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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친일 문인 기리는 건 썩은 나무를 대들보로 올리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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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춘파 전형 친일 행적 드러낸 박수연 문학평론가

▲ 박수연 문학평론가(충남대 국어교육과 교수) ⓒ 심규상

“정지용 시인은 해방공간에서 ‘친일반역자를 숙청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던 문인이었다. 전형이 어울리고자 했어도 정지용 시인이 허락하지 않았을 듯하다.”

충북 옥천 출신인 춘파 전형(全馨, 1907-1980)은 동향인 정지용 시인(1902-1950)과 교류가 많았다. 전형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문학인과 언론인의 삶을 걸어왔다.

전형에 대해 연구해 온 박수연 문학평론가(충남대 국어교육과교수)는 <오마이뉴스>와 인터뷰에서 “전형은 1940년 이후 스스로 창씨개명(도쿠다 카오루, 德田 馨)을 하고 친일 잡지에 일본어로 여러 편의 친일 글을 발표했다”며 “글을 보면 전쟁 찬양, 만주국 건국이념, 천황제이데올로기, 동아신질서론 등이 골고루 들어 있다. 당시 친일 담론의 거의 모든 것을 글로 쓰고 있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증언을 보면 당시 조선 문인들은 전형의 친일을 모두 잘 알고 있었고 이 일로 서로 사이가 멀어졌다”며 “전형이 해방 후 서울에 거주하지 않고 대전으로 이주하는 것도 서울에서 문인들을 아무일도 없었던 듯 볼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실제 전형의 친일 행적 이후에는 정지용과도 교류한 기록이나 정황이 전혀 없다.

박 평론가는 대전시 출자출연기관인 문화재단이 전형의 전집을 발간하려는 데 대해 “썩은 나무를 대들보로 올리는 순간 그 집 전체가 무너지게 된다. 친일문인이 없던 대전충남의 문학사에 친일 문인이 중심으로 들어서게 된다”고 우려했다.

대전문화재단은 지난 5월 대전시 추경예산 5천만 원을 확보, 전형의 작품을 한 데 묶은 전형전집 발간을 추진 중이다.

박 평론가는 거듭 “대전문화재단이 신채호 선생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친일문인인 전형을 동시에 조명한다면 친일과 독립을 함께 기리는 매우 이상한 일이 생기게 된다”며 중단을 요구했다. 그는 또 “제2대전문학관 건립에도 이번 일을 거울로 삼아 문화재단이나 문학관에 전공자나 전문학예사를 둬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대전시는 지난 2012년 대전문학관을 개관해 대전 문인들의 작품과 문학 사료를 보존하고 관리, 전시하고 있다. 또 옛 테미도서관을 리모델링하여 제2대전문학관 조성을 추진 중이다.

박 문학평론가는 김수영 시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편찬한 친일 인명사전의 문학 부문 작업에도 참여했다. 현재는 김수영 평전과 대전근현대문학사를 정리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아래는 14일 박 평론가 나눈 주요 인터뷰 요지다.

“신채호 선생 앞세우고 친일 문인 선양? 매우 이상한 일”

▲ <조선출판경찰월보> 116호. 전형은 1937년 문예지인 『풍림』 복간호에 소설 「개와 고양이」를 발표하려다 풍속 교란으로 책이 출판 금지되기도 했다. 당시 <조선출판경찰월보> 116호에는 금지 이유로 ‘한 남성을 사이에 두고 두 명의 여성이 한 방에서 서로 육체를 탐하는 다툼 과정을 선정적으로 묘사, 조선의 풍속을 어지럽히는 ‘풍속 교란’으로 밝히고 있다. ⓒ 박수연

– 주로 어떤 연구 해왔나?

“김수영 시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지금은 그의 평전을 준비 중이다. 일본과 중국에서 김수영의 흔적을 모두 복원해 놓았다. 중요 문인들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한국 근현대문학사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일환으로 친일문학 연구에 집중하기도 했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편찬한 친일 인명사전의 문학 부문 작업에 관여했다. 최근의 또 다른 작업은 대전근현대문학사를 새롭게 정리하는 일이다. 너무 많은 일들이 배제되고 왜곡되어 있다. 그것들을 객관적으로 재구성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어떤 계기로 춘파 전형(全馨)을 연구하게 됐나?

