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척화비(斥和碑), 위정척사의 상징 혹은 박해와 순교의 증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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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척화비(斥和碑), 위정척사의 상징 혹은
박해와 순교의 증거물

이순우 특임연구원

서울 용산구 청파동2가에 있는 식민지역사박물관과 나란히 이웃하는 자리에 터를 잡고 있는 한국순교복자수녀회(韓國殉敎福者修女會, 1946.4.21일 개성에서 설립 이후 1950.3.9일 서울 청파동으로 이전)에는 드물게 구경할 수 있는 근대문화유산 한 점이 보관되어 있다. 지난 2022년 10월 13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 화재 제534호로 지정된 ‘척화비’가 바로 그것이다. 문화재지정을 위한 사전조사자료에 따르면, 이 비석의 원래 위치는 “강원도 횡성읍 읍상리 횡성성당 정문 앞 개울에 버려져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 바 있다. 따라서 이 비석은 엄밀하게 말하여 ‘횡성 척화비’로 명명되는 것이 더 합당한 일이 아닌가도 싶다.

이곳의 척화비가 정확하게 어느 시기에 한국순교복자수녀회로 수습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미처 자세히 탐문해보지 못하였으나, 우선 아주 오래전 세종문화회관 대전시실에서 열린 가톨릭조선교구설정 150돌 기념 가톨릭미술전 및 교회사자료전(1981.9.6~9.12)에 전시유물로 출품된 사실이 드러난다. 그리고 이보다 앞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고종시대사 1』(1967)을 보면, 571쪽 부분에 ‘도판 제21도 척화비’ 사진자료로 종로 척화비(경복궁 근정전 회랑)와 더불어 ‘횡성 척화비(장소미상의 실내공간)’의 모습이 나란히 수록된 것이 확인된다. 이러한 사실에 비춰 보면 이 척화비는 이미 반세기 훨씬 이전에 서울로 옮겨진 상태였다는 것을 가늠할 수 있다.

지금의 시점에서 전국 각처에 흩어져 있는 옛 척화비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 수량은 대략 36 기(基; 복제품은 제외) 안팎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들 가운데 현재 지방문화재(향토유적 포함)로 지정 관리되고 있는 것이 21기이며, 나머지는 모두 비지정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는 상태이다. 비석의 생김새는 다 제각각이지만, 여기에는 대개 붉은 글씨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새겨지는 것이 보통이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서양오랑캐가 침범하는데도 싸우지 않음은 곧 화친하자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팔아먹는 짓이다)
戒我萬年子孫(우리들 만년 자손에게 경계하노라)
丙寅作 辛未立(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

척화비의 첫 등장에 대해서는 『고종실록』고종 8년(1871년) 4월 25일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정리되어 있다.

…… 하교하기를, “이들 오랑캐가 화친하려는 바가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으나, 수천 년 예의(禮義)의 나라로서 어찌 견양(犬羊, 하찮은 것)과 더불어 화친할 수 있겠는가? 비록 몇 해를 서로 대립하더라도 필시 철저하게 끊고야 말 것이다. 만약 화친이란 글자를 말하는 자가 있다면 마땅히 나라를 팔아먹은 율(律)을 시행할 것이니라.” 하였다. 홍순목(洪淳穆)이 아뢰기를, “우리가 동쪽의 예의를 지키는 나라라는 것은 온 세상이 다 아는 바입니다. 하지만 지금을 보아하니 일종의 음사(陰邪)의 기운이 사방에 해독을 끼치고 있으나 오직 이곳 청구(靑邱, 우리나라)만이 홀로 간정(乾淨)을 보존하는 것은 참으로 예의를 지켜온 것입니다. 이런 고로 병인년(1866년) 이후로 양추(洋醜, 서양놈)를 양척(攘斥)하였고 또한 천하의 찬사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이들 오랑캐가 이처럼 침범한다면 화(和, 화친)라는 한 글자는 결단코 논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그들이 하고자 하는 바를 억지로 들어준다면 나라가 어찌 하루인들 나라라 하겠으며 사람이 어찌 하루인들 사람이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 성상의 하교가 엄정한 만큼 먼저 부월(鈇鉞, 정벌)의 위엄을 보이시면 무릇 그 함생(含生, 중생)의 윤리가 모두 하늘의 병이(秉彝, 타고난 천성)를 갖추고 있는 이상 누군들 감히 우리 성상께서 곽벽(廓闢, 크게 물리치는 것)하려는 대의(大義)를 우러러 받들지 아니 하겠나이까? 또한 저 적들도 이 소리를 듣는다면 담파골한(膽破骨寒, 몹시 놀라 뼛속까지 으스스한 것)할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오늘 경연(經筵)에서 한 말은 조지(朝紙)에 내어 두루 배포토록 하라.” 하였다. [이때, 종로거리 및 각 도회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웠다. 그 비문에 이르기를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이라 하였다.]

