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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하와이 교민들은 왜 한국 야구대표팀 투수를 무릎 꿇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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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박석윤

▲ 1920년 8월 2일 자 <동아일보>에 소개된 박석윤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미국 프로야구선발팀과 대결한 친일 투수가 있었다. 조선대표팀과 미 프로선발팀의 시합이 열린 1922년 12월 8일 발행된 <조선일보>는 “북미합중국직업야구단”의 방한을 보도하는 2면 좌하단 기사에서 “작일 하오 7시 50분 남대문착(着) 열차로 입경하야 금일에 전조선군(全朝鮮軍)과 전투를 개시할 예정”이라고 한 뒤 “중앙체육단의 박석윤”을 거명했다.

조선 제일의 투수

마이너리그 트리플A 선수들이 주축인 미국 선발팀에는 메이저리그 선수도 3명 있었다. 만만치 않은 이 팀과 “전투를 개시할” 전조선군 투수는 24세의 친일파 박석윤이었다. 나중에 나이가 더 들어서 친일파가 된 게 아니라 이때 이미 친일파였던 인물이다. 근대 문헌들과 관련된 학술지인 <근대서지>의 2016년 제14호에 실린 홍윤표 OSEN 선임기자의 기고문 ‘납·월북 체육인들에 대하여’는 1922년판 한·미 올스타전의 결과를 이렇게 설명한다.

“당시 조선대표팀은 미국선발팀과의 대결에서 3-23으로 완패했다. 비록 처참하게 지기는 했지만 그 경기에서 조선팀의 실책이 10개나 됐던 점을 감안한다면, 완투했던 박석윤이 나름대로 선전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박석윤은 조선 제일의 투수였다. 생업은 영어교사일 때도 있고 기자일 때도 있고 외교관일 때도 있었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 박석윤 편은 “1923년 4월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취직해 영어교사 겸 야구부 코치로 근무했다”라며 “1924년 3월부터 6월까지 <시대일보> 정치부 기자를 지냈다”고 설명한다. 외교관 활동은 이 이후에 나타난다.

박석윤은 선수뿐 아니라 지도자로도 명성을 날렸다. 휘문고보 코치가 된 1923년에 그의 팀은 고시엔(갑자원)대회 조선 예선전에서 전원 일본인들로 구성된 팀들을 제치고 우승했다. 그런 뒤 일본에서 열린 고시엔 본선에서 8강에 올랐다.

<한국체육사학회지> 제28권 제4호에 실린 이종성 한양대 교수의 논문 ‘휘문고보의 고시엔 야구대회 8강 진출의 역사적 의미’는 고시엔 한국 예선에서 한국팀이 우승한 것도 이때가 처음이고, 전원 한국인으로 구성된 팀이 본선에 진출한 것도 이때가 처음이었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야구 분야에서는 반일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던 박석윤이 정치 분야에서는 친일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한국 야구의 희망이었던 박석윤은 “최남선의 여동생인 최설경의 남편”이다. 1898년 10월 26일 전라도 담양에서 출생한 뒤 6세 때 서당에 들어가고 9세 때 담양 청평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갔다. 13세 때 중앙학교에 입학한 그는 1911년인 그해에 일본 유학을 떠나 도쿄 제일중학교, 죠사이중학교, 교토 제3고등학교를 거쳐 도쿄제국대학 법률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전에 그는 이미 친일파가 되어 있었다. 1993년에 발행된 <친일파 99인> 제2권에 실린 장세윤 당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의 논문 ‘박석윤: 항일무장투쟁 세력 파괴·분열의 선봉장’은 “조선총독 사이토의 참모인 아베에게 포섭된 그는 3·1운동 직후부터 부일배가 되어 민족운동가 김준연의 전향 공작을 벌였지만, 이 공작은 실패로 돌아갔다”라며 그가 총독부의 도움으로 도쿄제국대학을 다녔다고 말한다. 야구 잘하는 법대생이 그런 일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야구 잘하는 법대생? 밀정이거나 프락치

▲ 1923년 7월 28일자 동아일보 기사. 당시 박석윤이 감독을 맡은 휘문보고가 고시엔대회 조선예선에서 우승을 거두고 찍은 사진.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그는 총독부의 수당을 받아 1925년에 케임브리지대학에 유학했다. 젊은 시절부터 친일 재산을 받아가며 밀정이나 프락치 역할을 했던 것이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6권 박석윤 편은 하와이 교민들이 박석윤·박석기 형제를 일본 밀정으로 의심한다는 1924년 8월 28일자 <신한민보> 기사를 소개한다. 야구 잘하는 법대생의 정체가 일찍부터 노출됐던 것이다.

