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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앤] ‘시대의 아픔’ 되돌아볼수록 ‘미래 향한 소망’은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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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특집-평화·민주·인권을 향한 작은 박물관 스탬프 투어 (상) 통일의 집, 근현대사기념관, 김근태기념도서관, 전태일기념관

평화·민주·인권을 향한 작은 박물관 8곳이 협약을 맺고 작은 박물관 스탬프 투어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 6월18일 용산구 청파동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돌모루홀에서 작은 박물관 관계자들이 모여 다자간 업무협약(MOU) 체결식을 했다. 왼쪽부터 이나영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이사장, 박현숙 김근태기념도서관 관장, 윤경로 근현대사기념관 관장, 함세웅 식민지역사박물관 이사장, 우상호 이한열기념관 이사장, 문영금 문익환 통일의 집 관장, 이현주 박종철센터 센터장, 오동진 아름다운청년 전태일기념관 관장

성취감·자신감 얻고, ‘내가 스스로 만든 음식’으로 편식 고쳐

근현대사기념관, 김근태기념도서관, 문익환 통일의 집, 박종철 센터, 식민지역사박물관, 아름다운청년 전태일기념관, 이한열기념관,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1987년 6월항쟁의 성과를 이어받아 평화·민주·인권을 바라는 시민들의 마음을 모아 탄생한 박물관들이다. 이 박물관들이 지난 6월18일 다자간 협약을 맺고 ‘작은 박물관 스탬프 투어’를 시작했다. 8개 박물관을 모두 돌아본 시민들에게는 마지막 방문 기관에서 선물을 증정한다. 참가를 원하는 시민들은 구글링크(https://forms.gle/7W1hXyMF9mYDXKJo7)를 통해 신청하면 된다. 협약에 참여한 작은 박물관들은 앞으로 일상적인 활동을 공유하고 교류하는 등 연대를 더욱 강화할 계획이다. <서울&>은 8·15 광복절을 앞두고 장태동 여행작가의 스탬프 투어 참여기를 두 차례에 나누어 싣는다. 그 첫 번째로 근현대사기념관, 김근태기념도서관, 문익환 통일의 집, 아름다운청년 전태일기념관을 소개한다. 게재 순서는 장 작가가 투어한 순서에 따랐다. 편집자

문 목사가 기거하던 거실(작은 사진은 문익환 통일의 집).

문익환 통일의 집

1970년대 초 이 집은 3대가 함께 사는, 여덟 명 대가족의 보금자리였다. 현재 ‘기도방’은 문익환 목사의 부모님 방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는 서재와 기도실로 썼다. ‘아들방’은 세 아들이 쓰던 방이었다. ‘안방’은 문 목사와 박용길 장로 부부의 침실이자 서재였다. 손님 접대실이 되기도 했다. 문 목사가 성서를 번역하고 시를 쓰던 방이자 박 장로가 붓글씨를 쓰고 수예품을 만들던 곳이기도 했다. 1976년 발표한 ‘3·1민주구국선언문’을 이 방에서 썼다.

성직자의 길, 신학자의 길을 걷던 문 목사는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하며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에 저항했다. 1980년대 신군부의 폭압에 항거하며 민주화 투쟁을 이끌었고 민족 통일을 모색하는 길에서 그는 6번의 투옥, 11년3개월을 감옥에서 살았다. 1993년 출옥할 때 그는 76살이었다.

출옥 이후 그는 새로운 통일운동 단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1994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숨을 거둔 방이 부부의 침실이자 서재였고, ‘3·1민주구국선언문’을 쓴 ‘안방’이었다. 거실과 각 방에는 문익환·박용길 선생과 관련된 전시품이 놓였다. 8월8일부터 10월31일까지 ‘나는 가고 너는 와야지’라는 제목의 전시가 열린다.

문익환 통일의 집에서 박용길 선생이 감옥에 있는 문익환 선생에게 보낸 편지지에 붙어 있는 마른 꽃 한 송이를 보았다. 그 옆에는 ‘공주교도소 문 앞에서 너무 예뻐서 당신께’라는 박용길 선생의 글씨가 적혀 있었다. 그날의 꽃처럼 ‘너무 예쁜 꽃’이 문익환 통일의 집 뒤편 ‘함께 가꾸고 즐기는 정원’에 가득 피었다. 환하게 웃는 문익환 선생의 벽화 앞에서.

대한민국 광복군,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과 기념사진을 찍는 장소(근현대사기념관).

근현대사기념관

근현대사기념관은 1894년 일어난 동학농민혁명부터 1960년 4·19혁명까지의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곳이다. 1층 전시실로 들어서면 ‘짓밟힌 산하, 일어선 민초들’이라는 제목 아래 격동의 역사, 그 현장을 마주하게 된다. 프랑스 함대, 미국 함대, 일본 함대, 제국주의 열강은 강했고 조선은 찢겼다. 국내적으로는 부패한 권력과 관료들의 전횡과 가렴주구가 극에 달했다. 나라는 그렇게 무너져 갔고, 백성들은 두 적과 맞서 싸우며 스스로 살길을 찾아야 했다. 동학농민혁명은 그렇게 일어났다.

