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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육영수 다큐’에 속지 말자, 이 영화의 불쾌한 노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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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실을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조지 오웰, <1984> 중에서

정치와 역사는 따로 떼어놓고 바라볼 수 없다. 극단적으로 양분된 현대 정치판에서 과거의 역사를 점거하는 일은 직접적이고 실재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 현실 정치세력이 이승만으로부터 박정희, 김영삼과 김대중, 다시 노무현에 이르는 지도자를 계승한다 주장하는 일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실체가 있는 계승이든, 허울뿐인 구호든 간에 현실정치 가운데서 효력을 발한단 점만큼은 같다. 그렇지 않았다면 수많은 정치인이 일면식도 없는 옛 인물의 무덤을, 생가를, 관련된 온갖 유적까지를 방문하는 일은 없었을 테다.

박정희는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호감도 평가에서 꾸준히 상위권에 오르는 유력한 인물이다. 노무현을 제외하고는 그와 비슷한 지지를 받는 인물이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조사업체와 방식을 가리지 않고 지난 십수 년 간 그는 매 조사마다 선호도 1, 2위를 다퉈왔다. 4.19 혁명을 군홧발로 짓밟고 일어나 18년 간 집권한 독재자란 평가에도 꺾일 줄 모르는 호감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좋든 싫든 한강의 기적이라 불린 산업화, 그 성취의 상징적 존재가 박정희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는 일이다.

확고한 정치적 자산을 가졌으니 그 유산을 차지하기 위한 노력도 끊이지 않는다. 경제발전과 성취에 따르는 낭만, 독재와 민주화탄압 사이엔 무시할 수 없는 격차가 있기에 그 유산을 계승할 수 있는 이도 정해져 있다.

한국사회에서 민주화와 진보를 주창하는 이가 박정희의 유산을 계승할 수는 없다. 반면 영남을 기반으로 한 지역주의 정치세력과 기득권적 보수세력 치고 박정희라는 정치적 자산을 탐내지 않기란 힘든 일이다. 정치적 색채에서 얼마 닮은 곳 없는 윤석열 정부가 박근혜를 수차례 만나고 박정희 생가를 찾는 등 접점을 만들려 시도하는 데도 이러한 이유가 있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 영화 <그리고 목련이 필때면> 포스터 ⓒ 다자인 소프트

육영수 앞세운 현대사 다큐, 그러나

<그리고 목련이 필때면>은 박정희의 유산, 즉 현실정치에 반영될 수 있는 자산이 어떤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는 작품이다. 지난 수년 간 유행한 정치인 다큐, 특히 보수 정치인 다큐의 문법 그대로 과거 자료에 여러 인물의 인터뷰를 덧대고 일부 재현과 평가를 넣어 완성했다. 가수 김흥국이 제작하고 고두심과 현석이 나레이션을 맡았으며, 영화판에서 얼마 알려지지 않은 윤희성 감독이 연출했다.

‘목련’이란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 영화는 박정희란 개인을 넘어 그의 동반자였던 아내 육영수를 주요하게 다룬다. 정반대의 의미로 오늘의 영부인 또한 그 자리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지만, 한국인에게 영부인의 상을 가장 깊게 새긴 인물이 육영수란 사실엔 반박하는 이가 얼마 되지 않을 테다.

세계 많은 나라 독재자의 아내가 극심한 사치행각으로 국민적 공분을 일으켰던 반면, 육영수 여사의 검소함과 사회적 약자를 보살피는 행보엔 반대파조차 고개를 끄덕일 정도다. 필리핀의 이멜다 마르코스, 베트남에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수행한 쩐 레 쑤언, 전두환의 아내 이순자 등이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를 생각해보면 그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육영수 여사와 한 시대를 함께 한 나이든 이들 중엔 어린 나이에 계모와 그 자식 가운데서 살아갔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 또 전쟁 중 남장을 하고서 군인이던 박정희를 찾아가 만났던 이야기를 옛날 동화처럼 떠올리는 이가 적지 않다. 여기에 더해 영부인 시절 독일을 찾아 간호사와 광부들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거나 어린 노동자며 고아들, 또 소록도의 한센병 환자들을 찾아 위로한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이쯤이면 왜 진보진영에서조차 그녀의 이야기를 함부로 하지 않는지 단박에 이해 된다. 육영수 여사는 살아 있을 적엔 유신정권의 훌륭한 자산이었고, 또 죽어서는 보수세력의 잠재적 유산이 될 여지가 충분한 것이다.

▲ 영화 <그리고 목련이 필때면> 스틸컷 ⓒ 다자인 소프트

<그리고 목련이 필때면>은 한국사회가 박정희와 육영수, 지난 시대의 유산을 대하는 한 가지 태도를 비춘다. 흔히 보수세력이라 불리는 이들이 조국 근대화의 영웅이며 민족주의의 대표이자 낭만적 절대 대통령상으로서 박정희를 추앙하고 소화하려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비친다. 또 박정희를 넘어 이승만으로 이어지는 저들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김구를 배척하는 태도가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영화는 지난 시대의 여러 인물들을 등장시켜 죽은 박정희에게 ‘박비어천’가라 해도 좋을 찬양을 바친다. 그들에 따르면 박정희는 따뜻한 인간성을 가졌고, 울보라 부를 만큼 눈물이 많은 사람이다. 더불어 조국의 민중들을 가난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열망이 있고, 일찌감치 관광산업을 비롯한 산업화의 큰 비전을 가진 식견 있는 지도자다. 그리하여 앨빈 토플러나 헨리 키신저, 덩샤오핑 같은 해외 유명인사도 존경과 인정의 뜻을 밝혔을 만큼 대단한 인물이란 것이다.

