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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회의 ‘김단야와 그의 시대’ … 사회주의 독립운동에 대한 정당한 평가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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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학술회의 ‘김단야와 그의 시대’ …
사회주의 독립운동에 대한 정당한 평가 기대

우리 연구소가 후원한 6·10만세운동 98주년 기념 학술회의 ‘김단야와 그의 시대’가 6월 10일 오후 2시 국회도서관 지하 1층 소회의실에서 열렸다. 소전재단, 김용만 국회의원실이 주최하고 6·10만세운동유족회, 시민모임독립, 김단야기념사업회(준)가 주관한 이번 학술회의는 이동섭 소전재단 이사장과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의 축사로 시작됐다.

본격적인 발표는 ‘고려공산청년회와 김단야’(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 ‘6·10만세운동과 김단야’(박종린 한남대 교수), ‘12월 테제와 김단야’(임경석 성균관대 명예교수), ‘스탈린 숙청과 김단야’(윤상원 전북대 교수) 순으로 이어졌다.

이준식 전 관장은 “1920년을 전후한 시기에 사회주의를 바탕으로 조선혁명을 추구한 이들과 마찬가지로 김단야도 ‘3·1운동의 후예’로 개신교에서 사회주의로 인식전환”을 이뤘으며 “사회주의 혁명가로 전환한 시점은 광둥성에서 상하이로 돌아온 1920년 4월부터 고려공산청년단 상해회에 가입한 1921년 3월 사이일 것으로 추정”했다.

박종린 교수는 “6·10만세운동의 준비는 순종이 죽자 권오설 중심의 고려공산청년회의 6·10운동투쟁지도특별위원회와 김단야 중심의 상해임시특별연락부가 함께 진행”했으며 “5월 초 김단야와 권오설은 국내의 모처에서 회동했다”고 보았다. 또한 “권오설 중앙과 상해임시특별연락부의 관계는 일방적 지도-피지도 관계가 아닌 상호관계”라고 파악했다.

임경석 명예교수는 “1928년 12월 10일에 코민테른 정치비서부가 채택한 조선문제결정서인 12월 테제를 국제당을 좌우하는 소련 볼셰비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이해하면서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은 국제당의 논의과정에 참여하지 못했고 단지 소련의 지시에 맹종하는 꼭두각시와 같은 역할을 했다는 입장이 학계의 주류적 시작”이었다면서 “하지만 조선인 각 대표자들의 문서는 12월 테제 작성의 모본이 됐고 국제당 조선 담당관들은 전적으로 조선인 대표자들이 제공하는 정보에 의존했으며 특히 김단야는 12월 테제 채택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조직문제 결정은 김단야가 제기한 신당창당론을 수용”했다고 분석했다.

윤상원 교수는 김단야를 비롯한 모스크바 거주 한인 혁명가 숙청 과정을 살피면서 이러한 숙청의 의미는 “더 이상 모스크바는 ‘한국 사회주의운동의 배후지, 지원처’로서의 역할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나아가 원동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의 ‘한인 강제이주’ 시기와 맞물리면서 고려인들은 자신들을 지도하고 보호해 줄 방어막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주제 발표 이후 박한용 부산대 점필재연구소 연구원의 사회로 진행된 종합토론에서는 김국화(독립기념관 연구위원), 전명혁(동국대 대외교류연구원 교수), 최규진(청암대 재일코리안연구소 교수), 황동하(전북대 고려인연구센터 교수)가 각각 지정토론을 했다.

한편 이날 학술회의에 앞서 우리 연구소를 비롯한 독립운동 관련 단체와 이학영, 김용만, 이용선, 김준혁, 이수진, 전용기, 천하람 의원 등은 국회 소통관에서 스탈린 정권에 의해 희생된 한인-독립운동가들의 유해 봉환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 방학진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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