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 글방 14]
태평양전쟁에 휘말린 티니안의 한인들
김명환 선임연구원
32년 만의 귀향
1977년 5월 15일 오전 11시 40분 김포공항에 한인 유해를 실은 항공편이 도착하였다. 이들 유해는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때 강제동원되었다가 사망한 한인들이었다. 고향을 떠난지 32년 만의 귀향이었다.
유골이 수습된 곳은 북마리아나제도 티니안(Tinian). 유골은 김포공항 도착 3일 전인 5월 12일 티니안의 화장터에서 합동으로 화장되어 16개의 납골함에 수습되었다. 유골봉환 행렬은 티니안을 떠나 사이판, 오사카를 거쳐 김포공항에 닿았던 것이다.
공항에서 간단한 발인제를 지낸 후 유골은 한국사회사업대학(현 대구대학교) 학생 16명의 가슴에 안겨 충남 천안의 ‘망향의 동산’으로 옮겨졌다. 오후 2시 30분 위령제를 지낸 후 장미묘역에 마련된 무덤에 안장되었다.
티니안에서 한인유골이 발견된 경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전하고 있다.
남태평양지역에서 원혼이 된 희생동포에 대한 실태가 처음으로 알려진 것은 지난 76년 봄. 한국사회사업대학 재단 이사장 李永植 목사(85)가 괌도에 들렀다가 사이판섬에 인접한 티니안섬에서 수많은 한국인이 희생되었다는 말을 듣고 직접 실태파악에 나서면서부터였다. 티니안섬은 미군이 B-29에 최초의 원자폭탄을 장전,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끼(長崎)로 발진했던 기지였다. 李목사는 티니안島에 들러 현주민인 알폰소 S 보와 씨(51)를 찾았다. 그가 단체사냥을 나갔다가 밀림 속에서 글자를 알 수 없는 묘비를 발견했다고 전해들었기 때문이다. 李목사는 그를 앞세워 「朝鮮人之墓」라고 쓴 묘역을 찾아냈다. 묘지에서 녹이 슨 드럼통과 뼛가루가 든 항아리를 발굴한 李목사는 참혹하게 숨져간 동포들의 고혼을 달래기 위해 이들을 고국으로 옮겨 봉안하기로 했다.(????조선일보???? 1979년 8월 16일자, 南洋群島서 방황하는 「韓國人 冤魂」)
이영식 목사는 티니안의 정글 속에서 묘비와 드럼통 3개에 담긴 유골을 발견하였다. 묘비에는 「조선인지묘 1946년 5월 8일 오키나와현인 동지 미군정부 건립」(朝鮮人之墓 壹千九百四十六年五月八日 オキナワ縣人 同志 米軍政府 建立)이라고 쓰여 있었다. 해방 후 생존한 티니안의 한인들은 1946년 1월 모두 귀환하였다. 즉 묘비건립 당시 티니안에는 한인들이 없었으므로 대신 오키나와 사람들이 수습한 것으로 보인다. 유골봉환을 보도한 언론들은 ‘5천여’ 위(位)의 유해를 봉환한 것으로 기사를 썼다.
그렇다면 이들 유골의 주인공들은 무슨 연유로 티니안에 갔다가 죽임을 당한 것이었을까?
티니안의 한인들
티니안은 북마리아나제도를 구성하는 섬 중 하나로 사이판 남서쪽에 인접하여 있다. 사이판과는 불과 5㎞ 너비의 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다. 면적은 약 100㎢로 섬 전체가 평탄하여 농사짓기에 유리하였다. 이 점을 눈여겨본 남양흥발회사가 섬 전체를 농장으로 개발하고자 하였다.
남양흥발은 이미 사이판에서 제당업을 벌이고 있었는데, 인접한 티니안으로의 영업지 확대를 꾀하고자 한 것이었다. 티니안의 면적은 사이판보다 조금 작았으나, 섬 전체가 평탄하여 오히려 경지면적은 더 넓었다. 섬 전체는 4개의 소작농장과 7개 농구(農區)의 직영농장으로 구획되었고, 각 농장은 섬 남서쪽의 티니안정(町)에 있던 제당공장과 철도로 연결되었다.
1930년대 들어 티니안의 사탕수수 생산량은 사이판을 추월하였고, 사업이 번창하자 제당공장도 증설하였다. 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게 된 것이었다.
