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피해자 중심주의, 인간미 넘치는 활동, 다음 세대로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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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피해자 중심주의, 인간미 넘치는 활동, 다음 세대로 잇다
– 강제동원 피해자운동 기록사진전 개막행사 ‘그날을 기억해’에 다녀와서

야스다 치세 保田千世, 야스쿠니 한국인 무단합사철폐소송 지원회

식민지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 벽면의 강제동원피해 소송 원고 가운데 300여 명의 얼굴 사진. 1945년부터 현재까지의 운동 연표에 이어 기획전시실 가득히 설명이 달린 기록 사진 패널. 그 공간에서 갤러리 토크가 열렸다.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이하 ‘보추협’) 공동대표가 이전 사무소에서 쫓겨나 종로의 오피스텔에 사무소를 빌려 운동을 시작할 당시 가장 힘들었을 때 낙원동 길 위에서 나눈 대화를 잊을 수 없다.

1990년대부터 교류를 계속해 오고 있어, 그 어려움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사과하는 나에게 희자 씨가 건넨 말. “인간은 운동만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에요. 사람과 사람으로 교류를 계속하고 있는 거예요.” 그로부터 이 십수 년 “포기하지 마라. 포기하면 지는 것이다”라는 이희자 씨의 말대로 참으로 많은 운동을 해내온 것이리라.

희자 씨의 말에 의지하여 그저 옆에 있기만 했던 것을 후회하며 새삼스럽지만 곱씹으며 기록사진을 보고, 이야기를 듣고, 포기하지 않고 줄곧 싸워오게 한 원동력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이번 사진전의 주역은 강제동원 피해자와 그 유족. 피해자와 유족들이 선두에 서서 운동을 전개하고, 변호사, 연구자, 민족문제연구소의 활동가들이 뒷받침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미 넘치는 활동. 낙원동 길 위에서 희자 씨가 건넨 말 그대로이다.

연구소를 찾을 때마다 많은 젊은 활동가들과 자원봉사자들의 모습을 보아 왔다. 고령의 피해자와 유족을 이어 다음 세대가 싸움을 시작하고 있다.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의 제정, 그리고 일본제철, 미쓰비시 중공업 히로시마, 후지코시 등의 기업을 상대로 한 재판에서 승소한 힘의 원천은 피해자 중 심주의, 인간미 넘치는 활동, 세대를 뛰어넘는 운동의 계승이 아닐까.

피해자 중심주의

대화 행사 중간에 사회자로부터 한마디 발언을 부탁 받은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김정주 할머니)는 휠체어를 탄 채 힘겨워하면서도 솟구치는 생각을 계속 이야기했다.

일본에 가면 일 하면서 공부할 수 있다고 했는데,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열두 세 살의 나이로는 견디기 힘든 가혹한 노동을 강요당하고, 간신히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고생한 것. 그리고 재판 투쟁 끝에 승리했지만, 후지코시는 왜 판결에 따라 직접 피해자에게 사죄하고 배상하지 않는가.

멈출 줄 모르는 듯 계속 말하는 피해자. 사회자가 다가간다. 보통이라면 다음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해 사회자가 피해자의 어깨를 품거나 마음을 진정시켜 발언을 끝낸다. 하지만 마이크를 손에 들고 피해자 앞에 선 사회자는 발언을 끊지 않고 계속 이야기를 들었다. 청중들은 한마음이 되어 피해자의 말에 계속 귀를 기울였다.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은 살아 있는 역사다. 피해자와 유족의 증언과 법정 의견 진술을 들으면 식민지배, 침략 전쟁, 황민화 정책, 천황제가 고통을 동반한 인간의 얼굴을 한 역사로 떠오른다.

피해자와 유족들이 처한 상황, 각자가 안고 있는 문제는 다르다. 기록이 없어 소송투쟁에 참여하지 못하는 피해자도 있다.

그런데도 자신의 문제뿐만 아니라 진상규명 특별법의 제정을 요구하는 1인 시위에도, 야스쿠니 합사 반대 집회에도, 기업 상대의 소송투쟁에도 참여하고 있다. 그 성과를 직접 피해당사자와 함께 기뻐한다. 그런 사진이 많이 있었다. 피해자와 유족들이 모든 투쟁의 선두에 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번 갤러리 토크의 발언자로 일본에서의 일본제철 소송과 야스쿠니 소송의 사무국을 맡아 30년 가까이 운동을 지원해 온 야마모토 나오요시(山本直好) 씨는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피해자의 오랜 고생에 비하면 자신이 해온 것은 작은 일이다”라고 말했다.

피해자와 유족을 대하는 한국 사무국 활동가의 자세와 몇 번 참여한 야스쿠니 소송 전날의 회의에서도 유족의 의견과 마음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 방침을 결정하는 모습을 보면 야마모토 씨의 말대로 피해자 중심 운동의 정신을 느낄 수 있다.