여기에 서술된 내용은 진무중군 어재연(鎭撫中軍 魚在淵, 1823~1871)과 어재순(魚在淳, 1826~1871) 형제를 포함하여 조선군인 53명의 전사자와 24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는 ‘광성보전투(廣城堡戰鬪)’가 일어난 바로 그 다음 날의 기록이다. 여기에서 보듯이 척화비의 건립 자체는 거듭된 ‘양요(洋擾)’의 발생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등장한 척화비는 그 이후 존속기간이 10년 남짓에 불과한 채로 역사의 전면에서 홀연히 사라지게 된다. 이는 임오군란(壬午軍亂)의 발생에 따라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 1882년 7월 17일 체결)의 협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일본국 판리공사(辦理公使)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1842~1917)의 요구에 대해 조선국 정부가 이를 즉시 철폐하기로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신미양요 당시 미국군함과 해병에 의한 전투상황과 해 당일자가 표시된 강화도 지형약도이다. 여기에 표시된 ‘포트 맥키’, ‘포트 모노카시’, ‘포트 뒤 콩데’는 각각 ‘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을 가리킨다. [그리피스(Wil liam E. Griffis, 『코리아, 은자의 나라(Corea, The Hermit Nation)』, 1882]

이와 관련하여 『고종실록』 고종 19년(1882년) 8월 5일의 기사에는 이른바 ‘척양비(斥洋碑, 척화비)’가 훼철되는 경위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 저번에 난화(難化, 교화가 어려움)한 자들을 익히 보았고 백성들의 마음이 정처 없더니 마침내 6월의 변(變, 임오군란)이 일어나 이웃 나라의 신의를 잃었고 천하에 웃음거리가 되었으며, 국세(國勢)가 날로 급업(岌嶪, 높고 험한 것)하여 배관(賠款, 배상금)이 거만(鉅萬)에 이르렀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으랴?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일찍이 우리를 모질게 하고 업신여기며 화호(和好)에 어긋난 적이 있었던가? 그러나 다만 군민(軍民)의 망령으로 의조(疑阻, 의심)가 생겨나 분노를 쌓아 품고 이와 같이 무고(無故)히 먼저 범(犯)하게 되었으니, 너희들이 생각하기에 그 잘못이 누구에게 있었던고?

이제 다행스럽게도 일처리가 대강 이뤄져서 예전의 우호가 다시 펼쳐지게 되었으며, 그리고 영국과 미국 등 여러 나라들이 또한 장차 뒤쫓아 와서 조약을 맺고 통상을 하게 되었다. 이는 바로 만국의 통례(通例)이지 우리나라에서 처음 행해지는 것은 아닌 즉, 결코 놀라고 소스라칠 일이 아니다. 너희들은 각기 안심하고 두려워 말며, 선비는 공부에 힘쓰고 백성은 평안히 가색(稼穡, 경작)하면서 다시는 ‘양(洋)’이니 ‘왜(倭)’니 떠들며 서동소와(胥動騷訛, 와전된 소문을 퍼뜨려 소동을 일으키는 것)치 말지어다. 각 항구 근처에서 비록 외국인이 한가로이 다니더라도 마땅히 예사로 보아 일상의 일로 삼으며 혹여 먼저 건드리는 일이 없도록 하고, 만약 그쪽에서 능학(凌虐)하는 일이 있다면 마땅히 조약을 살펴 징판(懲辦, 응징)하므로 결코 우리 백성을 억눌러 외국인을 보호하는 일은 없을 것이로다.

오호라! 우둔하면서도 제멋대로 인 것은 성인(聖人)이 경계한 바이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비웃는 것은 왕법(王法)에서 주(誅, 주살)에 해당한다. 가르쳐주지도 않고 형벌을 주는 것은 백성을 기망하는 일이므로 이에 여술(臚述, 나열)하여 통유(洞諭)하노라.

또 이미 서양 나라와 수호(修好)한 즉, 경외(京外, 서울과 지방)에 세운 바 있는 척양비각(斥洋碑刻)은 시조(時措, 시기에 맞는 조처)가 달라진 만큼 함께 뽑아버리도록 하라. 너희들 사민(士民)은 각기 이 뜻을 잘 헤아릴 것이로다.” 하였다.

의정부(議政府)로 하여금 게시하고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 행회(行會)토록 할 것을 명하였다.

