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일왕의 신민으로서 일본제국주의에 충성을
바친 간도특설대의 황군 장교 백선엽
이용창 연구위원
대한민국의 독립정신을 기리고 독립운동 관련 연구와 선양 사업을 목적으로 하는 ‘독립’기념관이 ‘○○’기념관이 되려나 보다. 8월 6일자로 독립기념관 13대 관장에 임명된 김형석 씨가 8일 취임 기자 간담회에서 했다는 말을 보니 ‘독립’에는 관심이 없고 『친일인명사전』의‘오류’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했다니 말이다.
2018년 10월 국회에서 열린 국회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있었던 에피소드 하나. 이날 국정감사에서는 1만 5000여 명의 「독립유공자 공적 정보」(공훈전자사료관 제공)와 『독립유공자 공훈록』(책자)에서확인되는수많은오류를어떻게바로잡을것인지에대한질의가있었다.이에 대해 당시 국가보훈처장은 ‘(가칭)독립유공자 공적 검증위’를 구성해 ‘보훈처와 독립기념관, 민족문제연구소가 참여하는 전수조사 실무 TF팀’을 구성하고 2019년 1월부터 2023년까지 전수조사를 마치겠다는 중장기 계획을 밝혔다(「오마이뉴스」, 2018.10.25). 민족문제연구소는 수년간 독립유공 서훈자 중 친일 행위자, 동일인에게 이중으로 한 중복 서훈, 심지어 타인의 공적을 탈취해 세탁한 가짜 독립운동가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면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안해 왔으나 전혀 반응이 없다가 민족문제연구소와는 전혀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전수조사 계획을 발표해버렸다.
의문의 ‘1승’인지, ‘1패’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번에 임명된 ‘독립’기념관장이 ‘친일’ 문제를 언급하면서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을 언급해 이 또한 의문의 ‘2승’째인지, ‘2패’째인지 모르겠다. 차라리 『친일인명사전』의 가치를 인정하고 개정·보증을 위해 예산을 지원하는게 좋지 않을까?
김형석씨는 관장 임명 전부터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안익태와 백선엽의 ‘친일 행적’이 잘못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보자. 안익태가 ““동양 3국이 서로 화합하고 개화·진보하면서 동양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해 진력하자”고 외치던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마주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 안익태에게 ‘음악’은 친일이나 극일을 뛰어넘어 음악을 통한 세계평화를 이루는 데 가장 중요한 수단인 동시에 목적이었다.”(김형석, 2022, 『끝나야 할 역사전쟁』, 동문선,346∼347쪽)라고 하였다. 같은 순흥 안씨라고 ‘에키타이’(일본 유학 중에는 ‘안 에키타이 あん えきたい’, 미국과 유럽에서 활동하던 1938년부터는 ‘에키타이 안 Ekitai Ahn)를 감히 안중근 장군과 비교하다니. ‘세계인’ 안익태의 행태로 보자면, 전쟁광 일본제국주의의 ‘대동아공영론’에 동조해 자발적이고 지속적이고 적극적으로 충성했던 ‘제국주의자’이자 일본·독일·이탈리아 3축의 ‘세계 정복’에 발맞춰 ‘음악’을 ‘나치 프로파간다’로 퇴색시켰을 뿐이다.
김형석 씨는 이미 여러 곳에서 백선엽과 선친과의 관계, 알오티씨(ROTC) 제도를 창설한 백선엽과 자신이 복무한 관계 등을 언급하면서 적극적으로 옹호해 왔다. 예컨대 백선엽이 “친일파라는 불명예를 쓰고 별세했다. …… 설령 그에게 ‘친일의 과오’가 발견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구국의 공적’마저 지울 수는 없다.”(김형석, 『끝나야 할 역사전쟁』, 358쪽)라고 하였다. “친일파라는 불명예”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백선엽 본인의 친일 행적에 대한 역사적 평가이다. “한국전쟁의 영웅”에 앞선 백선엽 개인의 역사인 것이다. 100년의 삶에서 중앙육군훈련처(中央陸軍訓鍊處, 일명 봉천군관학교奉天軍官學校)에 입학한 1940년 12월부터,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해 간도특설대(間島特設隊)로 옮겨 복무했으며 1945년 ‘헌병 중위’로 옌지헌병분단(延吉憲兵分團)에 배속되어 군관으로 근무하던 중 8월 해방을 맞을 때까지, 일본제국주의에 충성한 신민(臣民)으로서 황군(皇軍) 장교로 복무한 친일 행적은 역사적 ‘사실(史實·事實)’이기에 그 “불명예”도 온전히 본인의 것이다.
무장 항일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된 만주 동삼성(東三省, 길림성吉林省·랴오닝성遼寧省·헤이룽장성黑龍江省)에서 일본제국주의의 황군 장교(엄밀하게는 만주국군 장교)로서 항일 부대를 ‘토벌’하고 동포를 학살한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행적은 백선엽 본인도 자술(自述)한 바이다. 이런 행위를 저지른 자가 ‘친일파’가 아니라면 어떤 행위를 ‘친일파’로 규정할 수 있을까. 김형석 씨가 독립기념관장 후보자 면접 과정에서 이종찬 광복회장이 일제강점기 우리 국적이 어디였느냐는 질문에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사람의 국적은 일본’이라고 대답했다고 하니, 일왕의 신민이자 황군으로 복무했던 백선엽을 존경할 수밖에.