그러나 그 대통령이 반대 진영으로부터 부당한 비난을 사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고작 중소위 1년을 한 걸 가지고 친일이라고 하는데 어불성설’이란 주장이 대놓고 몇 차례 등장한다.

일본군 출신 조선인을 광복군으로 적극 편입한다는 한국독립당의 방침에 따라 박정희를 비롯한 만주군관들이 베이징의 광복군 3지대 군관으로 임관한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해방 후 광복군이 됐다 해서 일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혈서를 쓰고 독립군을 때려잡는 만주군관학교로 간 이력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요컨대 박정희에 대한 영화의 평가는 지나치게 편향적이다.

▲ 영화 <그리고 목련이 필때면> 스틸컷 ⓒ 다자인 소프트

송진우 죽음이 김구탓? 도 넘은 왜곡

뿐만 아니라 미군정기 신탁통치를 두고 찬탁과 반탁 사이에서 현실적이자 중도적 입장을 취했던 송진우의 죽음을 영화는 마치 백범 김구의 탓인 양 연출한다. 송진우는 김구와 신탁을 두고 2시간 여의 토론을 한 뒤 집으로 향했다가 한현우에게 난사당해 죽음을 맞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탁을 내세운 김구 및 임시정부 요인들과 각을 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미군정이 실제 지배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한 것임에도 송진우의 이 같은 입장을 영화는 제대로 다루려 들지 않는다. 한현우가 김구의 부하라는 확증을 영화 곳곳에서 흘리기까지 한다.

반면 체포 뒤 무기징역까지 선고받았던 한현우가 한국전쟁 중인 1951년에 이르러 방면돼 거리를 활보했고, 후엔 일본으로 건너가 살았다는 이야기는 전하지 않는다. 이승만의 천하가 된 뒤 한현우가 자유를 얻었단 사실은 여러모로 시사점이 크지 않은가.

김구를 비롯한 임정 요인들이 귀국한 뒤 거사를 논하는 모습을 마치 룸살롱을 연상시키는 공간에서 맥주병들을 늘어놓고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표현하는 장면, 또 안두희가 김구를 암살한 이유로 송진우와 장덕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들어 그를 처단하려 했다고 주장하는 대목, 이승만이 북한의 남침계획을 미리 내다보고 남한의 단독정부를 수립하기로 했다는 둥의 이야기가 등장하기도 한다. 역사적 근거가 미비한 건 물론 왜곡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 같은 설정을 마치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주장하는 태도가 무척이나 위험하게 다가온다.

▲ 영화 <그리고 목련이 필때면> 스틸컷 ⓒ 다자인 소프트

영화는 영부인의 역할에 충실했을 뿐 현실정치, 특히 이념적 요소에 개입하지 않았던 육영수 여사를 간판으로 세운 뒤 과거의 역사를 교묘히 뒤틀어 놓는다. 5.16 군사반란은 조국을 위한 무혈혁명이라 평가하고, 민주화 인사들을 탄압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선 청렴결백하고 인정 많은 인물이란 입장을 고수한다.

국민의 기본권을 억압하는 독재, 재벌친화적인 산업정책을 펼치며 빈부격차와 노동자 착취문제를 방치한 점, 또 지역감정을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한 사실 등 기초적인 평가조차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이쯤이면 역사가 아니라 프로파간다 전달수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리고 목련이 필때면>의 제작을 지난해 <건국전쟁>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면 결코 가볍게 지나칠 수 없다. <건국전쟁>에서도 지나치게 폄훼됐던 김구가 이 작품에서도 적극 왜곡되고 있다는 점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남북으로 갈라진 조국을 끝끝내 이어 붙이려 했던 김구의 선택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막으려 했던 의지 때문이었다. 좌우로 갈라져 서로를 비난하는 오늘의 정치판에서 가장 간절한 게 김구와 같은 태도일 텐데, 사실을 호도하면서까지 그를 까내리기 바쁜 영화가 참담하기까지 하다.

영화는 오히려 현 보수집단과 박정희, 그리고 이승만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또 그 반대편에서 김구에 이르는 민주, 민족진영의 색채를 선명히 드러낸다. 영화 속에서 맞부딪히는 박정희와 김구, 둘 가운데 민족과 애국을 표상하는 보수주의자가 과연 누구인가. 북과 편을 갈라 제 집권을 공고히 하려 든 박정희인가, 그조차 끌어안고 비극을 막으려 든 김구인가.

영화가 그저 박비어천가를 부르는 데서 그치지 않고 김구의 폄훼를 거듭한다는 사실이 도리어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선명히 내보이고 있는 건 아닐까.

▲ 박정희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공개한 <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자 기사. 기사는 박 전 대통령이 만주군에 지원하며 ‘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한다 박정희)’라는 혈서를 동봉했다고 전하고 있다. ⓒ 민족문제연구소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2024-08-22>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육영수 다큐’에 속지 말자, 이 영화의 불쾌한 노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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