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이병도
이병도와 조선사편수회로 상징되는 일제 식민사관은 한국인의 역사 인식을 좁은 반도 안에 가뒀다. 이병도가 몸담은 조선사편수회의 원래 명칭이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였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사를 반도의 틀에 가두려 했던 일제의 의도가 이 명칭에서도 드러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전신인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박성수 교수는 1986년 9월 17일 자 <경향신문> 기고문에서 “일제는 조선총독부에다 소위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구로이타를 고문으로 앉혔다”라며 구로이타 가쓰미(黒板勝美), 미우라 히로유키(三浦周行), 이마니시 류(今西龍) 세 학자를 거명한 뒤 이렇게 지적한다.
“구로이타를 비롯한 위의 왜곡 3역은 ‘조선반도사 편찬 요지’에서 식민지 백성의 역사는 이를 근원적으로 말살하여 그들의 국민의식과 독립사상을 발본색원하는 무자비한 방법이 하나 있고, 또 하나는 그들의 역사를 볼품 없는 초라한 모습으로 왜곡·날조하여 기를 죽여버리는 차선의 방법이 있는데, 앞의 한국사 절멸책은 사실상 불가능하니 차라리 왜곡하는 방향을 택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병도는 ‘차선의 방법’으로 한국사의 기를 꺾는 일을 조선사편수회와 함께 수행했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 이병도 편은 “1925년 8월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修史官補)에 임명되었다”라며 “1927년 5월 수사관보를 그만두고 촉탁을 맡아 1938년 6월경까지 활동했다”고 한 뒤 이렇게 설명한다.
“조선사편수회 촉탁으로 활동하면서 이마니시와 함께 <조선사> 제1편 ‘신라통일 이전’, 제2편 ‘신라통일시대’, 제3편 ‘고려시대’의 편찬을 담당했다. 수사관보로 재직하던 1926년 1월 조선사편수회 소속 학자들의 공동 연구기관인 조선사학동고회의 편찬을 맡았다.”
이마니시 류 경성대학제국 교수는 한국사를 한반도 안에 구겨 넣는 데 앞장섰다. 2022년에 <선사와 고대> 제69호에 실린 조원진 세종대 강사의 논문 ‘이마니시 류의 고조선 연구와 문제점’은 “그가 한반도 남부의 한(韓)종족만을 오늘날 조선민족과 연결”시켰다고 말한다.
그런 뒤 “이마니시는 기원전 3세기 한반도 북부에는 중국 문명의 영향을 받은 조선이 있었고 남부에는 진번·진국·임둔이 있었다고 하였으나, 기원전 3세기 이전 고조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대륙의 고조선을 한국사와 연결시키지 않으려는 이마니시 류의 이 같은 연구를 돕는 데에도 이병도가 가세했다.
식민지 역사 왜곡의 길로
이병도는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1894. 7. 23.)으로 친일 정권의 감시를 받던 고종이 경복궁을 몰래 빠져나와(1896. 2. 11.) 러시아공사관으로 도피해 있을 때인 1896년 8월 14일에 태어났다. 출생지는 경기도 용인이다.
열아홉 살 때인 1915년에 보성전문학교 법률학과를 졸업하고 스물셋 때인 1919년에 와세다대학 ‘사학 및 사회학과’를 졸업한 그의 원래 꿈은 서양사 전공이었다. <친일인명사전>은 “처음에는 서양사를 전공하고자 했으나 당시 일본사의 권위자였던 요시다 도오고와 쓰다 소우기치의 영향을 받아 조선사 연구로 방향을 전환했다”고 알려준다.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해에 경성 중앙보통학교 교원이 된 그는 문학 활동에도 깊이 뛰어들었다. 1920년에는 염상섭·나혜석·김억 등과 함께 잡지 <폐허>를 창간하고, 2년 뒤에는 염상섭·오상순 등과 함께 문인회를 창립했다. 이처럼 서양사와 문학에도 관심을 보이다가 서른을 앞둔 1924년부터 식민지 역사 왜곡의 길로 들어섰다.
그때부터 한국사를 반도사로 축소시키는 데 가담한 이병도는 외형상 정반대로 비치는 연구 활동에도 참여했다. 한국사를 대륙과 연동시키는 청구학회에도 가담했다. <친일인명사전>은 “1930년 8월부터 1939년 10월까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교수와 조선총독부·조선사편수회 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청구학회(靑丘學會) 위원을 지냈다”고 말한다.
청구학회의 공식적인 설립 취지는 1930년 발간된 <청구학총> 제1호에 실린 나카무라 히데타카의 ‘휘보’라는 글에 나타난다. 조범성 서울역사편찬원 연구원의 논문 ‘1930년대 청구학회의 설립과 활동'(2021,<한국민족운동사연구>107)에 인용된 나카무라의 ‘휘보’는 역사연구 성과를 대중에 알릴 방법이 미비한 것 등을 역사학의 결함으로 언급한 뒤 이렇게 설명한다.
