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퇴행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 글쓴이 : 정 근 식 (서울대 명예교수)
지난 광복절에 나는 미군 전략폭격사령부 조사단의 앤더슨 소장이 마지막 조선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유끼(阿部信行)를 심문했던 조서를 읽었다.
1945년 12월 11일 도쿄의 아베 집에서 열린 이 심문에서, 그는 자신이 총독으로 재임했던 해방 직전의 1년을 회고하면서 “한국내의 상위계층에서는 일본인과 한국인 간에 의견불화가 거의 없었”지만, “하위계층에서는 한국인과 일본인 간에 끊임없는 다툼이 있었”고, 헌병이나 군을 동원해야 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임무가 “한국에서 일본으로 더 많은 쌀을 선적하고 더 많은 노동자를 공급하는 것”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미래를 전망했다. “아마 한국민의 10%는 한국이 일본과 협조하고, 아시아의 발전에 협력해야 한다고 믿거나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 한국민의 10%는 한국이 일본과 완전히 단절하고 독립적 위치를 견지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광복회장뿐이겠는가? 배신감과 분노가
3년 전 윤석열 검찰총장이 그 직을 사임하고 공개적인 정치행보를 시작했을 때 그가 처음 찾은 곳은 우당 이회영 기념관 개관행사였다. 신흥무관학교를 창설한 독립운동가를 기념하는 자리에서 그는 우당의 손자인 이종찬 전 국정원장의 옆자리에 앉았고, 독립운동과 임시정부라는 상징적 자원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보수정당의 대통령후보가 되고 나아가 대통령선거의 승리를 위하여 도덕적 윤리적 정당성이 필요했을 때, 그는 이 원장의 후광을 지속적으로 활용했다. 그는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하자마자 이 원장에게 그동안의 은혜에 감사를 표했고, 인수위원회에 관한 조언까지 들었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와 요인들이 일차로 귀국했을 때 이들과 함께 돌아왔던 10세 소년 이종찬은, 이로부터 78년이 지난 작년 6월 광복회 회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광복회장 취임 후에 열린 광복절 기념식의 대통령의 경축사는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지만, 정작 그를 충격에 빠뜨린 것은 그로부터 2주일 후에 이루어진 육군사관학교 교정의 독립운동가 흉상문제였다.
3·1절 99주년을 기념하여 건립한 이회영, 홍범도, 김좌진, 지청천, 이범석 등 독립군 및 광복군 지도자들의 흉상을 철거 이전한다는 국방부의 발표에 많은 국민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광복회장도 이에 경악했다. 그는 국방부의 계획을 ‘반역사적 결정’으로 규정하고 장관에게 경고문을 보냈다. 이에 당황한 국방부는 홍범도장군의 흉상철거로 문제를 축소시켰지만, 성난 여론을 잠재울 수 없었다. 더구나 2022년 가을 국정감사에서 이 논란을 초래했던 신원식의원을 국방부장관에 임명하자 대통령에 대한 의구심이 더 커졌다.
지난 광복절 직전에 독립기념관장이 새롭게 임명되었다. 광복회와 독립운동기념단체들은 독립기념관장 인사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광복회장은 역사를 다루는 국가기구들의 인사참사를 거론하면서 용산 대통령실에 일제의 밀정과 같은 사람이 있다고 분노했고,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는 국방부장관과 안보실장의 갑작스러운 교체의 의미를 말해주는 듯했다. 평화는 없고 자유만 수없이 반복된 이 경축사가 엉뚱한 내용이었다는 비판에 직면하자 드디어 국가안보실 1차장이 나섰다. 광복절 경축사에서 일본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자신감의 표현이고, 중요한 건 ‘일본의 마음’이라고 말했다. 정말 그런가?
경제·정치뿐이겠는가? 역사도 퇴행을
일본의 8·15는 패전기념일이다. 이번 파리올림픽에서 우리 선수를 꺾었던 일본의 한 여자 탁구선수는 지란의 ‘특공자료관’(가미카제 관련 박물관)에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과거의 군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대한 최소한의 반성마저 사라진 현재의 일본 우파정권에 대하여 한국정부가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동안 중국이 이를 강하게 비판했다. 일본의 일부 양심세력들도 우경화의 효과를 우려한다.
우리는 지난 ‘IMF 사태’에서 경제는 항상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퇴행할 수 있다는 것을 체감했고, 대통령 탄핵국면에서 정치가 퇴행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거기에는 항상 정치지도자의 역사적 무감각과 아집, 소통 부재가 있었다. 이제 우리는 정치와 경제뿐 아니라 역사도 퇴행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진보와 보수가 힘을 합쳐 만들어온 것이지만, 현 정부의 친일 일변도 정책은 한국 보수주의의 궤도를 심하게 이탈한 것이다. 일본과의 미래지향적 협력이 곧 일본의 극우파를 대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라의 토대가 무너지면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큰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위 기고문은 다산연구소 다산포럼에 실린 글입니다.
☞원문: 역사의 퇴행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