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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이광수의 친일은 그저 국가보안법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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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이광수

일제강점기 막판에 친일을 주도한 그룹은 일종의 뉴라이트였다. 대한제국 멸망 이전부터 활동하던 원조 친일파들은 1919년 3·1운동 이후로 점차 퇴조했고, 1930년대 중반부터는 전향한 독립운동권 출신들이 친일을 이끌어갔다.

3·1운동에 당황한 일본은 무단통치를 문화통치(문화정치)로 바꾼다며 언론·출판·집회의 자유를 부분적으로 인정했고, 이는 민족주의세력 일부가 식민체제의 제도권 내로 편입되는 환경을 조장했다. 이런 속에서 식민당국과 보조를 맞추는 일에 익숙해진 세력이 친일진영의 새로운 주류로 올라섰다.

독립운동권 출신이 많은 일제 막판의 친일파들은 종래의 친일 우파를 뺨치는 솜씨로 한국인들을 태평양전쟁으로 몰아넣었다. 강제징용·위안부·강제징병 같은 대규모 강제동원은 친일 우파로 전향한 이들 ‘뉴라이트’의 협력으로 인해 훨씬 수월하게 이뤄졌다.

그런 ‘뉴라이트’들을 대거 배출한 것이 1937년의 수양동우회 사건이다. 도산 안창호의 영향을 받는 민족주의자 약 180명이 치안유지법 위반에 걸려 이 공안사건에 휘말렸고, 이들 대다수는 얼마 안 있어 친일파로 전향했다. 일제는 처음에는 독립운동을 했던 이 세력의 지원을 받으며 식민지 한국인들을 보다 용이하게 세계 침략에 동원했다.

그 시절 ‘뉴라이트’의 대표적 인물은 소설가 이광수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 이광수 편은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안창호 등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6개월 후 병보석으로 풀려났다”라며 “1938년 3월 10일 정신적 스승인 안창호가 사망하자 충격을 받고 실의에 빠졌으며, 11월 3일 병보석 상태에서 수양동우회 사건의 예심을 받던 중 전향을 선언했다”고 설명한다.

이광수는 1919년 3·1운동을 촉발시킨 2·8독립선언의 작성자였다. 조선청년독립선언으로도 불리는 이 선언문을 읽어보면, 도쿄 유학생들의 뜻을 모은 것이라 할지라도 작성자인 27세의 이광수가 이때만 해도 얼마나 열혈 민족주주의자였는지를 느낄 수 있다.

선언문은 일본의 한국 지배가 사기·공갈 수준이라고 비판했다. 선언문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행위는 사기와 폭력에서 출(出)한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일본의 지배를 “위대한 사기의 성공”으로 규정했다. 그런 뒤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과 군대 해산과 국권침탈은 “조선민족의 의사가 아님”을 선언했다.

선언문은 서양열강인 미국과 영국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했다. 너희도 일본의 한국 침략을 도왔으니 책임을 져야 하지 않느냐고 비판했다. “세계 개조에 주인 되는 미(米)와 영(英)은 보호와 합병을 솔선 승인한 이유로 차시(此時)에 과거의 구악을 속(贖)할 의무가 유(有)하다 하노라”라고 선언했다. 일본만 악한 게 아니라 미국과 영국도 구악을 지고 있으니, 두 나라도 속죄의 의무가 있다고 천명했던 것이다.

친일로 전향한 뒤 180도 다른 인물로 변신

▲ 1946년의 춘원 이광수 ⓒ 위키미디어 공용

선언문 작성을 주도한 이광수는 곧이어 여운형이 주도하는 상하이의 신한청년당에서도 활약하고 임시정부의 사료편찬위원회 주임으로도 활동하고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으로도 일했다.

그는 이듬해인 1920년에는 흥사단에도 참여해 안창호와 긴밀한 관련을 맺었다. 1995년 11월 9일 자 <조선일보>에 인용된 1936년 당시의 일제 경찰 보고서에는 “안창호의 심복 이광수”라는 표현이 들어 있다. 일제가 안창호의 심복으로 인정할 정도로 국내 민족주의운동의 핵심 인물로 성장했던 것이다.

그랬던 그가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되고 친일로 전향한 뒤로는 180도 다른 인물로 변신했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11권 이광수 편은 그가 시·소설·산문뿐 아니라 연설·좌담회·방송 등을 통해서도 친일을 하고 임전대책협의회·대화동맹·조선문인협회·조선문인보국회 참여를 통해서도 친일을 했다고 기술한다. 진상규명위원회는 이런 활동을 통해 학병·지원병·징병 참여를 선동하고 창씨개명·내선일체·황민화를 선전하며 침략전쟁과 대동아공영권을 찬양했다는 이유로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했다.

그를 그렇게 만든 결정적 계기인 수양동우회는 관련자 전원이 1941년에 무죄판결을 받은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일제가 민족주의자들을 회유하기 위해 일으킨 일종의 조작 사건이었다. 수양동우회 사건이 발생한 직후에 나온 1937년 6월 9일 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일제 종로경찰서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정인과가 미국 기독교로부터 거액을 송금받은 사실을 근거로 사건을 그렇게까지 확대시켰다.

