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평화에 도달하기 위한 기억 프로젝트, 영화 ‘판문점’을 보고 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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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에 도달하기 위한 기억 프로젝트,
영화 ‘판문점’을 보고 난 후

사지원 중앙대학교 물리학과

2018년 학교가 끝나고 밥을 먹던 중, TV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만나는 모습을 보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뉴스는 나를 오랜 꿈으로 이끌었다. 차를 타고 금강산 언저리에 주차한 다음, 등산길에 올라 벅찬 그 풍경을 그저 바라보는 것, 분단선을 넘어, 열차를 타고 유럽 대륙 끝을 목적지로 하여 중간마다 정박하며 가보는 것. 꿈에 그리던 것들이 더 이상 꿈이 아니라, 가능할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한국’인 이기에 북한에 갈 수 없다. 같은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한민족이지만 유일하게 서로 오갈 수 없다. 그저 분계선 근처에서 바라볼 뿐이다. 전주 한옥 마을을 가듯, 평양에 관광을 가서 평양냉면을 먹고, 박물관에서 고구려 유적지를 볼 수 있는, 그렇게 일상 및 ‘당연함’의 모습의 반경을 넓히고 시야를 가지게 해주는 것, 북한의 미사일이나 서로 간의 군사적 도발을 더 이상 일상의 뉴스로 받아들이지 않는 일상, 서로 간 오가는 확성기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 폭력과 무력이 아닌 진정한 ‘평화’가 비로소 일상과 ‘당연함’이 되는 날을 꿈꾼다.

가족임에도 보지 못하는 이산가족은 한국 전쟁의 비극을 상징한다. 하지만 그 아픔은 점점 더 잊혀간다. 그렇게 폭력의 아픔은 서서히 일상으로 침투하여 무감각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위기가 지속되고, 실제적 폭력이 전 세계로 확산하여 간다. 이 전쟁은 국경을 넘어서 연결되어 있고, 모두가 이 고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특히, 한국은 언제든 다시 이권을 위한 힘겨루기의 장소가 될 수 있다. 역사 속에서 전쟁은 ‘냉전’이라는 형태로 불리며 성격이 변했지만, 그 ‘냉전’은 실제적, 물리적으로 뜨거운 전쟁을 주변국으로 몰아넣음에 불과했다. 한국은 그러한 변화의 중심에서 전쟁의 비극을 모두 떠안았다.

중국 국경 근방 압록강과 백두산에서는 북한에 매우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 경계하며 지키는 많은 철조망과 군인도, 산발한 채 숨어 있는 지뢰의 위험도 없다. 거기서 본 북한은 남한에서 본 북한의 모습과 사뭇 달라, 종종 잊고 지내는 비극을 뼈저리게 실감하게 한다.

현재와 다른 일상을 맞이할 수 있었던 기회들이 안타깝게 스쳐 가고, 여러 우연과 비극들로 여기까지 흘러왔다. 얼마 전 한국 지도를 그릴 일이 있었다. 남북 관계가 이대로 지속된다면 시간이 흘러 한반도가 아니라, 군사분계선 아래만 그리는 상황이 올 수도 있겠다는 불안한 생각이 스쳤다. 평화가 요원해 보이는 상황에서 꿈을 넘어서, 평화를 현실화해 가야 한다. 시작점으로 회귀하여 현재를 다시 볼 때, 꼬인 매듭을 풀 수 있다.

한국 전쟁 문제를 강대국 사이 패권 경쟁을 중점으로 생각해 왔었다. 당사자들의 의도와는 달리, 수많은 욕망과 부조리함과 폭력들이 얼기설기 얽혀서, 전쟁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영화에서도 볼 수 있듯, 남한 대표는 부재한 채로 미군과 북한 대표단만이 정전 협상에 참여했다. 지금도 평화는 남북만의 의지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구조이지만, 주도권을 가지고 주체적인 해결을 하려는 노력은 중요하다.

영화에서는 최근 미군이 판문점에서 평화를 이룩함에 큰 관심 없이 답변하는 모습을 담는다. 우리는 국가의 운명이 국민들이 아닌, 다른 이들에게 위탁될 때, 강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평화가 달성되지 못함을 목격하고 있다. 그렇게 우리는 종전이 아닌 휴전에 머무르고 있다.

