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반민특위 강제해산 75년 기억행사’ … 반민특위 명예회복의 전기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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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반민특위 강제해산 75년 기억행사’ …
반민특위 명예회복의 전기 마련

우리 연구소는 “1949년 친일파에 의해 와해된 반민특위의 정신과 친일문제 연구에 평생을 바친 고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이어 1991년에 설립함”을 명토박았다. 따라서 반민특위의 명예회복은 우리 연구소의 숙원 중 하나이다. 반민특위에 대한 연구성과는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허종, 2003) 『반민특위 연구』(이강수, 2003) 등이 있지만 여전히 부족한 편이고 반민특위에 대한 명예회복은 요원한 상태이다.

우리 연구소는 1999년 9월 20일 시민 성금으로 명동 반민특위 본부터(당시 국민은행 명동 본점)에 표석을 세웠다. 표석 제막식 당일에는 당시 국민은행 측을 설득하는 등 표석 설립에 도움을 준 장영달 국회의원과 이원용 반민특위 총무과장(2002년 별세)이 참석했다. 이후 우리 연구소는 기회 있을 때마다 반민특위를 알리려 노력했다. 2001년 1월 11일 조문기 이사장을 비롯해 김정륙(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 자제), 김준형(반민특위 김상돈 부위원장 차남) 선생 그리고 김영식(친일문학인파인 김동환 자제) 선생과의 회합을 반민특위 표석 앞에서 마련했다. 김동환은 1949년 2월 28일 반민특위에 자수했고 반민법 위반으로 공민권 5년을 선고받았다. 이 자리에서 김영식 선생은 반민특위 후손들에게 아버지의 친일행적을 사죄했다. 2004년 1월 19일 저녁에는 『친일인명사전』 편찬 성금 5억원 달성기념 행사도 반민특위 표석 앞에서 가졌다.

2004년 12월 29일 「일제강점하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 제정, 2005년 12월 29일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 제정 등으로 친일청산이 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르자 우리 연구소는 17대 국회 김원기 의장(2004년~2006년), 20대 국회 문희상 의장(2018년~2020년))에게 반민특위 명예회복 요청 공문을 발송했다. 제헌국회가 반민족행위자처벌법을 제정하고 특위 위원 전원이 현직 국회의원이었던 점을 고려할 때 반민특위에 대한 명예회복의 주체는 당연히 국회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지만 예상외로 아무런 회신도 오지 않았다. 이 와중에 EBS 김진혁 피디(현 한예종 교수)는 우리 연구소 소개로 반민특위 후손들을 두루 취재한 다큐 <나는 독립유공자의 후손입니다>를 2011년 8월 방송 예정이었으나 외압으로 불방되자 결국 퇴사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반민특위 후손들 모임이 자연스럽게 구성되어 현재 사단법인 ‘반민특위·국회프락치 기억연대’ 설립을 준비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반민특위·국회프락치 기억연대’는 지난 21대 국회에 법인 등록을 신청했으나 반려되고 말았다.

개혁에 지지부진했던 21대 국회에 실망한 대다수 국민들은 지난 총선에서 다시 한 번 개혁국회를 만들어 냈다. 총선 직후 ‘반민특위·국회프락치 기억연대’의 총무 격인 이영국(반민 특위 이봉식 조사관 아들, 전 휘문고 음악교사, 연구소 서울남서지부장 역임) 후원회원은 방학진 기획실장과 논의하여 새로 선출되는 국회의장과 부의장에게 포괄적인 반민특위 명예회복 조처를 제안키로 하고 이영국 회원은 이학영 국회부의장과 우원식 국회의장의 보좌관 등을 잇따라 면담하여 매우 긍정적인 의견이 오갔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6월 6일 ‘반민특위 강제해산 75년 기억행사’가 열렸다. 사전 행사로 이날 오후 2시 반민특위 본부터에서 시작해 나석주 의거터 – 조선귀족회관 터 – 이재명 의거 터 – 이완용 집터(조중응 집터) 등을 둘러보았다. 답사 안내는 우리 연구소 이순우 연구원이 맡았다. 이어서 오후 3시 명동 가톨릭회관 1층 강당에서 반민특위 후손과 시민 약 300명이 모인 가운데 본행사가 시작됐다. 본행사는 경과보고(이영국), 반민특위 영상 상영, 김정륙 선생이 주최 단체 대표로 개회사에 이어 이학영 국회 부의장의 연대사로 이어졌다. 김정륙 선생은 “반민특위 강제해산 한 달 전인 1949년 5월, 서울 중구 필동 남산자락에 있던 반민특위 위원장 관사에 이승만 대통령이 경찰들의 호위를 받고 직접 찾아온 적이 있다. 이 대통령이 아버지와 거실에서 독대할 때 15살이었던 나는 방에 들어가 있었는데, 나중에 아버지가 대통령과 나눈 말을 들려주었다. 아버지는 ‘반민특위 활동을 형식적으로 하면 나중에 장관 자리를 주겠다’고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고 말했다. 이학영 부의장은 “부의장 선출 뒤 첫 외부 공식행사”라면서 “수차례 민주정부가 들어서며 역사를 바로세우기 위한 노력을 했지만 사회 곳곳에 뿌리박은 친일 잔재의 저항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버젓이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을 모욕하고 후손의 어려운 삶을 조롱해도 아무런 처벌이 없는 잘못된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반민특위 유가족들이 겪은 그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억울함과 모욕의 세월을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겠는가”라는 대목에서 눈물을 흘리기도 한 그는 “국회 부의장으로서 반민특위 바로알리기와 유가족을 위로할 수 있는 지원 방안을 함께 논의해 나가겠다”고 약속해 참석자들의 많은 박수를 받았다.

