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윤시병
‘대통령’이란 단어가 처음 나왔을 때는 생경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생경함을 떠나 당혹감이나 불쾌감을 느꼈을 인물도 있다. 종신 군주인 고종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자신의 존재의의를 부정하는 신조어였을 수도 있다.
그 시절에 대통령이란 단어가 사용되는 장면을 국사편찬위원회의 <고종시대사> 제4집에서 만날 수 있다. 이 책에 실린 1899년 4월 24일 자 대한제국 고등재판소 판결문에 따르면, 직업이 훈장인 권형대는 고종 정권을 전복하고 대통령을 추대할 계획을 품었다. 1898년 상반기에 그는 충남 공주군 주점에서 전직 참봉인 44세의 장윤상에게 이런 말을 하며 거사 참여를 요청했다.
“광무 3년 2월 중에 이준용이 만약 환국하면 대황제폐하는 존(尊)태상황위하고 이준용이가 대위(代位)를 하거나 대통령을 하거나 수기위지(隨機爲之)할 터이니”
다가오는 1899년 2월 중에 고종의 조카이자 흥선대원군의 장손인 이준용이 일본 망명을 끝내고 귀국하면 황제 고종을 태상황 위치로 올리고 이준용을 황제나 대통령으로 만드는 거사를 벌이겠다는 말이었다. 이준용에게 어떤 자리를 줄지는 상황을 봐가며 처리할 테니 자신을 믿고 따르라고 전직 9급 공무원을 부추겼던 것이다.
안 그래도 고종은 이준용 때문에 가슴을 자주 쓸어내렸다. 고종이 청나라·일본과 영국·프랑스·미국 등이 무서워하는 러시아를 끌어들인 뒤 관계를 강화하는 조짐이 나타나자, 청나라의 조선 현지 책임자인 원세개(위안스카이)는 1886년에 응징 차원에서 이준용 옹립을 계획한 일이 있다. 동학혁명이 있었던 1894년에는 대원군이 동일한 계획을 추진한 일이 있다.
훈장 권형대는 이준용이 귀국하면 황제나 대통령으로 세우겠다며 사람들을 규합했다. 고종 입장에서는 ‘하필이면’ 이준용이 거론됐다는 점과, ‘하필이면’ 대통령제가 언급됐다는 점 때문에 이 사건이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1899년 4월 24일자 <고종실록>에 따르면, 장윤상은 교수형을 선고받고 나머지 사람들은 태형과 유배형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다들 감형됐다. 권형대가 수사망을 피해 종적을 감췄기 때문이다. 몸통을 잡지 못했다는 이유로 감형이 적용된 것이다.
‘박영효 대통령 추대설’ 고종에 각인시킨 친일파
고종이 대통령이란 단어에 민감하다는 점은 훗날 친일단체 일진회 회장이 될 중추원 일등의관 윤시병과 관련해서도 증명됐다. 1851년에 출생하고 무과에 급제해 관료의 길을 걸은 윤시병은 동학혁명 뒤에 일시적으로 퇴직했다. 그 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뛰어들어 주목을 받다가, 권형대가 이준용 대통령을 운운하던 1898년 상반기부터 의회 비슷한 중추원 의관(의원)으로 복직했다. 독립협회 활동이 기반이 돼 중추원 고관으로 복귀하게 됐던 것이다.
이 시기에 윤시병도 대통령이란 글자를 고종황제의 뇌리에 넣어줬다. 윤시병 본인의 의중과 관계없이 그의 행동이 그런 결과를 낳았다.
1993년에 발간된 <친일파 99인> 제1권에 실린 김경택의 ‘윤시병: 만민공동회 회장에서 일진회 회장으로 변신’은 “그는 중추원 의관으로 있으면서 임시의장으로 선출되어 박영효를 위시한 개화파 내각의 수립을 주장하는 통첩을 정부에 보내는 데 앞장섰다”고 기술한다. 그런 뒤, 박영효 중용을 촉구하는 윤시병의 통첩이 고종에게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설명한다.
“고종은 박영효 대통령 추대설 등의 풍문이 나돌고 있는 가운데 전달된 이 통첩을 조선 정부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간주하여 독립협회를 해산시키기로 결정하고 주요 간부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윤시병은 정부의 추적을 피해 미국인 집으로 피신하여 체포·투옥을 모면할 수 있었다.”