영화에서 보여준 정전 협상 과정과 전쟁 포로 문제는 이러한 전쟁의 성격을 표상한다. 포로 교환 문제는 영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몰랐었던 새로운 이야기들을 알게 되었다. 포로는 이데올로기 선전을 위해 이용됐고, 휴전 협상은 포로 교환 문제로 길어져 갔다. 협상 기간동안 무의미한 희생만 지속되고 고지를 수복하기 위한 전쟁이 계속되었다. 그 와중에 거제 수용소에서 일부 강경 북한 포로들을 주변에 있던 섬으로 이송했고, 그 과정에서 섬의 주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삶의 터전에서 쫓겨났다. 휴전 후, 북한 포로들이 북송된 자리는 귀환한 남한 포로들로 채웠다. 그들은 고향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사상을 계속 검증받고, 어떤 기준도 없이 처형당했다.

전쟁은 어떠한 정의도, 더 나은 이데올로기를 보장하지도, 승리도 가져오지 않는다. 무도함과 슬픔, 참혹함으로 점철되고 인간은 수단으로 도구화된다. 반공산주의, 냉전, 맥아더 및 미국 숭배, 일부 사람들에 대한 악마화 등 널리 알려진 서사와 용어들은 한국 전쟁과 분단의 성격을 제대로 담지 못한다. 그 속의 감춰진 비참함과 슬픔을 봐야 하고, 역사적 공간 및 시간대를 넓혀 나아갈 길을 모색해야 한다. 이 영화는 판문점을 매개로 하여 우리가 왜 평화에 이르지 못했는가에 대한 본질에 더 다가설 수 있도록 한다.

‘기억’은 단순히 ‘기억하자’는 의지를 넘어서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지에 대한 고민을 내포한다. 기억은 저절로 되는 게 아니라, 노력과 행동이 선행되어야 가능하다. 계속 끌어오고 고민하고, 재해석해야 ‘기억’이 가능하다. 기억은 가상으로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기억으로 마음속 불씨가 지펴지고 사람들이 모인다. ‘기억’은 그리하여 쉽게 꺼지지 않는 힘을 얻는다. 평화의 길로 나아가기 위한 기억을 향해 이 영화는 짧은 상영 시간 동안, 긴 역사에 대한 여러 자료와 인터뷰를 박해일 배우의 목소리로 적절히 융합하며, 담담하지만 명확한 메시지를 만들어낸다. 판문점은 남북이 상시로 소통할 수 있는 장소라는 독특한 위상을 가지고 있지만, 잊혀가고 있다. 영화는 이러한 판문점을 다시금 남북이 주체적으로 전쟁을 끝내고 항구적인 평화를 이룰 수 있는 장소로 상기시킨다. 판문점을 어떻게 기억할 것이며, 왜 기억해야 하는가를 일깨워준다.

앞선 세대는 독재에 맞서서 싸웠고, 평화, 노동, 민주주의를 위해 힘썼으며, 친일, 제국주의 잔재에 맞섰다. 그 덕에 그 이상의 가치들을 추구할 수 있었다. 더 좋은 세상,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해서 한데 모았던 사회의 힘은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인권, 페미니즘, 환경 등으로 보다 넓은 가지를 뻗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위기가 더 고조되며, 다시 평화, 실제적 폭력에 대한 문제를 돌아봄이 절실해지고 있다. 새로운 기억의 고리를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이 영화 포스터에 적힌 “2024년 한반도를 일깨우기 위한 대국민 프로젝트”에 더 많은 사람들이 동참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미래를 함께 꿈꿀 수 있을 것이다.

평화는 공기와 같이, 있을 때는 당위적인 것으로, 그 존재감을 미비하게 느낀다. 없어졌을 때야 비로소 걷잡을 수 없는 부재를 깨닫게 된다. 종전인 것처럼 위장하여, 은닉되었던 ‘일시적인 평화’라는 사실이 수면 위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도발적인 언사들을 넘어서, 오물 풍선이 직접적으로 넘어오는 등 일상에 위험이 스며들고 있다.

판문점이 어떻게 그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는지, 위치하게 되었는지를 과거 판문점의 모습들과 함께 서문을 연 영화는 판문점이 기능을 잃은 현재에서 이야기를 마친다. 이후의 이야기와 판문점의 실현은 관객들의 몫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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