이날 행사에는 반민특위 출범의 정치적 후원자 격인 백범 김구 선생의 증손자 김용만 국회의원(하남을),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으로「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간상배에 대한 특별 법안」을 의결한 김규식 선생의 손녀 김수옥 여사를 비롯해 김옥자(김웅진 제헌의원 장녀), 김진원(김옥주 제헌의원 아들), 노시수(노일환 제헌의원 조카), 김홍현(김만철 특경대원 손녀), 강승우(강효영 조사관 후손) 님 등이 어렵게 한자리에 모였다. 기억행사를 빛내기 위해 무용가 장순향(전 한양대 교수), 가수 유주현, 기타리스트 강성우 님의 공연(노래 : 임진강, 뱃사공) 이후 참가자들은 걸어서 75년 전 반민특위를 습격한 중부경찰서 자리(서울 중구 수표로 27, 현재 신축 공사 중)로 이동해 “반민특위 명예회복” “경찰청장 공식사과” 등의 구호를 외치며 행사를 마무리했다.

이영국 회원은 “반민특위 명예회복의 구체적 조치로 국회의장단의 반민특위 후손 위로, 가칭 (사)반민특위기념사업회 국회 내 법인등록, 반민특위 국회 전시회 등 지속적 교육, 명예회복을 위한 국회 결의안, 경찰청장 공식 사과, 국회 내 반민특위 기념식수 및 조형물 설치, 국회 프락치 사건 조사를 위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신청 등을 고려 중”이라고 말했다. 아래는 기억행사에서 이영국 회원이 발표한 경과보고 내용이다.

• 방학진 기획실장


  • 1919년 11월 의열단은 창단과 더불어 ‘칠가살’(조선총독과 고관, 일본군부 수뇌, 대만 총독, 매국노, 친일파 거두, 적탐(밀정), 반민족적 토호열신) ‘오파괴’(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및 기타 왜적의 중요 기관) 명시
  • 1920년 2월 5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기관지 『독립신문』을 통해 ‘칠가살’을 선언(적의 괴수, 매국적, 고등정탐·형사, 친일부호, 적의 관리, 불량배, 모반자)
  • 1941년 11월 28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건국강령>에서 “적에게 부화한 자와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는 선거권, 피선거권 박탈 명시
  • 1945년 9월 3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당면정책)을 발표하며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와 매국적에 대하여는 공개적으로 엄중히 처분할 것”을 명시
  • 1947년 7월 2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장 김규식),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안」 의결
  • 1948년 7월 17일 제헌헌법 제101조에 “국회는 단기 4278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명시
  • 1948년 9월 22일 「반민족행위자처벌법」(법률 제3호) 제정
  • 1949년 1월 8일 반민특위, 박흥식을 제1호로 체포하면서 본격 활동
  • 1949년 5월~8월 반민특위 설립에 앞장선 소장파 국회의원 10여 명을 ‘남조선노동당의 프락치 활동을 했다’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거
  • 1949년 6월 6일 서울중부경찰서(서장 윤기병) 등 경찰들의 불법적 폭력에 의해 반민특위 강제 해산
  • 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 암살
  • 1951년 2월 14일 「반민족행위자처벌법」 폐지
  • 1991년 2월 26일 ‘1949년 친일파에 의해 와해된 반민특위의 정신’을 기치로 반민족문제연구소(현 민족문제연구소) 출범
  • 1999년 9월 20일 민족문제연구소, 시민 성금을 모아 반민특위 터 표석 설치(글씨 : 신영복)
  • 2004년 12월 29일 「일제강점하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 제정
  • 2005년 12월 29일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 제정
  • 2009년 11월 8일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발간
  • 2009년 11월 30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발간
  • 2010년 7월 12일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활동 종료
  • 2018년 4월~11월 민족문제연구소, 반민특위 설립 70주년 기념사업 진행(특강, 전시회, 답사 등)
  • 2018년 6월 20일 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 인장,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
  • 2018년 10월 국민은행 명동 본점 철거로 반민특위 터 표석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임시 이전
  • 2019년 6월 5일 반민특위 후손 모임, 우원식 의원과 함께 ‘경찰청장 공식 사과’ 요구 기자회견
  • 2020년 6월 6일 광복회, 서울중구경찰서 앞 인간띠잇기 행사를 통해 ‘경찰청장 사과’ 요구
  • 2024년 2월 17일 서울시, 반민특위 터 표지판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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