“대전의 근현대문학사를 정리하면서 여러 잊힌 자료들을 살펴보게 됐다. 식민지 시대의 인물들, 해방공간의 중요 지식인들을 살피다보니, 일본의 반서구 동양주의 이데올로기가 해방 조선의 민족이데올로기로 위장되어 작동한다는 사실이 마음 아팠다. 지금 대전 문학의 기원적 인물들이라고 평가되는 여러 문인 지식인 중에 그 위장된 이데올로기의 대표자들이기도 하다. 그 한편으로 일제강점기는 물론이고 해방공간에서 진보적 목소리를 낸 여러 문인 지식인의 흔적은 깡그리 지워져 있었다. 그것을 복원하는 작업의 와중에 ‘전형(全馨)’이라는 인물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꽤 주목할 만한 문인이라고 생각했는데, 곧 그의 숨겨진 여러 행적이 발견되었다. 한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인물도 아니고 문학적 성취도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묻어두기로 했었다. 다른 인물의 어두운 면을 파헤쳐 공개한다는 일이 즐겁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인터뷰에 응한 이유는?

“친일 행적이 밝혀졌는데도 공공기관에서 그를 대전문학사의 축으로 세우기 위한 의도로 전집을 발간하려 하는 것을 보고 학자로서 질문에 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썩은 나무를 대들보로 올리는 순간 그 집 전체가 무너지게 된다. 공공기관이 친일 작가 전집을 발행한다면 친일 문인이 없던 대전충남의 문학사에 친일 문인이 중심으로 들어서게 된다.

차라리 조용히 있었다면 전형은 언론계에서 활동한 문인 정도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국민의 세금으로 공립기관에서 최초로 출간하는 전집을 ‘전형’으로 삼는 순간 그의 이름은 백척간두로 밀려 올라가는 수밖에 없다. 역사는 다시 그를 친일과 횡령이라는 단어로 추락시킬 것이다. 역사는 엄정하다.”

– 전형은 많은 작품을 발표,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그런데도 당시 문단에서 평가가 시원찮은 이유는 무엇 때문이라고 보나?

▲ 박수연 문학평론가(충남대 국어교육과 교수) ⓒ 심규상

“일단, 주목할 만한 작품이 없다. 문학적 성취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읽고 감동하여 오래 기억하게 되는 작품이 없다. 언어미학이 부족하면 이념적으로 진보적이거나 작가의 신념을 드러내는 내용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없다. 그때그때 어울리는 사람들과 보조를 맞춰, 혹은 작품이 발표되는 잡지의 성격에 맞춰 쓰는 절제되지 않은 감상벽의 글이 대부분이다. 그러다 보니 흉내 내 따라가는 작품도 많다. 더 분석해봐야 할 문제다. 이런 작품들을 고평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심미안이 의문스럽지만, 더 이상 얘기할 필요는 없겠다.”

– 전형의 작품은 크게 1940년 이전과 1940년 이후부터 해방 전까지로 나뉜다. 1940년대 이전 글의 성격은?

“감상적 서정이 대부분이고, 대중 취향의 오락물이 많다. 문학사적으로 의미 있는 작품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것은 개인적 평가다. 문학관은 다양할 수 있으니까 다른 의견이 있을 수도 있다.”

– 1940년대 이후 스스로 창씨개명(도쿠다 카오루, 德田 馨)을 하고 친일 잡지에 일본어로 여러 편의 친일 글을 발표했다. 그의 친일 글의 특징은?

“전쟁 찬양, 만주국 건국이념, 일본지배의 필요성, 대동아공영론으로 이어질 동아신질서론 등이 골고루 들어 있다. 당시 친일 담론의 거의 모든 것을 글로 쓰고 있는 셈이다.”

-그동안 창씨개명 사실이 드러나지 않아 도쿠다 카오루라는 필명으로 쓴 글은 찾아내기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어떻게 찾아냈나?

“이봉구가 쓴 <道程(도정)>이라는 책이 있다. 일제강점기 문인들의 생활을 기록한 회고록이다. 한국문학사와 관련된 여러 중요한 사실을 복기해주고 있기 때문에 연구자들이 많이 참고하는 책이다. 그 책에, 정지용과 늘 붙어 다니던 전형이 이름을 도쿠다(德田)로 바꾸고 친일 글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에 서로 사이가 점점 멀어졌다는 진술이 나온다.”

– 전형은 고향 옥천에서 이웃집이자 선배인 정지용 시인과 자주 교류했다. 앞의 이봉구가 쓴 <道程(도정)>에도 전형과 정지용 시인이 자주 만났다는 기록이 있다. 만약 정지용 시인이 해방 직전 전형의 친일행각을 알았다면 어떤 태도를 취했을 것으로 보나.

