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정낙용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4389명 중의 최연장자는 1827년 생으로 알려진 정낙용(鄭洛鎔)이다. 정조의 아들인 순조 때 한성부에서 출생하고, 무과시험 장원급제를 거쳐 전라도좌수사와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한 인물이다. 충무공 이순신을 연상시키는 이런 관직을 거친 뒤에는 형조판서와 공조판서를 거쳐 고종황제를 보좌하는 궁내부 특진관과 시종원경 등을 지냈다.
<친일인명사전>에 실린 친일파 중에서 최연장자라는 점을 빼면, 정낙용은 외형상 특이점이 별로 없어 보인다. 구체적으로 어떤 친일행위를 했는지가 이 사전에 나타나지 않는다. 국권침탈 2개월 뒤인 1910년 10월에 남작 작위를 받고, 1911년에 한국 멸망 포상금으로 은사공채 2만 5천 원을 받고, 1912년에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은 사실 정도만 언급돼 있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16권 정낙용 편도 마찬가지다. 그가 무엇 때문에 일본 작위를 받았는지가 설명돼 있지 않다. 남작 작위와 은사공채와 병합기념장을 받은 사실을 근거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한다는 내용만 적혀 있다.
정낙용이 조선 백성들에게 한 짓
한국 병합 3년 전에 발행된 1907년 3월 15일 자 <황성신문> 기사 ‘국채보상금 모집 취지서’는 대일 차관을 갚고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이 캠페인에 참여한 인물 중 하나로 정낙용을 거명한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정낙용 편은 이 기사에 나온 정낙용이 친일파 정낙용임을 확인한다. 정낙용의 구체적인 친일행위는 드러나지 않은 반면, 그의 구체적인 애국행위는 이처럼 명확히 드러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일제는 남작 작위를 주고 거액의 친일재산을 안겼다. 국권침탈 직후에 귀족 작위를 받은 친일파는 76명밖에 안 된다. 그런 소수의 그룹에 정낙용이 들어갔다. 확실한 것은 그가 남작 작위를 거저 받은 게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작위 수여 전후의 정황에서도 드러난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1910년 10월 11일자 <매일신보> 2면에 따르면, 작위를 받을 수작자가 선정되기 전에 “(정낙용은) 차(此) 영전을 접(接)키 난(難)하리라”라는 하마평이 있었다. 정낙용이 이번 영전을 받기 힘들 거라는 평이 있었다는 것은 그런 물망에 오를 만큼의 상당한 친일행위가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언론에 보도되고 대중이 알 정도의 친일행위가 없었을 뿐이다.
힘들 거라는 하마평이 돌았지만, 결국은 작위가 주어졌다. 그는 이 기쁨을 어쩌지 못했다. 위 기사는 “대(大)주연을 설(設)하고 철야하여 축의를 표한다더라”라고 그의 집안 분위기를 전한다. “희열은 실로 상상키 난하도다”라고 기사는 말한다.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내고 판서를 지내고 고종황제를 가까이서 보좌했던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멸망 2개월 뒤에 일본 작위를 받고 기쁨을 억제하지 못해 철야로 파티를 벌였던 것이다.
정낙용은 일제 작위를 받고 거액을 받은 일 때문에 친일반민족행위자 및 친일파 명단에 들어갔지만,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가 또 다른 방법으로도 일본의 한국 침략을 도왔다는 판단에 도달하게 된다.
대한제국 선포 이듬해에 발행된 1898년 1월 18일자 <독립신문>은 농상공부대신 정낙용의 집에서 발생한 미스터리 절도사건을 보도했다. 손님들이 집을 방문한 상태에서 침실에 있던 정낙용이 윗방을 잠시 다녀온 사이에 침실에 있던 1500냥이 깜쪽같이 사라진 사건이다. “문객들이 모도 스사로 괴샹히 넉혔다더라”라고 신문은 전했다. 방문객들도 모두 저절로 이상히 여길 정도로 돈이 순식간에 사라졌던 것이다.