“청구학회를 조직한 것은 실제로 상술한 결함을 채우기 위한 것으로, 조선과 만주를 중심으로 하여 극동문화를 연구하고 보급할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청구라고 이름 지은 것은 대저 청구가 동방의 나라의 범칭이며 나아가 고래(古來) 조선의 이명(異名)이기도 했던 데에서 기인한다.”
청구라는 명칭이 고대 한국을 지칭하기도 하고 동북아 국가들을 포괄적으로 지칭하기도 하기 때문에 이 명칭을 택했다고 소개했다. 한반도와 대륙을 연결시키는 데에 이 명칭이 적합하다고 봤다. 또 한국과 만주를 중심으로 극동문화를 연구하고 이를 대중에 전달할 목적으로 청구학회를 결성한다고 했다. 한국사를 반도 안에 가둬두고 ‘볼품 없는 초라한 모습’으로 위축시키던 식민지배자들이 이 시기에는 다른 데로 눈을 돌리고 있었다.
“조선과 만주를 중심으로 하여 극동문화를 연구”한다는 공식 표명에 담긴 의도는 만주침략 및 지배의 합리화였다. 이를 보여주는 것이 만주사변 발발(1931. 9. 8.) 11개월 뒤에 나온 <청구학총> 제9호 기사에 나타난다. 위 조범성 논문에 따르면 ‘편집후기’라는 제목이 붙은 이 기사는 청구학회의 연구 목적이 만주 침략과 보조를 맞추는 데 있음을 솔직히 드러낸다.
“만주사변의 발발 이래 최근 1년간 일반의 이목이 현저하게 만주의 천지에 집중되었고, 그 풍토·문물이나 역사에 관한 흥미는 상당한 자극을 받고 있다. 본회의 목적인 ‘조선 및 만주를 중심으로 한 극동문화 연구 및 그 보급’은 현하 시국에 즈음하여 가장 급무라 여겨지지 않을 수 없다.”
일제 손잡고 한국사를 이리저리 왜곡
이처럼 청구학회는 한국과 만주의 역사적 연고를 활용해 일제의 만주침략을 합리화하고 분위기를 부추기는 연구활동을 수행했다. 이병도는 이 학회에 이름만 올리는 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위 논문에 따르면 1930년 12월 6일 그는 총독부 도서관에서 열린 청구학회 행사 때 ‘평양의 재성(在城)과 나성에 대하여’를 주제로 발표했다. 이 내용은 1931년 2월에 <청구학총> 제3호에 실렸다.
이병도는 한국사를 반도 차원으로 축소시키는 이마니시 류의 연구에도 참여하고 한국사를 만주와 연결시켜 대륙침략을 합리화하는 청구학회의 활동에도 참여했다. 한국사를 줄였다 늘렸다 하는, 한국사를 갖고 장난질을 하는 일에 다 참여한 것이다.
일제가 한국사를 축소한 것은 한국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해서였고, 한국사를 만주와 연결한 것은 만주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해서였다. 이병도가 그 둘에 다 참여한 것은 그가 최소한의 학문적 지조도 없이 일제의 침략정책에 이리저리 부화뇌동했음을 보여준다.
그런 부화뇌동은 그에게 많은 이익이 됐다. 그는 1925년부터 일제의 녹봉을 받으며 친일재산을 축적했다. 또 일제의 도움으로 학계 기반을 구축하고 이를 토대로 해방 뒤에 한국 역사학계를 장악했다. 서울대 대학원장이 되고 문교부 장관이 되고 국사편찬위원장이 되고 국민대 학장이 되고 성균관대 교수가 되고 민족문화추진회 이사장이 된 것은 그의 역사학계 입지를 공고히 해주었다.
일제와 손잡고 한국사를 이리저리 왜곡한 이병도가 끼친 영향은 웬만한 친일파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그가 남긴 연구 결과는 지금도 한국인들의 머릿속에 상당 부분 내장되어 있을 것이다. 일제 잔재를 한국인의 인식 깊숙이 심어두는 역할을 했으니, 일당백의 친일파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병도는 친일로 인해 어떤 불이익도 받지 않았다. 도리어 그것을 기반으로 사회의 중책을 맡았고 포상도 많이 받았다. 국민훈장 무궁화장, 5·16민족상, 학술원상 등이 주어졌다. 93세 때인 1989년에 죽은 이병도가 아직도 역사학계에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여전히 일제의 망령이 그를 통해 이 사회의 역사인식을 좌지우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김종성 기자
<2024-06-22>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한국사로 장난질을 한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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