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2]
재한군인군속재판의 요구실현을 지원하는 모임
활동가를 만나다
김선영 학예연구사
2024년 7월 6일 강제동원 피해자운동 기록사진전의 연계행사인 자료기증교류회가 개최되었다. 기증자는 재한군인군속재판의 요구실현을 지원하는 모임(2001년 결성, 이하 군군재판지원모임)의 후루카와 마사키(古川雅基) 님, 기무라 아야코(木村章子) 님, 쓰카모토 미쓰노리(塚本光則) 님이다.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과 함께 꾸준히 활동 중인 세 분을 만나 군군재판 지원 계기와 그 의미에 대해 알아보았다.
•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오늘 일본 간사이(關西) 지역에서 활동하시는 세 분께서 함께 민족문제연구소를 방문해 주셨는데, 한 분씩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후루카와 저는 후루카와 마사키라고 합니다. 군군재판지원모임의 초기부터 사무국장을 맡았습니다.
쓰카모토 저는 쓰카모토 미쓰노리입니다. 저도 군군재판 초기부터 ‘서포터(supporter)’ 중 한 명으로 함께 하고 있습니다.
기무라 오사카에서 온 기무라 아야코라고 합니다. 저도 재판이 시작될 때부터 스스로 ‘서포터’라고 부르며 활동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어느덧 25년이 되었네요.
• 군군재판지원모임에 대해서 소개해 주시겠어요?
후루카와 네. 이 모임의 목적은 군군재판에서 이기는 것입니다. 2001년 6월에 제기한 1차 소송만 해도 원고가 252명이나 되는 대규모 재판이었습니다. 야스쿠니신사 합사, 시베리아 억류, BC급 전범 등 수많은 피해자 재판이 있습니다. 재판에서 어떠한 요구를 해야 할 지 저희가 먼저 공부했습니다. 추가 제소 때는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들이 많이 들어가서 총 414명이 되었습니다. 재판 결과는 굉장히 안타깝습니다만, 재판은 끝났어도 피해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으니 계속해서 원고를 지원하고 활동하자는 취지로 이 모임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 세 분 각각 군군재판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으실 것 같은데, 어떻게 참여하게 되셨나요?
후루카와 2000년 즈음에 야노 히데키(矢野秀喜, 제4회 임종국상 수상자)씨로부터 일본강관(日本鋼管) 소송에서 승소하신 김경석이라는 분과 만나보지 않겠냐고 제안받았어요. 김경석 씨를 만나자마자 “후루카와 씨, 그 전쟁으로 일본에 끌려간 남편을 아직도 기다리는 아내들이 지금 한국에 많이 있어요. 생존자나 유족들의 재판을 해주시지 않겠습니까?”라는 말씀을 듣고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쓰카모토 저는 세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 고등학교 때 일본인인 줄 알았던 친한 친구가 본인이 한국인이란 것을 밝혔던 일입니다. 왜 한국인이 일본에 살고 있는지 알고 싶어 박경식씨의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이라는 책을 읽고 역사를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고등학교 교사가 되어 많은 재일동포 학생들을 만나 한국 본명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 것들이 바탕에 계속 깔려 있었어요. 마지막으로 이희자 씨가 일본의 큰 모임에 방문하셔서 “여러분에게는 가족이 있지만, 저는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해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일본으로 끌려가서 그대로 다시는 만나지 못했어요. 이런 고통을 여러분은 아십니까?”라고 말씀하시는 걸 듣고 재판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기무라 저도 히가시오사카시(東大阪市)라는 재일동포 분들이 많이 계신 곳의 초등학교에서 정년까지 교사 생활을 했습니다. 당시 시청에서 일하던 직원이 전쟁 피해를 입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러 가자고 하여 정상근 씨 댁으로 갔습니다. 그는 일본인에게 여러 가지 자료를 보여주면서 자신이 겪은 일을 이야기해 주셨는데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그러한 만남은 있었지만 재판에는 거의 지식이 없는 상태로 참여했습니다. 김경석 씨를 만나 과거 일본이 저지른 이야기를 들었고, 재판을 진행하면서 공부했습니다.
• 군군재판지원모임에서 각자 맡으신 역할이 궁금합니다.
쓰카모토 저희들은 소송을 제기할 때 여러 가지 각자 분담해서 조사하고 공부했습니다. 홈페이지에 「원고를 알아보자」라는 코너를 만들어서 그분들의 목소리를 싣기도 했습니다. 후루카와 씨는 『미래로 향한 가교』라는 뉴스레터를 편집하고 제가 그것을 홈페이지 형태로 바꿔서 게재하고 있고 지금까지 총 96호까지 발행했습니다. 그리고 기무라 씨는 회계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 군군재판 활동을 하시면서 아쉬운 점은 없으셨나요?
후루카와 가장 안타까운 것은 역시 ‘개인정보의 벽(개인정보 수집의 한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일본 정부에 정보 공개를 요구하면 (자료에) 검은색으로 칠해져 돌아옵니다. 좀 더 빨리 재판을 시작할 수 있었다면 좀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20년만 더 빨랐다면 뭔가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아쉬움이 항상 듭니다.
• 이번 자료기증교류회에서 기증해 주시는 자료들에 대해 소개해 주시겠어요?
후루카와 작년 10월에는 영화 『안녕, 사요나라』(2005년)의 전단, 포스터, 예고편 DVD, 신문기사 등을 기증했는데, 이번에는 기록사진전 관련 사진과 영상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1995년 한신·아와지대지진 당시 이희자 씨와 처음 만났을 때 찍은 사진도 있습니다.
• 한일과거청산운동을 기록하는 운동에 동참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마무리하며 마지막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에는 일본의 20, 30대 젊은 층의 방문이 많은데요, 일본 미래세대에 바라는 점이 있으시다면 한 말씀해 주시겠어요?
기무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젊은 사람들이 온다는 것이 정말 신기하다고 해야 하나, 일본에서는 그런 이야기(식민지 역사)를 할 수 있는 장소가 없는 것 같아요.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방문했던 일본 사람들이 서로 연결된다면 정말 흥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국을 방문해 일본 역사를 알게 된 젊은이들이 일본에서 고립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고민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일본에는 그런 젊은이들의 목소리를 모을 수 있는 환경이 별로 없는 것 같아서요. 젊은 사람들의 움직임이 생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네. 긴 시간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것으로 인터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