▲ 전형 작자가 도쿠다 카오루( 德田 馨)라는 이름으로 1943년 4월에 <국민문학>에 쓴 ‘만주 문학의 소망'(滿洲文學のこそなど). “만주국을 비롯해 동양사가 다시 씌어져야 할 때에 이르렀다. 세계사, 각국사, 각국 문학사 등도 뜯어고쳐야 한다. 일본의 의지, 일본의 세계관, 일본의 개성에 따라 세계사를 다시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썼다. ⓒ 박수연

“정지용은 당시 전형의 친일 행각을 알고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이봉구의 책을 보면 당시 조선 문인들은 전형의 친일을 모두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전형과 함께 어울렸던 이육사는 일본의 감옥에서 죽어갔던 상황이다. 전형과 더욱 극적으로 대비된다. 정지용이 볼 때, 전형은 그의 고향 사람이기 때문에 더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해방공간에서 정지용은 ‘친일 반역자를 숙청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던 문인이었다. 전형이 다시 어울리고자 했어도 정지용이 허락하지 않았을 듯하다. 전형이 해방 후 서울에 거주하지 않고 대전으로 이주하는 것도 서울에서 문인들을 만나는 일이 꺼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 전형은 1937년 문예지인 <풍림> 복간호에 소설 ‘개와 고양이’를 발표하려다 풍속 교란으로 책이 출판 금지되기도 했다. 어떤 이유 때문인가?

“당시 <조선출판경찰월보> 116호에는 금지 이유로 ‘한 남성을 사이에 두고 두 명의 여성이 한 방에서 서로 육체를 탐하는 다툼 과정을 선정적으로 묘사, 조선의 풍속을 어지럽히는 ‘풍속 교란’으로 밝히고 있다. 이런 이유로 책 출간에 문제가 생겼으니 다른 작품을 써서 함께 하던 문인들에게 큰 실례를 범한 셈이다.”

– 전형은 해방 이후인 1949년에는 동방일보 신문사 사장과 함께 구속기소 됐다. 구속기소 이유는 뭔가?

“당시 신문 보도를 보면 그 이유를 ‘수재의연금을 횡령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으로 전하고 있다.”

– 일부 지역 문인들과 대전문화재단(대전문학관)이 전형에 대한 전집을 발간하려는 데 대한 의견은?

“문학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성과주의나 업적주의에 사로잡혀, 혹은 선배들에 대한 보은주의에 사로잡혀 일을 진행하다 보면 엄청난 실수가 발생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가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된다. 더 심각한 것은 사업을 주관하는 기관이 신채호 선생을 앞에 내세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채호 선생은 전형을 어찌 생각했을까?

친일 인사의 인후 보증으로 석방되는 것을 거부하다 병이 악화하여 옥사한 선생을 생각한다면 더 고려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다. 문학은 무엇보다도 정신의 세계이다. 이를 염두에 두지 않는 사업은 문학 사업이 아니라 행정적 생색내기에 지나지 않는다. 철학이 없는 생색내기 때문에 친일 문인도 선양하고 동시에 신채호 선생도 기리는 매우 이상한 일이 생기게 된다.”

– 이 문제와 관련 더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문학예술의 역사를 정리하는 사업은 아무래도 전문 연구를 거친 전공자들이 진행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다. 문학관이나 문화재단에 전공자나 전문학예사를 두어야 하는 이유다. 그래야 엉뚱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러기 위해서는 미술관처럼 문학관도 시청 직할체로 독립되어 사업을 진행하는 일이 필요하다. 전문적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몇 가지 자료로 일을 진행하면 필연적으로 이런 동티가 나게 된다. 제2대전문학관이 세워진다고 하니 이번 사태를 거울로 삼아 그 바탕이 잘 짜이기를 바란다.

대전의 문학사를 정리한 기존의 여러 글은 많은 오류를 반복 재생산 중이다. 오류가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실증적 자료를 확인하지도 않고 앞선 글들을 따라 쓰다 보니 계속 잘못된 글이 반복되고 있다. 총체적으로 다시 객관적 자료를 찾아 정리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진짜 대전문학사가 세워질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기존의 여러 문학사 관련 출간물을 가져다 놓고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는 대전문학사 정오표라도 만들고 싶은 심정이다.”

<2024-08-16>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친일 문인 기리는 건 썩은 나무를 대들보로 올리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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