남양흥발은 티니안의 노동력을 주로 일본 본토와 오키나와에서 모집하여 충당하였다. 반면 티니안 거주 한인은 매우 적어서 1930년대 중반 대체로 30~40명가량이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1939년에 들어서며 극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남양흥발은 일본으로부터의 노동력 조달에 차질을 빚자 그간의 방침을 바꾸어 한반도로 눈을 돌렸다. 이에 조선총독부가 호응하며 대규모의 인력동원이 시작되었다. 그 영향이 티니안에도 미친 것이었다. 1938년 36명에 불과하였던 한인이 1939년에는 226명으로 늘어났다.
티니안의 한인들은 대체로 사탕수수 재배에 투입되었다. 사이판의 경우 일찍부터 번화한 지역이었으므로 한인 중에도 상업에 종사하거나 요정을 경영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에 비하여 티니안은 농장지대가 넓었고 한인의 유입도 상대적으로 늦었다. 이런 점을 감안하고 보면 티니안의 한인들은 대부분 농장에 속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티니안의 한인들은 거의 다 직영농장에 배치되었다. 직영농장에서는 남양흥발이 직접 노무자들을 관리하였다. 한인들은 주로 직영농장 7개의 농구 중 티니안정 인근의 송송농구, 섬 중서부의 카히농구 및 출루농구, 섬 북부의 니시하고이 농구 등에 배치되었다.
티니안의 한인들은 사탕수수 재배 이외에 회사에서 부여하는 일도 수행해야 했다. 수확철이 되면 사탕수수 수송도 담당하여야 했고, 인근 소작농장의 일손이 부족하면 파견도 나가야 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의 노동은 고됐다. 당시 직영농장 소속 한인 노무자 관리 기록을 살펴보면 한인들의 지출내역 중 약값이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전쟁에 휘말리다
티니안 거주 한인들의 처지가 급격히 악화된 것은 전쟁에 휘말리면서부터이다. 1944년 2월 23일 미군 기동함대에 의한 사이판공습 후 일본군은 사이판 및 티니안 방면의 군사력을 확충하는 한편 방비시설 구축도 서둘렀다. 육해군 병력이 크게 보강되었고 시설구축을 위한 군속들도 다수 배치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현지 주둔군은 군속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남앙흥발 소속 노무자들도 군사시설 구축에 동원하였다. 이제 농장에서 일하던 한인 노무자들이 비행장 공사장 및 군수품 운송 등에 투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군이 서두르는 만큼 노동강도는 더욱 높아졌다. 그리고 ‘그날’이 왔다.
1944년 6월 11일 동이 트자 하고이 주민들은 티니안 북쪽 바다에 가득 찬 미군 함정을 보았다. 수백 척의 함정에서 쏘아대는 함포에 사이판 남부해안은 지옥으로 변하고 있었다. 이윽고 6월 15일 미군이 사이판에 상륙하여 본격적인 지상전이 시작되었다. 이 모든 과정을 티니안 사람들은 지켜보고 있었다. 이들은 곧 다가올 자신들의 운명을 뼈져리게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7월 24일 섬 북서부 니시하고이의 출루해안으로 미군이 상륙하기 시작하였다. 사이판 함락 후 곧바로 티니안 상륙을 단행한 것이었다. 일본군은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을 당해내지 못하였다. 미군은 26일까지 섬 북부 하고이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30일에는 남서부 티니안정을 점령하였다. 8월 1일에는 섬 남쪽의 카롤리나스 고지대도 대부분 점령하였다. 당시 티니안에는 약 8,000명의 일본군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대부분 전사하였다. 8월 3일 미군은 전투종결을 선언하였다.
살아남은 사람들
티니안전투가 시작된 1944년 7월 당시 티니안 거주 한인의 규모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전시총동원체제기 인력동원을 주도한 일본정부 및 기업들이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전투가 치열했던 만큼 무수한 사람들이 희생되었을 것이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군인군속은 명부에 남기라도 했으나 민간인의 경우 어디에도 그 죽음이 기록되지 않았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약 1만 5천 명가량 있었다. 미군의 집계에 의하면 일본인 1만 3천여 명, 한인 약 2,500명이 살아남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최초의 포로수용소는 미군이 가장 먼저 확보하였던 하고이 지역에 설치되었다. 티니안전투 종결 후 미군이 하고이 지역에 대규모 항공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하였으므로 포로수용소를 섬 중서부의 출루 지역으로 옮겼다.