일제 경찰은 그 돈이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이 “모종의 목적”을 위해 국내에 송금한 자금일 것이라고 간주했다. 그런 뒤 정인과 등을 그해 5월 중에 순차적으로 체포하고(5월 30일 <조선일보>), 이를 바탕으로 수양동우회에 대한 본격 체포에 착수했다. 위 6월 9일 자 <동아일보>는 “7일 아츰에는 종로서 고등계원이 총출동하야 대(大)긴장리에 이광수·박현환·김윤경·신윤국·한승인 등 5명을 인치하야 유치”했다고 보도했다.

일제가 수양동우회에 적용한 핵심 죄목은 치안유지법 위반이었다. 이 법은 명칭과 달리 실상은 국가보안법이었다. 수양동우회 재판이 막바지에 달한 때인 1941년 3월 8일 개정된 치안유지법 제1조는 “국체를 변혁하는 것을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하는 행위를 처벌 대상으로 규정했다. 국가체제 보안을 목적으로 하는 이 법은 해방 뒤 친일파들에 의해 국가보안법이라는 이름으로 거듭났다.

그런 악법에 걸려 구속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친일파로 전향했지만, 그렇다고 이광수가 억지로 친일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게 말하기에는 그가 벌인 친일의 성과가 너무나 많다. 그가 얼마나 많은 친일을 했는지는 위 진상규명보고서 이광수 편의 분량에서도 확인된다.

친일파 1명에게 평균 20쪽 미만을 할애하는 이 보고서가 이광수의 친일을 정리하는 데 할애한 분량은 95쪽이다. 활동 결과가 고스란히 문서로 남는 문필가이기 때문에 정리할 만한 내용이 많았으리라는 점을 감안한다 해도, 열성적이고 자발적으로 친일 글쓰기를 하지 않았다면 그만한 분량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쓴 글들을 읽어봐도, 억지로 썼다는 느낌은 잘 생기지 않는다. 식민지 한국인들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절절함이 느껴질 만한 글들이 많다.

그의 친일이 너무나 열성적

1945년 1월에 대화동맹 행사에서 낭독한 ‘모든 것을 바치리’라는 시는 “아아 조선의 동포들아 / 우리 모든 물건을 바치자 / 우리 모든 땀을 바치자 / 우리 모든 피를 바치자”고 한 뒤 “내 생명 그것조차 바쳐 올리자 / 우리 임금님께 우리 임금님께”라고 호소한다. 독립운동가 시절에 적대했던 일왕(천황)이다. 그런 일왕을 ‘우리 임금님’으로 부르는 낯 간지러움을 감내하려면 상당한 정도의 심경 변화가 있었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는 1941년 1월호 <신시대>에 발표한 ‘우리 집의 노래’에서는 “우리나라 우리 집이 태평하소서 / 몸에 가득 아침하늘 햇볕을 받아 / 공송하게 가지런히 허리 굽혀서 / 우리 임금 천황폐하 겨오신 곳을 / 마음 모아 정성 모아 요배 드리세”라고 읊었다. 일왕에 대한 애정을 표시하는 유사 표현들이 다른 시들에도 나타난다.

이런 식으로 그는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친일 글쓰기 및 연설과 방송 등을 열심히 했다. 일본이 공짜로 친일을 시킨 것은 아니었다. 그의 활동은 거액은 아닐지라도 친일 재산을 발생시키는 경제적 행위였다. 돈이 생기는 쪽으로 열심히 친일을 했으니 자발성이 없었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수양동우회 사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했다고 말하기에는 그의 친일이 너무나 열성적이었다.

그런데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친일파가 되기 훨씬 전부터 그런 싹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만하다. <친일인명사전>은 그가 “1903년 동학에 입도”했다고 한 뒤 “1905년 8월 일진회의 추천으로 유학생에 선발되어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기술한다.

동학 출신 친일파인 이용구가 교도들을 이끌고 일진회에 합류(1904.8.)한 뒤에 그들의 추천을 받아 일본 유학을 갔다. 13세 때의 일이기는 하지만, 자신이 친일단체의 도움을 받고 유학을 떠난다는 사실은 얼마든지 인식할 수 있었다. 3·1운동 때 10대 초반의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배출된 점을 감안하면, 이광수처럼 똑똑한 인물이 나이 13세에 친일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으리라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그가 수상하다는 점은 수양동우회 사건 1년 전에도 발견됐다. 1933년 8월에 조선일보사 부사장이 됐다가 이듬해 5월에 그만둔 그는 1936년 6월 1일에 아베 미쓰이에 흉상 건립의 발기인으로 나섰다. 아베 미쓰이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만든 경셩일보사의 초대 사장이었다. 수양동우회 활동을 하면서 이런 인물을 위한 흉상 건립에도 참여했던 것이다.

2·8독립선언 때보다 훨씬 왕성하게 전개된 이광수의 친일은 일진회의 추천을 받아 일본 유학을 떠난 10대 초반 때부터 서서히 싹틔워진 것인지도 모른다. 수상한 기질을 드러내던 그는 전향 이후에는 매우 열정적으로 친일 활동에 매진했다. 친일파들의 반민족행위를 ‘국가보안법’의 탓으로만 돌릴 수 없다는 점을 그의 행적은 잘 시사한다.

김종성 기자

<2024-08-18>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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