철종(고종의 전임)의 사위인 박영효는 왕조국가의 관점에서 보면 이준용에 비해 정치적 정통성이 낮았다. 황제의 조카인 이준용은 언제라도 황제가 될 가능성이 있었지만, 황실의 사위인 박영효는 가능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극히 희박했다.
그러나 이준용과 달리 박영효는 실력이 있었다. 1884년에 김옥균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킨 그였다. 거기다가 권력 의지도 강했다. 그래서 박영효 대통령 추대설은 이준용 대통령 추대설 못지않은, 그 이상의 파괴력이 있었다. 박영효의 중용을 촉구한 윤시병의 행위는 고종에게 그처럼 민감한 일이었다.
윤시병은 대한제국 멸망 1년 전에도 고종의 신변과 밀접한 일에 연루됐다. 고종이 일본과 친일파의 압력으로 퇴위한 뒤인 1909년에 7월에도 황제권과 관련된 일을 건드려 경을 쳤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 윤시병 편은 이런 에피소드를 알려준다.
“대신 민종묵이 비밀리에 태황제인 고종의 복위를 기도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의 아들 민철훈을 협박해 1700원에 상당하는 재산을 탈취한 일이 탄로나 경시청에 체포되었다.”
고종을 복위시키려는 움직임을 관에 신고했다면 체포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움직임을 1700원 탈취의 기회로 활용했다가 체포된 것이다. 1911년에 헌병보조원 월급이 7원에서 16원 사이였다. 106명에서 243명에 달하는 보조원의 월급에 해당하는 재산에 욕심이 나서 고종황제 복위 시도를 그런 식으로 활용했던 것이다.
고종은 무시하고, 일왕에게는 충성
윤시병은 자신을 중용해 준 대한제국의 황제권을 번번이 농락했다. 하지만 일왕(천황)의 왕권에 대해서는 상당히 충직한 모습을 보였다. 대표적 친일단체인 일진회의 회장을 역임했을 뿐 아니라 일진회 조직을 이용해 일왕에 대한 충성심을 과시하기도 했다.
위 <친일파 99인>은 일진회가 러일전쟁 중에 연 11만 4500명의 함경도 회원들을 동원해 일본군의 군수물자 수송을 돕고, 연 14만 9114명의 평안도·황해도 회원들을 동원해 일본군의 만주 진출을 위한 경의선 공사를 도운 사실을 설명한 뒤 “일진회 회장 윤시병은 일진회의 이러한 친일행각 덕분에 일제로부터 일훈욱일4등장이라는 훈장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는 고종의 외교권을 일왕에게 넘기는 일에서도 이완용보다 한발 앞섰다.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 체결 11일 전에 그와 일진회는 선제적으로 사고를 쳤다. 을사늑약 체결을 위해 이토 히로부미가 내한한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일본에 외교권을 위임하자는 선언서를 이토 히로부미 방한 사흘 전인 1905년 11월 6일에 발표했다.
이처럼 윤시병은 고종의 황제권과 직결되는 민감한 사안과 자주 연루됐다. 고종이 싫어하는 대통령제와 관련해서도 거론되고 고종 복위 계획을 탐지해 거금을 탈취하기도 하고 고종의 외교권을 넘기는 일에 바람잡이 비슷한 역할도 했다. 현대 한국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고종 입장에서는 상당히 눈에 거슬릴 만한 친일파였다.
고종의 아픈 데를 쿡쿡 찌르는 이런 친일행위의 대가가 대한제국 멸망 1개월 뒤인 1910년 9월에 정산되어 그에게 지급됐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 4-11권 윤시병 편에 따르면, 1966년에 일본 극우단체인 흑룡회가 편찬한 <일·한 합방 비사> 하권은 윤시병이 일진회 해산 때 500원을 받은 사실을 알려준다.
<친일인명사전>은 “1913년 10월 공주와 논산 간 도로용 부지 391평을 기부한 공로로 1914년 12월 조선총독부가 주는 목배를 받았다”고 설명한다. 윤시병과 일제 사이엔 부동산 391평을 기부하고 나무 술잔 하나를 받아도 아깝지 않은 끈끈한 관계가 존재했던 것이다.
대통령이란 단어가 아직은 생경하던 시절에 ‘박영효 대통령 추대설’을 고종의 뇌리에 심어준 윤시병은 1932년 2월 6일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34년 11월 일본 우익단체 흑룡회가 도쿄의 메이지신궁교 옆에 세운 일한합병기념탑의 석실 안에 일한합방공로자로 이름을 올렸다”고 <친일인명사전>은 말한다.
김종성 기자
<2024-07-27>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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