.
그러나 이렇듯 침식(寢食)에 극도의 곤란을 겪은 수백의 남녀노소는 한 사람이라도 원망이 없고 오직 장래 목적 달성의 희망과 자신감만이 있었을 뿐이다. 적지 않은 농민들은 비록 농토를 빌리지 못하여 모두 실농(失農)하였고 약간 휴대하였던 금액은 전부 소비되었으나 서로 부조하며 서로 격려해가며 배우는 이는 배우고 가르치는 이는 가르쳐 추호도 나태함이 없으며 영도자인 선배네는 이주동포의 안녕과 지도에 힘쓰는 일방으로 토착인의 각성과 청국혁명당과의 연락에 진력하여 점점 배척의 풍조를 없애고 동정의 심경을 유발케 하였다. 그네들의 고심참담한 노력은 참으로 국외인(局外人)이 느끼지 못할 바가 많으리라.
이와 같이 1년여를 지극한 곤경과 분투하며 견인불발(堅靭不拔)의 노력으로 국내외를 돌아보면서 1912년 즉 중화민국 원년 봄에 이르러서는 우리의 영도자네와 훈련받던 건아들은 무장을 완비하고 중국혁명군에 직접 참가하여 선봉대의 임무를 자담(自擔)하여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 유하현 점령에 성공의 광휘를 나타냈다. 이것이 비록 한국 광복건아의 한 자그마한 첫 시험이었으나마 중국혁명군의 흠패(欽佩) 부근 일대와 주민의 경탄을 받아 비로소 지방유지의 후한 동정과 일반 토착인의 깊은 신임을 받아 전도의 서광을 얻게 되매 저윽이 자위와 유쾌를 느끼게 되었었다.
이와 같이 두 가지 난관 중 토착인의 배척인 한 난관은 돌파하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네들의 환영과 도움을 얻었으며 또한 복국(復國)운동에 끝까지 분투 노력하다가 적의 무쌍한 강압으로 눈물을 흘리고 망명하는 이, 적의 신하됨을 부끄럽게 여기어 가족을 이끌고 출국하는 이, 적의 착취와 침탈로 생업을 잃고 남부여대(男負女戴)하여 유리표박(流離飄泊)하는 이들의 풍문을 듣고 도래하는 동포가 끊임없이 이주하니 자금의 조달만 이루어졌다면 예정한 계획대로 경영하게는 되었으나 불행히도 적 총독의 암살음모사건이란 의옥사건은 한층 더 확대되어 국내 동지와의 교통 연락(聯絡)이 두절되매 이 난관의 돌파는 도저히 다시 어찌할 일이 없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네들은 일방으로는 토착 대량호(大粮戶)의 산야 황무지(간혹 묻힌 땅)를 빌려 이주동포로 개간 정주케 하며 일방으로는 경학사의 발전과 신흥강습소의 정돈 확장에 전심 노력 하였다. 신흥강습소는 처음에 이주인사의 중도 폐학(廢學)한 자제와 소문을 듣고 모인 청년들의 무사한유(無事閒遊)함을 애석히 여기어 그 황망한 중에도 우선 응급 시설한 것이라. 그럼으로 그 내용의 설비는 아무것도 없었다. 빌린 농막 한 칸은 밥 짓는 부엌을 삼고 남은 두 칸은 급조한 바루우(?)에 날짚을 펴고 삿자리를 깔고 또 삿자리를 칸을 막아 여러 구역으로 나누어 교실과 침실로 겸용하고(이때에 이것이 예배당도 되고 공회당도 되었다) 학생들은 삿자리 위에 앉아서 무릎에 공책을 놓고 필기하며 배웠고 교사는 구술 또는 필기를 해주었다.
『앞길』 제7호(1937.4.12)
간도 신흥학교 회억-열혈건아 둔전제로 군산추월(羣山秋月)에 독병서(讀兵書)(7)
이때 회중(會衆)은 비분강개한 어조로 부르짖었다. “우리들이 망국의 비통을 당한 후에 가세가 파산하고 부노휴유(扶老携幻)하면서 강을 건너 도만한 이래 2년간에 고생하면서 열악한 환경과 악전고투하다가 우리의 가장 중요한 사업인 독립군 양성의 기관인 신흥학교를 유지 발전치 못하고 이제 폐지하게 되었으니 이는 곧 우리가 도강한 목적을 잃은 것이며 서간도 경영의 실패와 가망 없음을 선언함이니 경학사의 허명(虛名)은 두어서 무엇 하느냐” 하고 즉시 경학사 조차 해산하고 말았다. 이때의 이 비장침통한 광경이야말로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신흥학교의 전도흥폐(前途興廢)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긴장한 태도로 이 회의에 끝까지 참석한 25세의 한 청년과 40세의 한 장년이 있었다. 이 청년은 곧 신흥학교의 교감인 윤기섭 씨이며 장년 인사는 동교 교사의 1인인 추당 김창환 씨이다(김창환 씨는 동년 가을에 경성으로부터 도래하신 한 퇴역군인인데 신흥학교의 교무를 분담한 선생이다). 이 결의와 이 광경을 본 윤기섭 씨는 태연히 일어나서 견결한 결심과 장중한 기개로 회중에 선포하여 말하되 “나는 여러분의 이 신흥학교 폐지와 경학사의 해산의 비장한 결의에 대하여 극히 통탄하는 바이요, 우리가 다년간 고심 계획하고 2년여 동안 이곳에서 험악한 환경과 악전고투하여 오던 이날에 이와 같은 결의를 하신 여러분의 심장이야말로 조각조각 찢어지고 마디마디 끊어지는 듯 하심을 잘 아는 것이요. 그러나 우리는 백척간두에 한 걸음을 전진하는 여용(餘勇)이 있어야 하고 우리가 비록 불의의 타격과 환경의 열악으로 인하여 예정한 계획대로 실현하기는 불능하게 되었다 할지라도 우리의 서간도 경영의 전도가 아주 무망한 것은 아니요. 그러므로 여러분이 비록 이러한 결의를 하였을지라도 나는 신흥학교 하나만은 나의 전 생명을 희생할지라도 기어히 유지하고 발전케 하기를 자담하오. 그러한즉 여러분은 각각 심력이 자라는 한까지 도와주심을 바라오.” 하고 씨는 폐지하기로 결정한 신흥학교의 계속 유지 발전의 모든 책임 을 자담하였다.