사이판에서와 마찬가지로 출루에서도 한인들은 일본인과 분리되어 수용되었다. 한인수용소는 출루의 일본인 마을이 있던 곳에 설치되었고, 일본인수용소는 한인수용소 북쪽 농장지대에 세워졌다. 사이판에서와 마찬가지로 수용소는 자치제로 운영되었다. 한국계 미국인 통역관이 매일 수용소에 출근하여 관리하였으나, 기본적인 행정 및 관리는 수십 명의 한인 근무원들이 담당하였다. 수용소에서는 미군이 부여한 노역에 종사하여야 했고, 그 대가로 급여를 지급받았다.
수용소에서는 한인의 지위가 일본인보다 높았다. 이토 히사오(伊藤久夫, 1934년생)의 증언에서 그런 정황을 엿볼 수 있다. 이토 히사오는 일본 후쿠시마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는 직영농장 출루농구사무소에서 근무하였다. 피난 중에 그의 부친이 가족과 떨어져서 생사를 알지 못하였는데 포로수용소 입소 후에야 재회하였다. 그의 부친은 미군에게 잡힌 후 군인으로 오인되어 군인포로수용소로 연행되었는데, 우연히 그를 아는 한인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가족이 있는 곳으로 올 수 있었다고 한다. 한인 지인이 직접 미군과 교섭한 결과였다고 한다. 이토에 의하면 일본인은 한인수용소에 들어갈 수 없었으나, 한인은 일본인수용소에 자유롭게 출입하였다고 한다.
수용소의 한인들은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하였다. 깨끗한 의복과 숙소가 제공되었고 적절한 노동과 급여를 받을 수 있었다. 안정을 찾은 이들 중에는 새로운 가정을 꾸리는 남녀도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연합군 사령부는 태평양 곳곳에 산재한 한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기 시작하였다. 티니안의 한인들은 1946년 1월 귀환길에 올라 미군이 제공한 LST에 분승하여 부산으로 떠났다. 1월 28일 마지막 귀환선이 758명을 태우고 티니안을 떠났다. 티니안에서 귀환선에 승선한 한인은 모두 2,577명으로 확인된다.
돌아오지 못한 영혼들
티니안에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다. 섬 전체가 전화에 휩싸였던 만큼 희생자의 규모도 컸을 것이다. 그러나 한인의 피해규모는 아직 알려진 것이 없다. 희생자 규모를 가늠해볼 자료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1976년 티니안 밀림 속에서 발견된 한인 유골의 규모에 대해 당시 언론은 ‘5천여’ 위(位)라고 보도하였다. 그러나 근거는 없다. 다음의 증언에서 그런 정황이 여실히 드러난다.
티니안 비에서 희생자를 5천 명으로 표현한 것은 정확한 고증 없이 이영식 목사가 당시 시장인 Mendiola씨의 말을 들어서 그리 된 것이라고 하였다. 미군들이 한국사람들의 유골을 모아서 수습하였는데 드럼통 3개에 집어넣고 매장하였던 것이며 이것은 아무리 해보아야 그 수가 5천 명이 될 수는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유골의 수집은 가족 중 죽은 사람의 뼈를 수집토록 미군이 시작한 것이며 드럼통 1개에만 뼈가 있었고 그 중에는 사람뼈는 아닌 것 같은 큰 뼈도 있었다고 했다.(권희영, 『해외의 한인 희생과 보훈문화』, 국학자료원, 2001.)
미국측의 추산을 근거로 하여 태평양 전쟁시기 티니안에 약 4,000명의 한인이 있었고 이중 약 1,200명이 희생되었다고 분석한 연구자도 있다. 그러나 분석에 쓰인 수치가 추산인 만큼 그 결과를 온전히 신뢰할 수는 없다. 요컨대 희생자의 규모를 산정할 구체적인 자료가 아직 확보되지 않고 있으므로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저 태평양전쟁 시기 티니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그들의 유해가 전후 32년간 밀림 속에 방치되어 있다가 극적으로 봉환되었다는 것이다.
유해봉환 후인 1977년 12월 13일 한국과 북마리아나제도연방의 여러 유지들이 힘쓴 결과 티니안 산호세 시내 서쪽 공원에 「평화기원 한국인위령비」가 건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참고문헌
『동아일보』, 『조선일보』, 『경향신문』
Don A. Farrell, Tinian, Productions, 1992.
伊藤久夫, 『慟哭のテニアン島』, 東京: 日本僑報社, 2004.
권희영, 『해외의 한인 희생과 보훈문화』, 국학자료원, 2001.
다큐멘터리 <태평양전쟁의 한국인들> 제작팀·이상아, 『태평양전쟁의 한국인들』 청아출판사,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