어차피 쇄국(鎖國)에서 벗어나는 마당에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게 된 경향 각지의 척화비는 한꺼번에 뽑혀 사라지거나 줄지어 두 동강이 나는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중에는 더러 지방(地方)의 형편에 따라 이 과정을 용케도 모면한 경우도 있었을 테고, 한번 매몰처리 된 것이긴 하지만 한참 세월이 흘러 어찌어찌 재발견된 사례가 있었을 것인데, 지금 남아 있는 척화비들은 대개 이러한 범주에 속하는 것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가운데 — 이를테면 ‘으뜸’ 척화비라고 할 수 있는 — 서울 종로거리에 설치되었던 비석의 행방은 어찌되었을까? 이에 관해서는 정교(鄭喬, 1856~1925)가 남긴 『한국계년사(韓國季年史, 대한계년사)』 권지일(卷之一), 고종황제 8년 신미(辛未)항목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도성 큰 거리에 척화비를 세우다[立斥和碑于京師通衢].
[고종] 3년 병인(丙寅) 이래 대원군은 오로지 척양(斥攘)의 뜻을 높여 서교인(西敎人) 20여 만을 주살하고 외국을 경모(輕侮)하며 연해 각처에 포대를 쌓았다. 이때에 이르러 돌을 캐어 종가(鍾街; 거리는 경성 중앙에 있으며 종각에 세워 큰 종을 걸어두고 밤을 알려주었으므로 ‘종가’라 이른다)에 비석을 세웠다. 그 비면에 써서 이르기를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이라 하고 또 그 옆에 두 줄로 작은 글씨를 썼는데 그 하나는 “戒我子孫萬年”이고 다른 하나는 “丙寅作 辛未立”이다. 그 뒷면에는 “衛正斥邪之碑”라고 썼다. 또 먹을 만드는 곳에 명하여 묵면(墨面)에 열두 자(즉, 양이침범 등의 글자)를, 뒤쪽에는 “衛正斥邪之墨”을 새기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척화의 뜻을 알도록 했다. 나중에 구미각방(歐米各邦)과 더불어 통상(通商)을 하게 되자 조정에서 그 비석을 넘어뜨리기로 논의하였다. 지금은 종가 뒤 남변(南邊)의 소호동(小衚衕, 작은 골목)에 다리가 되어 버렸으나 그 글자가 안쪽에 있는 까닭에 보는 것이 불가(不可)하다.

여길 보면 척화비의 후면에 ‘위정척사지비’라는 글자를 썼다고 되어 있으나 현존하는 실물 비석 가운데 이 구절이 새겨진 사례는 전혀 보이질 않는다. 그리고 척화비 이외에 ‘척화묵(斥和墨, 척화먹)’이 광범위하게 만들어졌다는 것도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는데, 혹여 이 세상 어디엔가 지금껏 이 척화묵의 실물자료가 남아 있는 것인지 그것이 그저 궁금할 따름이다.

여기에서 보듯이 종각 뒤편 작은 골목의 돌다리로 변신한 상태로 목격된 종로 척화비의 존재가 다시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조선총독부에 의해 이른바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始政五年記念 朝鮮物産共進會)’의 준비가 한창이던 1915년 여름의 일이었다. ????매일신보???? 1915년 8월 12일자에 수록된 「종로(鍾路) 팔천 관(八千貫) 대종(大鍾)의 이전(移轉), 종각(鍾閣) 온돌 하에서 발굴한 대원왕(大院王)의 기념석비(紀念石碑)」 제하의 기사는 종로 척화비의 노출과정을 이렇게 채록하고 있다.

2, 3개월 이전부터 착수한 남대문통 시구개정공사(南大門通 市區改正工事)는 조선은행전(朝鮮銀行前)으로부터 종로 십자가(十字街)까지 약 5백 칸의 대로간인데 공진회(共進會) 절박한 금일에 황금정(黃金町)으로부터 종로까지 기간(其間)은 완전히 전장(戰場)이나 무이(無異)한 소동이라. 남대문통의 노폭(路幅)을
▲ 십오칸(十五間) 도로로 확장함으로 가옥의 이전건축도 역(亦) 용이한 사(事)가 아니나 차(此)는 목하(目下)에 태(殆)히 완료하였고 석조연와건축의 당당한 점포와 지나인(支那人)의 대연와옥, 조선식의 점포 등이 양측에 병립(並立)하여 종전에 비교하면 전연(全然)히 면목(面目)을 일신(一新)하였더라. (중략)
▲ 종로(鐘路)의 종각(鍾閣)은 내(來) 20일경 건물에 거종(巨鍾)을 조(吊)한 대로 후방(後方)으로 이전한다는데 해종(該鍾)의 중량이 8천 관이라 하며 거(去) 10일에는 종각 이전할 준비로 인부로 하여금 종각 후방 온돌상하(溫突床下)를 굴착하는데 우연히 석비(石碑) 1개가 발굴되었는데 비면(碑面)을 기(起)하여 견(見)한즉 장(長)은 4척(尺) 8촌(寸)이오, 폭(幅)은 1척 5촌, 후(厚)는 1척의 화강석(花崗石)이며 표면에는 주자(朱字)로 대서(大書)하여 왈(曰)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이라 각(刻)하였고 차(且) 기측(其側)에는 세자(細字)로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의 문자를 전(鐫)하였는데 차(此)는 대원왕(大院王) 당시에
▲ 비상(非常)한 쇄국주의(鎖國主義)를 취(取)하여 외국(外國)의 이적(夷狄)으로 조선의 변경(邊境)을 규시(窺視)하는 자는 용사(容赦)치 말고 축송(逐送)하라는 명령으로 조선 각지에 건(建)한 것인데 경성(京城)에 재(在)하던 것은 기(其) 거처(去處)가 미명(未明)하더니 금회에 우연히 발견되었더라.

