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외교 실패가 부른 국권 피탈과 망국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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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마당]

외교 실패가 부른 국권 피탈과 망국의 교훈
130년 전 한반도에서 벌어진 청일전쟁 현장에서 보는 오늘

박진우 수원지역위원장

풍도에서 이루어진 청일전쟁을 강의하는 서강대 조재곤 교수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을 자국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한반도에서 전쟁을 치른 지 130년. 첫 전투가 있었던 서해안에 있는 작은 섬 풍도(안산시)를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최하고 은평구청이 후원하는 1박 2일 답사를 다녀왔다.

영국에서 수상(11년), 외무장관과 전쟁(국방)장관 등을 역임하면서 중국과 아편전쟁까지 강행한 보수주의자 팔머스톤 경 헨리 존 템플(Viscount Palmerston, Henry John Temple)은 “우리에겐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다만 영원한 것은 국가의 이익일 뿐”이라는 외교 동맹의 의미를 통해 외교의 본질을 설명했다. 일반적으로 동맹은 현재와 미래의 적의 위협을 억제하고 국가의 방위 능력을 높이기 위해 결성한다. 동맹에 참여한 국가는 동맹의 대가로 부담해야 하는 비용보다 이익이 클 때 동맹을 맺는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12개 국가가 결성한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 1949)는 현재 32개 국가가 참여하고 있는데 소비에트연합을 중심으로 결성된 바르샤바조약기구(우호협력상호원조조약, 1955)에 참여했던 체코,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등도 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하면서 어제의 우방이 오늘의 적국이 되는 현실이다.

130년 전 풍도(안산시) 앞 바다에서 청일 양국의 함대가 격돌했고 성환(천안시)에서 육상 전투가 치열했던 청일전쟁 당시 조선의 외교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1882년(임오년)에 훈련도감 소속 구식 병사들이 부당한 대우(급료 미지급, 모래 섞인 쌀 지급 등)에 항의하며 봉기를 일으키자 고종은 청나라를 끌어들여 이들을 진압했다. 군란을 진압한 청나라는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며 왕권을 위협하였고, 병사들은 주민을 괴롭히고 상권을 흔드는 횡포가 심해지자 젊은 개화파 지도자들이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처럼 조선의 불공평한 사회제도와 부패한 정치체제를 개혁하고자 일본공사관과 합의하여 갑신정변(1884)을 일으켰으나 3일 만에 진압되었는데 이때도 고종이 청나라를 불렀다.

조선에 주둔한 청나라와 일본이 잦은 전투를 벌이자 영국이 중재하여 체결한 톈진조약(天津條約, 1885)은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으로부터 군대를 철수하고(1조), 한쪽이 파병 할 경우 상대방에 통보한다(3조)며 조선내에 자국 군대 주둔 협정을 체결했다.

조정의 부정부패가 극도로 심해지고 외세에 의해 나라가 흔들리게 되자 척양척왜, 보국안민, 제폭구민을 외치며 농민들이 봉기(1894년 음력 1월)하였는데 고종은 또 청나라를 불러들였고, 일본은 호기로 삼아 경복궁을 점령한 후, 풍도 앞바다에서 청나라 수군을 격파, 이어 성환에서도 일본 육군이 대승하며 기선을 제압한 후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다. 그리고 조선 군대를 앞세워 동학농민군들을 토벌했다.

고종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청나라를 끌어들여 진압하였지만 일본은 한반도에서 청나라와 전쟁을 치러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 1895)으로 승리를 확인하였고, 청나라는 조선이 완전한 자주독립 국가임을 인정하자 일본은 조선의 식민지화에 돌입하게 된다.

을미년(1895)에 명성왕후가 일본에 의해 시해되자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을 감행하여 러시아에 의존하였다. 러시아는 일본에 조선의 중립화를 제안(1901)하지만 거절하고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견제하던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얻어 제물포와 뤼순(旅順)에서 러시아 함대를 공격하며 러일전쟁(1904)에서 승리한다.

다급해진 대한제국의 고종황제는 조미수호통상조약(1882, 구미 나라와의 최초 조약)에 있는 거중조정(제3국이 한쪽 정부에 부당하게 또는 억압적으로 행동할 때에는 다른 한쪽 정부는 원만한 타결을 위해 주선한다)을 들어 미국에 손을 내미나 미국은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The Katsura-Taft Agreement)을 통해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한반도 지배권을 인정하면서 조선은 망하고, 일본에 35년 동안 식민지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1950년 미국과 소련의 냉전체제하에서 발생한 한국전쟁 휴전 후 1953년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후 70년을 넘기며 ‘포괄적 전략동맹’까지 왔다.

고종이 의지했던 청나라(중국)와 러시아를 견제하며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킨 일본,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조선의 식민지를 승인한 미국과 오늘 우리는 군사전략동맹을 맺고 있다.

지난해 이종섭 국방부장관과 만난 로이드 오스틴(Lloyd Austin) 미 국방장관은 “한·미동맹은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혈맹(血盟)이자 동북아 안보의 핵심축이고,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다”라고 밝혔다. 얼마 전 러시아 푸틴(Vladimir Putin) 대통령이 한국에게 “불행히도 현재 무역과 경제 관계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받고 있지만, 지난 수십년 간 달성한 관계를 복원하길 바란다. 협력을 지속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외교는 자국의 이익을 보장받기 위해 정치와 경제, 그리고 문화를 포함한 다양한 방법을 통해 외국과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냉정한 활동이다. 그리고 국가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어제까지의 우호관계를 단절하거나 적대시 해온 상대국과도 흔쾌히 수교하여 손을 잡을 수 있어야 한다.

2023년 물난리에 대민 지원을 나간 채수병 상병이 실종 사망했지만 정부는 정치적 책임을 외면하고 있고, ‘채상병 특별법’에 대한 거부권 행사로 법률적 책임도 거부했다. 국가의 부름을 받아 훈련받던 병사가 규정 위반 훈련과 수류탄 훈련 중 죽임을 당했다. 육군과 공군 장교도 자살하여 한국 군대는 더욱 혼란스럽다.

휴전선을 두고 남과 북은 서로를 비방하는 전단지와 오물을 풍선에 띄어 살포하여 전쟁이 날 것 같은 불안감이 지속되고, 외교는 미국과 일본에 일방적으로 끌려가고 있다.

130년 전 풍도 앞바다에서 발생한 청일 해전의 현장에서 윤석열 정부의 외교와 국방을 다시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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