서른 살이 넘은 1930년대의 박석윤은 친일 성향을 더 이상 감추지 않았다. 1930년에는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의 부사장이 되고, 1931년에는 친일 친목단체인 동우구락부의 총무간사가 되고, 1932년에는 만주지역 친일화를 위한 민생단 조직에 참여했다.

그의 친일은 스케일이 계속 커져갔다. 1934년에는 만주국 국무원에서 촉탁 신분으로 근무하고 1937년에는 만주국 국무원 외무국의 조사처장이 됐다. 1939년에는 바르샤바주재 만주국 총영사가 되고, 1940년에는 만주지역 항일세력을 무너트리기 위한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의 총무가 됐다. 일본 괴뢰국인 만주국의 녹봉을 받으며 이 지역 항일세력 탄압에 가담했던 것이다.

박석윤의 친일 인생에서는 세 번의 ‘정치적 도루’가 발견된다.

그가 바르샤바총영사로 있던 때에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이때 그는 첫 번째 도루에 나선다.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폭격하자 폴란드를 탈출해 이탈리아·리투아니아 등을 시찰한 후 만주국의 귀국명령을 받고 베를린·모스크바 등을 거쳐 1940년 6월 신징으로 돌아왔다”고 <친일인명사전>은 말한다.

만주국 수도인 오늘날의 창춘(장춘)에 귀환한 그는 만주국 외교부 참사관으로 근무하던 1945년에 두 번째 도루를 감행한다. “1945년 5월 일본의 패전이 예상되자 조선에 돌아와 은둔”했다고 사전은 말한다. 그런 뒤 반일 지도자인 여운형을 찾아간다. “8월 해방 직전 조선총독부가 여운형에게 행정권을 넘겨줄 뜻을 밝히자, 여운형과 접촉하여 전후처리문제를 교섭”했다고 사전은 말한다.

세 번 변신 시도하다, 북한에서 비참한 최후

두 차례의 도루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지만, 세 번째는 달랐다. 통일적인 한국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이 개최(1946.1.16)되고 본회담이 무기한 휴회(5.6)에 들어가는 1946년 상반기는 한반도가 분단될지 통일될지 정확히 예측하기 힘든 때였다. 바로 이 시기인 그해 3월, 그는 질병 치료를 이유로 평양을 방문한 뒤 평남·함남·강원이 만나는 평남 양덕군으로 올라간다.

위 홍윤표 기고문은 “박석윤은 해방 뒤 1946년 3월 평양을 거쳐 지병인 고혈압과 동맥경화를 치료하기 위해 양덕온천으로 요양을 갔다고 전해진다”고 말한다. 해방 전후에 서울의 여운형과 접촉했던 인물이 미·소 회담 기간에 이북 깊숙이 들어간 것이다.

이는 그가 친일청산에 노출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해 7월에 그는 양덕군에서 친일분자라는 이유로 체포돼 양덕보안소에 구금됐다가 석방됐다. 1947년 2월에 다시 체포된 그는 1948년 1월 평안남도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상소가 기각돼 동년 6월에 사형이 확정됐다. 한국전쟁 중인 1950년 10월에 사망했다.

26세 때인 1924년에 박석윤은 한국대표팀을 이끌고 하와이를 방문했다. 위 기고문은 “현지 교민들이 어느 날 그를 해변으로 불러내 꿇어앉힌 뒤 모래밭에 칼을 꽂아놓고 친일 행각을 반성하고 자결을 하라고 강요”한 일화를 소개한다. 이때 그는 동생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마침 그와 함께 끌려갔던 동생 박석기가 그 칼을 집어들고 제 가슴을 X자로 그어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내면서 형의 결백을 주장한 덕분에 곤경을 모면했다는 일화도 있다.”

세 번째 도루 때는 이런 요행이 일어나지 않았다. 서울에 정착했다면 친일청산기구인 반민특위에서 잠깐 고생하다가 끝났을 그는 이북으로 요양간 일이 화근이 돼 친일청산의 대상이 되고 52세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김종성 기자

<2024-07-14>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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