인간미 넘치는 활동

이번 갤러리 토크는 피해당사자, 지원자의 인간성을 느낄 수 있는 행사였다. 3부 구성 가운데 제1부에서는 사명, 인물, 돌파라는 주제어로 지금까지의 운동 속에서 마음 깊이 남아있는 기억과 추억을 발언자가 말했다. 의례적 인 집회 형식과는 달리 참가자들의 마음을 울리는 것이었다.

야마모토 나오요시 씨는 ‘만남과 감사’라는 말로 운동을 되돌아보며 일본제철 소송 피해자 원고와의 추억을 말했다. 장완익 변호사는 이희자 씨와의 만남부터 보추협의 공동대표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말했다.

야노 히데키(矢野秀喜) 씨는 운동 전체를 조감하면서 일본인으로서 죄송하다며 솔로몬군도 부겐빌에 버려진 한국인 병사 김씨에 대해 말했다.

이희자 씨는 이번 사진전을 준비하면서 가장 슬펐던 것은 함께 싸워온 동료들이 돌아가신 것이라고 말했다. 가족이 없는 김학순 할머니, 황금주 할머니와의 생전 약속대로 희자 씨는 매년 보추협의 피해자 유족들과 함께 ‘망향의 동산’으로 성묘를 간다.

그리고 어버이날(5월 8일)에는 유족들이 피해자의 추도식을 해왔다. 그 전날에는 유족 여성들이 희자 씨의 집에 모여 제사 음식을 만들었다. 나도 몇 번인가 참가했다. 음식을 만 드는 동안이나 끝나고 나서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모임의 중심이었던 남영주 씨가 돌아가신 것이 슬프고 쓸쓸하다. 일본의 여성지원자들은 일이 있을 때마다 묵으며 신세를 진 희자 씨의 집을 ‘희자 하우스’라고 불렀다. 이렇듯 피해자 유족들은 형제자매처럼 교류하며 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이번에도 그렇지만 보추협 집회에서는 참가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일본에서 야스쿠니 소송이나 집회에서도 참가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희자 씨와 유족들은 기억하고 다음에 만나면 인사를 건네주신다. 내 친구들은 이를 대단히 고마워하고 송구하게 생각한다.

이러한 것은 다른 운동단체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일이다. 문제 해결을 위해 지원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다른 단체의 대표자와 회의하는 것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보추협의 운동에는 참가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점에서 인간미가 넘친다.

세대를 뛰어넘는 운동의 계승

이번 행사 초대장에 “이미 떠나신 강제동원 피해자 어르신들은 강제동원 희생자 유족들에게 아버지 대신이었고… 강제동원 피해자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내 마음에 쌓이는 분노는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알려주시는 나침반이었 고 외롭고 힘들면 기댈 수 있는 언덕이었습니다”라고 희자 씨가 썼다.

희자 씨와 같은 피해자 유족은 피해자로부터 운동의 방식을 배웠다. 그리고 이제 그 유족의 투쟁을 피해자의 손주 세대가 잇고자 한다.

이날 갤러리 토크에서는 일본제철 소송 원고 이춘식 씨의 따님과 아드님, 미쓰비시 히로시마 소송 원고 고 정창희 씨의 아드님이 고령으로 투쟁이 어려워진 피해자의 운동을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고등학생들이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견학하는 것을 보기도 했다. 민족문제연구소에는 젊은 활동가들이 늘고 있다. 젊은 세대에게도 운동은 계승되어 갈 것이다. 세대를 뛰어넘어 운동이 이어질 것이다.

마치며

1994년 11월, 도쿄의 중의원 회관 앞에서 하얀 치마저고리 상복 차림의 희자 씨가 “전쟁 희생자의 생사 확인, 유골의 발굴과 송환, 유족의 현지 위령 실시, 강제연행 자료 공개”라고 굵은 글씨로 쓴 요구사항을 걸고 있는 커다란 사진이 기록사진전의 시작을 장식하고 있다. 늦가을 얼어붙는 노상에서의 밤샘 단식투쟁 현장에 나도 참가했다.

그러나 당시의 요구 가운데 일부는 유족의 운동으로 실현되었지만, 아직도 기록을 찾지 못한 유족이 많고, 유골 반환을 위한 DNA 감식에서 한국인 유족은 제외되고 있으며, 일본 정부의 현지 위령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희생자의 기록 조사, 유골 발굴과 반환 운동에 힘쓰고 있는 선배 여러분의 활동을 따라가자. 어떤 때라도 싸우는 피해자 여러분 옆에 있자. 나 자신에게는 힘이 없다며 포기하지 말고 가해국의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가자.’ 개막행사 내내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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