이렇게 드러난 종로 척화비는 곧장 조선총독부 토목국 영선과로 수습되었다가 몇 달이 지나 총독부박물관(總督府博物館, 1915년 12월 1일 개관)의 소장유물로 귀속되었다. 이때 척화비는 박물관의 전시공간으로 활용되던 경복궁 근정전 회랑으로 옮겨졌으며, 지금도 각종 출판물에서 등장하는 척화비의 모습이라고 하면 이곳에 진열되어 있을 당시에 촬영된 사진자료가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국립중앙박물관(용산)의 3층(전시 1층)에 자리한 근세관(近世館)을 들어서면 진열공간 한쪽에 짙은 색깔의 화강석으로 만든 비석 하나가 눈에 띄는데, 그것이 바로 총독부박물관 시절 이래로 이곳의 오랜 전시유물로 터를 잡고 있는 ‘종로 척화비’이다. 지금 잔존한 대다수의 척화비들이 각기 소재지역의 지방문화재로 지정관리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여기에는 아무런 지정번호가 붙어 있지 않다.

일반적으로 국립박물관의 수장품으로 되어 있는 유물의 경우 구태여 ‘국보’, ‘보물’ 등의 국가문화유산이나 기타 ‘지방문화유산’ 등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더라도 이미 최상의 보존상태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적극적으로 문화재 지정을 시도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 비석은 최초 설치 지점이 도성의 중심지인 종로거리였다는 점이나 모든 척화비를 통틀어 가장 으뜸으로 꼽히는 위상을 지니고 있다는 점, 그리고 외세침탈과 관련한 근대사의 한 장면을 담고 있는 사료적 가치는 물론이고 유물의 보존상태도 최상이라는 점 등을 고려하면 언젠가는 ‘보물’로 지정되어도 좋을만한 역사유물인 것은 틀림이 없어 보인다.

양화진 절두산성지에 세워져 있는 ‘모조품 척화비(FRP 수지 재질)’의 모습이다. 이것은 용산 순교복자수녀회의 척화비를 그대로 본떠 제작 한 것으로 확인된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약간 특이한 사실 한 가지를 지목하면, 우선 가톨릭성당이나 순교기념관과 같은 공간에 적잖은 수량의 척화비가 수집되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한국순교복자수녀회의 사례도 바로 그러하거니와 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의 실내에 배치되어 있는 척화비 역시 —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으나 — 신녕성당(新寧聖堂, 경북 영천시 신녕면 화성리)의 보수공사 때 발굴된 것을 옮겨왔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청송 척화비의 경우에도 알고 보니 원래 청송경찰서 정문 옆 담벼락에 방치되다시피 남아 있던 것을 청송성당 쪽에서 수습하여 오랜 세월 성당 내부의 제대 옆에 보관해 왔던 내력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기간이 1976년 이후 무려 37년이나 되었으며, 2013년에 이르러 청송군청에서 이를 되가져가 지금은 척화비가 소헌공원(昭憲公園, 경북 청송군 청송읍 월막리)의 비석군에 포함되어 재배치되어 있는 상태이다.

이것 말고도 서울 절두산성지(양화진)에는 용산 순교복자수녀회의 척화비를 그대로 본떠 만든 FRP수지(섬유강화플라스틱) 재질의 ‘모조품 척화비’가 놓여 있고, 저 멀리 부산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에도 역시 거의 동일한 형태의 ‘재현품 척화비’가 자리하고 있다. 또한 서울 용산구 이촌동에 있는 순교성지 새남터기념성당에도 한동안 ‘재현품 척화비’가 터를 잡고 있었으나 최근에 그곳 성당 측의 판단에 따라 이를 폐기처분한 것으로 확인된다. 이처럼 천주교 관련 종교시설에 다수의 척화비가 관찰되는 것은 아무래도 그것이 박해와 순교의 증거물로 인식되고 있는 탓이 아닐까 싶다.

• 척화비 관련 특집기사로 인해 이번 호의 ‘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은 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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