“백성은 국가의 근본이다, 근본이 쇠하고 흩어지게 되면 국가는 반드시 없어지는 것이다. 보국안민의 방책을 생각 않고 다만 제 몸만을 생각하여 나라의 돈만 없애는 일이 어찌 옳은 일이랴.-전봉준·손화중·김개남의 ‘창의문’ 1894-” 전시관 벽에 걸린 문구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차라리 자유민으로 죽으리라.’ 대한민국 의병을 인터뷰한 영국 <데일리메일> 기자가 남긴 글도 전시됐다. 1908년 8만2767명의 의병이 1976번 일제와 전투를 벌였다. 1909년 3만8593명의 의병이 벌인 전투는 1738회였다. 1910년에도, 일제강점기 내내 의병의 전투는 이어졌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1년 대일선전포고문을 발표하고 연합군의 일원으로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자주·독립·민주·평등의 정신은 광복 이후 4·19혁명으로 이어졌다. 근현대사기념관 앞 모과나무 한 그루의 배웅을 받으며 현재로 돌아왔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의열단 행동강령을 작성한 독립운동가 신채호 선생이 어릴 때 심은 모과나무에서 얻은 씨앗에서 싹 틔운 묘목을 조선의열단 창립 100주년이던 2019년, 광복회가 강북구에 기증한 나무라고 한다.

김근태·인재근 부부가 수상한 케네디 인권상(김근태기념도서관).

김근태기념도서관

‘희망은 힘이 세다’라는 글이 새겨진 돌 위에 김근태 선생의 상이 있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듯 얼굴에는 온화한 웃음이 번진다. 그 옆에 ‘민주주의 라키비움 김근태기념도서관’이라는 이름이 붙은 건물이 있다. 도서관, 기록관, 박물관의 역할을 하는 곳이라는 뜻의 단어 ‘라키비움’ 앞에 민주주의라는 말이 붙었다.

그림 몇 점이 눈에 띈다. ‘Pink chair and cat’ ‘고양이의 꿈’ ‘우리 가족’ 등 그림 하나하나 앞에 머무르며 보게 된다. ‘사랑으로-세상을 바꾸는 따듯한 힘, 존중’이란 제목으로 9월 1일까지 열리는 기획전시에 걸린 작품이다.

발달장애 예술가 7명이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하고 존중하는 대상과 풍경을 작품에 담았다. 김근태 선생이 남긴 말 가운데 해마다 한 단어를 정해 주제로 삼는다는데, 올해는 ‘존중’이라고 한다.

‘기억곳(전시실)’ 벽의 ‘인간의 가치는 그가 품고 있는 희망에 의해 결정된다’는 글귀도 김근태 선생이 남긴 말이다. 건물로 들어오기 전 보았던 ‘희망은 힘이 세다’라는 글이 생각났다. 박정희·전두환 정권에 항거했다가 1985년 연행되어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현재 민주인권기념관)에서 8번의 전기고문, 2번의 물고문을 당했다. 만신창이가 된몸으로 고문 사실을 폭로하기 위한 법정 투쟁을 부인인 인재근 선생과 함께 이어갔다.

이 사실을 미국 <뉴욕 타임스>에서 기사화했다. 그는 희망 없는 곳에 희망을 새겼다. 김근태·인재근 부부는 케네디 인권상을 공동수상했다. 그 트로피와 상장을 전시실에서 보았다.

청년 시절부터 좋아했던 문학은 그의 옥중 생활에 큰 힘이 됐다. 신경림 시인의 시 ‘떠도는 자의 노래’는 그의 애송시 중 한 편이었다. 김근태 선생이 좋아했던 몇 편의 시를 읽고 옥상으로 나갔다. 도봉산과 수락산의 능선이 하늘과 닿은 곳까지 보았다.

전태일이 일할 당시 평화시장 봉제공장 실내를 재현한 전시공간(아름다운청년 전태일기념관)

아름다운청년 전태일기념관

어머니에게 받은 차비 30원으로 풀빵 30개를 사서 일터의 어린 동생들에게 나눠주고 자신은 집으로 돌아갈 차비가 없어 청계천6가부터 도봉산 아래 집까지 걸어다녔던 사람, 전태일. 그는 평균나이 열다섯 살, 시골에서 올라온 어린 소녀들이 환기시설 하나없는 일터에서 하루 15시간 일해야 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다. 그는 재단사와 업주의 유착 비리를 알게됐고, 자신은 제대로 된 재단사가 되어 기계가 아닌 사람으로서 일하고 싶은 환경을 만들고 싶었다. 재단사가 되었고, 재단사들의 모임인 ‘바보회’를 만들어 평화시장 노동실태 조사 설문지를 만들었다. 시청과 노동청에 진정서를 접수했으나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전태일은 직장에서 해고됐다.

그리고 1970년 삼동회를 만들어 다시 활동하기 시작한다. 노동청에 ‘평화시장 피복 제조업 종업원 근로조건 개선 진정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대로였다.

1970년 11월 지켜지지 않는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벌여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지 못하는 현실을 고발키로 했는데, 경찰이 막아 무산될 상황이 되자 자신의 몸에 석유를 붓고 불을 붙였다. 전태일은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주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선생은 전태일의 뜻을 이어 유급휴일 실시, 법으로 임금인상, 정규 임금인상, 8시간 근무, 정기적인 건강검진, 여성 생리휴가, 공장 이중 다락방 철폐, 노조 결성 지원 등 8개 사항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해 같은 달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됐다. ‘아름다운청년 전태일기념관’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운 ‘외벽 글씨’는 1969년 전태일이 근로감독관에게 보낸 진정서를 토대로 만든 것이다. 옆에는 금방이라도 벽을 박차고 달려 나올 것 같은 전태일의 상이 있다. 일터의 어린 소녀들에게 풀빵을 사주던 따듯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전태일 상의 손에 열선을 넣어 한겨울에도 그 손을 잡으면 온기를 느낄 수 있게 했다.

1 평화·민주·인권을 향한 작은 박물관들 제공, 2~5 장태동 여행작가
글·사진 장태동 여행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2024-08-01> 서울&

☞기사원문: ‘시대의 아픔’ 되돌아볼수록 ‘미래 향한 소망’은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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