14년 뒤에 발행된 1912년 3월 6일 자 <매일신보> 3면에도 자작 정낙용의 집에 도둑이 들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의 집에 재물이 많다는 인식이 사람들 사이에 퍼져 있었던 것이다.
그의 집에 돈이 왜 많은지는 고종 임금이 잘 알고 있었다. 음력으로 고종 20년 7월 4일자(양력 1883.8.6) <고종실록>에 따르면, 고종은 병조참판 정낙용을 전라도 나주목에 속한 섬인 지도(智島)로 유배를 보냈다.
고종이 유배를 보낸 구체적 이유는 구한말 역사를 담은 황현의 <매천야록>에서 확인된다. 이에 따르면, 정낙용은 삼도수군통제사 시절에 세금 실은 세미선(稅米船)을 약탈헸다. 부하들에게는 이 배가 밀수선인 것처럼 속이고 세미선을 덮쳐 쌀을 약탈했다. 이 외에도 지방민들의 재산을 갈취한 일까지 뒤늦게 함께 드러나 병조참판 재직 중에 유배를 가게 됐던 것이다.
외세에는 대항못하고 해적질까지… 이순신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런데 그가 해적질을 한 시점이 매우 중요하다. 이 일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직하던 1879년부터 1882년 사이에 있었다. 이 시기는 동아시아 해양 질서가 격동을 치고 이로 인해 조선의 운명이 급박해지던 때였다.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에 제국주의로 내디딘 일본은 1874년에 청나라령 대만을 침공하고 1875년에 조선 강화도를 공격하고 1879년에 유구왕국(오키나와)을 강점했다. 정낙용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1879년에 유구왕국이 병합되자, 청나라는 일본의 다음 표적이 조선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는 정책에 착수했다.
청나라 실권자 이홍장이 주도한 이 정책은 역사학계에서 신조선정책으로 불린다. 청나라의 신조선정책은 1879년 8월 21일(음력 7.4)에 나온 광서제의 황명을 통해 구체화됐다. 이 방침에 따라 청나라는 조선과 미국·영국 등의 수교를 알선하고 서양열강의 힘을 이용해 조선에 대한 일본과 러시아의 영향력을 견제하고자 했다. 1882년에 조선과 미국이 수교한 것은 청나라의 신조선정책이 낳은 산물이다.
이런 시기에 조선의 해양을 책임진 삼도수군통제사 정낙용은 자국 세미선을 상대로 해적질을 벌였다. 다른 지역도 아니고 해양을 책임지는 사령관이 동아시아 해양에서 진행되는 중대 변화를 무시한 채 해적질에 빠졌던 것이다.
만약 충무공 이순신이 그때 그 자리에 있었다면, 일본에 대한 대응을 조정에 촉구하거나 아니면 신형 군함이라도 개발하려 했을 것이다. 정낙용은 그렇게 하기는커녕, 도리어 정부 선박을 약탈하고 주민들까지 괴롭혔다. 해양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적극 대처해도 모자랄 판국에 자기 주머니만 채우려 했던 것이다.
일본이 동아시아 해양을 교란하며 조선·대만·유구를 위협하던 시기에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낸 그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일본의 승승장구를 돕는 것이었다. 고종 임금을 비롯한 당시 위정자들에게도 책임도 있지만, 현장 사령관인 정낙용의 책임도 결코 작지 않다.
그처럼 친일파가 되기 전부터 음으로 양으로 일본을 도운 정낙용은 남작 작위와 은사공채를 받았지만, 이를 오래 누리지 못했다. 1910년 국권침탈 때 그는 80대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친일인명사전>은 “1914년 2월 1일 사망했다”라며 “작위는 장남 정주영이 이어받았다”고 알려준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재산조사위원회의 <친일재산 조사, 4년의 발자취> 정주영 편은 충남 서천군 종천면 신검리의 7필지 땅을 이 집안이 국가에 귀속시켜야 할 재산으로 지정했다.
김종성 기자
<2024-06-30>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최연장자 친일파의 수상한 행각… 이순신 있었다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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