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울의 봄’ 현장을 가다] – 장태완 편
전두환 세력들은 쿠데타를 준비하며 나름 사람을 분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건영, 정병주, 정승화는 사전 제거 핵심으로 분류하고, 장태완은 때에 따라 자기들이 구슬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쿠데타 당일 최규하 전 대통령이 사인을 바로 하지 않으면서 전두환 세력들의 계획과는 다르게 흘러가게 되었습니다.
12.12 쿠데타 이후 장태완 장군은 신군부와 타협하게 됩니다.
신군부 측에서 제안한 한국 증권 전산 사장 자리를 승낙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반란군 세력이 내민 손을 잡은 것일까요?
그 이유는 가족이었습니다.
1982년 대학생이던 아들이 한 달간 실종되었다가 할아버지의 산소 근처 낙동강 변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남은 가족의 목숨마저 위험해지지 않을까 생각한 장태완 장군은 가족회의를 통해 자리를 승낙하게 됩니다.
제안을 거절한 다른 이들과 비교되는 선택이지만, 장태완 장군은 신군부 세력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1993년 전두환과 노태우 등 34명을 반란 및 내란죄 혐의로 고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