이에 김창환 선생은 만강(滿腔)의 열성으로 윤기섭 씨의 선언에 찬동하여 말하되 “우리의 유력한 동지의 다수는 비록 적에게 피체되었으나 남아있는 동지가 적지 않고 또 망국의 큰 치욕을 씻으려고 우리를 추종하여 도래한 애국의 동포가 적지 않으며 또는 끊임없이 도래하오. 그리하고 이곳의 환경을 볼지라도 먼저 오신 여러분 동지들의 분투 노력으로 이만큼 개척해 놓았는데 지금 이주동포의 전체가 비록 기아에 신음할지라도 이제 서간도 경영의 실패를 선포하고 손을 뗀다면 이것은 전공(前功)이 애석할 뿐 아니라 이미 도래한 동포와 계속 도래하는 동포와 청년학생에게 낙망을 줄 뿐이며 우리의 본래 목적에 상이하는 것이니 이것은 우리가 차마 못할 것이오. 우리의 지금 처지는 비록 할 수 없는 곤경에 빠졌으나 우리의 전도는 오직 광 명이 있을 뿐이오. 나는 비록 무식하고 거칠고 서툰 무부(武夫)의 하나이나 아직까지는 나의 체력이 건강하니 이 체력이 감당할 수 있는 때까지는 이 신흥학교를 위하여 윤기섭 군과 함께 그 책임을 분담하겠소. 윤기섭 군, 군은 학교 안에 있어서 교무의 처리와 학생의 교도훈련에 전력하시오. 나는 밖으로 돌아다니면서 학교경비의 모연과 학교지지의 응원자 획득에 전력하리다” 하고 그 결심과 용기를 밝혔다.
이 두 분의 힘 있는 표시를 들은 회중은 비장한 기분 속에서도 각각 절규하되 “우리의 참담 경영하여 오다가 불행히 전복되었던 우리 교육기관인 신흥학교는 두 동지의 희생적 결심과 충용한 부책(負責)으로 다시 일어서게 되었다. 우리는 비록 기아에 신음할지라도 각자 심력이 미치는 데까지 도와보자” 하고 그 비장 실망하던 속에서도 저윽이 자위의 심회를 가지고 이 경학사의 최종회의를 마쳤다. 회의가 끝나자 즉시 윤기섭 · 김창환 두 선생은 학교로(이 신흥학교가 있는 통화현 합니하와 유하현 추가가는 그 거리가 70여 리다) 돌아와서 이 회의의 결과를 고대하던 교직원과 학생 전체에까지 이 사실을 보고하고 이어서 신흥학교의 전도 발전과 서간도 경영의 성취는 즉 우리 교사와 학생의 전체 혈성에 달렸음을 들어서 지성간측(至誠懇側)히 설명하고 각자 자유의 재결심을 구하였다. 간절한 설명을 들은 수십 건아인 학생 전체는 이구동성으로 전도 개척의 자임을 맹서하매 견고한 결심과 영용한 기백은 어떤 장애라도 일축 분쇄하기에 어려움이 없을 만하였다.
(계속) 『앞길』 제10호(1937.5.3)
간도 신흥학교 회억-열혈건아 둔전제로 군산추월(羣山秋月)에 독병서(讀兵書)(8)
이에 윤기섭 · 김창환 양씨는 다시 교직원을 정돈하여 이철영(교장), 윤기섭(교감), 김창환 · 성준용 · 이규봉 · 김기동(이상 교사) 제씨로 교무를 분담케 하고 교사와 학생 일동이 협력 일치하여 춘기 개학 준비에 극력 분투하매 악천우와 격랑에 전복될 뻔했던 신흥학교는 다시 간도사회의 일대 지주로 우뚝 서게 되었다.
다음해(1913년) 봄부터는 교사와 학생 일동이 결심한 새 용기와 새 정신으로 전도 개척에협심 분투하였다. 그리하여 김창환 선생은 각지로 돌아다니며 일상 경비의 모연(募捐)도 하며 학교유지 찬성자도 징구(徵求)하며 윤기섭 선생은 교내에 있어서 교육과 경리의 일체 책임을 부담하고 다른 교사를 독려하여 학생훈련에 전력하여 혹은 교실에서 학과를 교수하며 혹은 교련장에서 교련을 실시하며 학술과를 마친 여가에는 교사, 기숙사와 교구, 취사도구들을 수리 보충하는 목수도 되고 미장이도 되며 혹은 채소를 가꾸는 야채장수도 되며 혹은 일반 학생을 데리고 황무지를 개간하는 농부도 되고 땔감을 구하는 초부(樵夫)도 또는 짬을 내서 군사학의 번역 편찬에 종사하는 편역원도 되어 이른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거의 모든 사역(使役) 을 스스로 겸행하였다.
그러나 이주하는 모든 동포들은 신 개척지에 으레 있는 수토불복(水土不腹) 및 기타 각종 질병, 기후의 한랭, 생소한 지방의 토질과 기상의 변동, 서툰 경작법 등 각종 장애로 실농 혹은 흉년으로 인하여 생활안정이 불가능하므로 모두 학교를 원조할 마음은 넉넉하나 물질을 보조할 능력은 극히 빈약하므로 학교 경영도 따라서 그 어려움이 막심하였다. 기자가 근래 윤기섭 선생에게 들은 그때 신흥학교에서 겪은 곤경 중 이러한 두세 마디의 말로써 그 일반을 가히 상상할 수 있었다.
그 선생은 지금으로부터 26년 전부터 9개년간 신흥학교 복무시대의 간난(艱難)상황 회상담중 이러한 말이 있다. “3일간 굶으면서 매일 5 · 6시간 교수와 7 · 8가지 잡무를 보았는데 2일간까지는 괜찮더니 3일째 저녁에는 현기증이가 좀 나더라. 15일간을 못 먹어보았는데 7 · 8일 까지는 잘 가꾸어 기른 푸성귀국 맛이 여전하더니 그 후부터는 맛이 없어지더라. 겹옷을 입고 밀짚모자에 여름 신발을 신고 적설중에서 전투연습을 실시해보니 추위를 인내 못할 것은 없으나 수족과 귀가 좀 시리더라. 여름날 하학 후에는 가끔 학교 언덕 밑에 흐르는 강에 가서 입은 고의적삼을 빨아 널고 그것이 마르기를 기다리면서 맑은 물에 몸을 씻다가 빨아 말린 옷을 걷어 입고 오는 것도 일종의 운치더라”고 하시더라.
그때 제 선생들이 이러한 것을 겪어감은 그 정신으로는 물론 와신상담의 실천이리라마는 그 실질의 정황으로는 서간도사회의 경제정세의 궁박이었다. 그러나 그네는 오직 지성뿐이며 용기 뿐이며 희망의 신념뿐이었다. 그네는 진실로 간도사회의 지주이었으며 간도운동의 개척자이며 파종경운자(播種耕耘者)이었다.
윤기섭 · 김창환 두 선생의 지성분투로 수년을 지지하여 오매 학생은 점점 증가하여가고 학교는 가일층 뿌리가 박혔다. 이때에 내지로서 노소의 지도자들이 점차 도래하였으니 그중 허성산, 여준, 이탁, 김동삼, 이진산, 최중산, 남정섭 제 선생은 가장 분투 노력하던 인사이다. 이에 우선 신흥학교 유지 찬성자를 규합하여 교육회를 조직하고 학교의 경영 발전에 협력할새 여준 선생은 학교 교장으로 남정섭 선생은 학교 경리로 이탁 선생은 교육회 회장으로 각각 취임되어 일치 노력하매 학교의 전도는 점차 서광이 비쳤다.
경학사가 해산되매 이동녕, 이회영, 장유순, 이시영, 김영선, 김형식, 박원근 제씨는 혹은 러시아 연해주로 혹은 북만 중동선 부근으로 혹은 봉천으로 혹은 내지로 각각 흩어져 상호 연락하매 초지관철에 노력하였으나 간도경영에는 하등의 조력을 주지 못하였고 나머지 지도자들은 각각 향리, 친척, 종교 등의 친소동이(親疎同異)와 농작지 승조(承租)의 편부(便否)에 따라서 부근 각현에 산거케 되고 그 후 수년간 끊임없이 이주하는 동포들도 역시 선주자의 인도로 각각 자신의 관계를 따라 부분부분히 집거케 되매 각현 각지에 자연 부락이 점차 형성케 되고 이주동포의 총수는 수천 호에 달하게 되었다. 이에 각 지도자들은 이 수천 호 이주동포의 통일 지도와 각 부락 아동의 교육을 위하여 자치단체 조직의 필요를 절감하게 되었다.(계속)
『앞길』 제11호(1937.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