‘친일파’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주장하는 것이 ‘공과론(功過論)’이다. 도대체 ‘공과’라는 걸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모르겠다.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보자. ‘예로부터 공과는 서로 가릴 수가 없다’, ‘(관원들의) 공과를 평정(平定)한다’, ‘공과를 비교하여 처결’ 등이 대부분이다. 특히, ‘공과를 서로 의준(依準) 한다’라는 것은 ‘공’과 ‘과’를 ‘사실에 근거해 평가 또는 판단’해서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그 사실을 밝히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공’에 대해서는 ‘상’을, ‘과’에 대해서는 ‘벌’을 주는 것이 법을 집행하는 기준이 아닌가. 작금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경찰·검찰뿐만 아니라 정부와 집권세력이 앵무새처럼 되뇌는 ‘법과 원칙’도 같은 의미이다.
김형석 씨는 지난 6월에 있었던 제3회 백선엽장군 서거 4주기 추념 학술세미나 발표문에서 「백선엽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에서 이렇게 말했다.
- ‘역사적 인물’을 평가하는 기준은 그가 살던 시대의 ‘역사적 과제’에 어떻게 부응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인물이 살아온 삶의 자취는 물론이고, 대상 인물의 내면세계까지 분석하여 평가하는 것이 이상적인 방법론이다.
- 우리나라 현대사는 일제의 잔혹한 식민지 통치를 경험한 집단 기억과 친일세력을 청산하지 못한 아쉬움으로 ‘역사의 문제’를 학문적으로 정리하지 못하고 ‘법적인 규정’을 만들어 비판했다.
- ‘역사적 인물’ 백선엽의 삶은 일제 치하의 논란과 상관없이 해방 후 국군의 건군과 한국전쟁 시 공과를 종합적 계량적으로 규명해야 한다.
1. 은 앞 문장과 뒤의 문장이 서로 모순된다. ‘역사적 평가’를 하자면서 ‘내면세계까지 분석·평가’하자고? 심리를 분석하거나 소설로 가공하거나 인물평전을 쓰고 싶은 것인가? 『친일인명사전』은 백선엽 자신이 살던 시대에 자발적·지속적·적극적으로 일본제국주의에 충성하면서 황군 장교로서 항일 부대를 ‘토벌’하고 동포를 학살한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한 행적을 가감 없이 밝혔다. 어디에 오류가 있나.
2. 는 모두 틀렸다. 친일 청산을 방해하고, 정작 법률을 위반한 것은 ‘대통령’ 이승만이다. 해방·광복·독립한 1945년 8월 15일로부터 3년여가 지나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로 제헌국회가 성립되고 7월 12일에 헌법이 제정되었다. 헌법 제101조는 “국회는 단기 4278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라고 하였고 이를 근거로 9월 22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이 법령 제3호로 공포되었으며 10월 22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출범하였다. 그러나 ‘대통령’ 이승만은 국회의 동의도 없이 경찰을 동원해 반민특위를 무력화함으로써 결국 실질적인 친일파 처벌은 역사적 과제로 남았다. 이후 ‘친일’은 금기어가 되다시피 했으며 독재를 유지하고 민주화를 탄압하는 도구로 활용되었다. 그러니 ‘역사의 문제’를 학문적으로 정리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고, 한편에서는 ‘법적인 규정’을 만들어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민간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20여 년 동안 수백 명의 전문 연구자와 함께 자료·문헌 조사 및 분석을 거듭하였고 1년여 동안 100여 건의 이의신청을 거쳐 선정한 4,389명의 친일 행위를 『친일인명사전』(1∼3)에 수록하였다. 이 과정에서 전국대학의 교수 1만여명이 제2의 반민특위를 만들자는 ‘친일인명사전 편찬 지지 전국 교수 일만인 선언’에 동참했고 시민들의 자발적인 성금 등도 『친일인명사전』발간에큰 힘이되었다.『친일인명사전』이야말로 친일파의 행적을 “학문적으로 정리”한 것이고 후손들이 제기한 모든 소송도 완승했으니 “법적”인 객관성과 공공성과 엄밀성까지 확보한 것이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선정한 근현대사 전공 석박사 학자들이 그동안 엄두를 못 냈던 방대한 자료를 조사·수집하고 이를 면밀하게 분석 및 검증하는 한편, 개별 행위의 특별법 적용과 이해관계인 등의 이의신청을 거쳐 5년여 동안 1,006명의 친일반민족행위자를 확정했으며 이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친일반민족행위 결정』(Ⅳ-4∼19)으로 발간하였다. 『보고서』또한 “학문적으로 정리하지 못”한“역사의 문제”가 있었기에 “법적인 규정 만들어 판단”한 것이고 재판부도 이를 인정하였다.
3. 은 반복되는 이야기이다. “백선엽의 삶은 일제 치하의 논란과 상관 없”다니. 시공간을 넘나드는 초월인인가? 한국전쟁 때의 ‘공’이 많다면 20대 백선엽의 친일 행위도 인정해야 하지 않나? ‘공’이든 ‘과’든 이를 “계량적으로 규명”하는 건 역사의 영역이 아니다. 다시 공부해야겠으니 어디서 ‘역사학자’라고 하지 마시라. 역사(학)란 무엇인가? 석학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있는 사실을 가감 없이’라는 것은 역사 연구자가 갖춰야 하는 기본적인 자세다. 곡학아세(曲學阿世)! 역사를 계량화하고 날조하고 왜곡하는 것! 우리는 역사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잘못’에 대한 ‘반성’ 없이는 한낱 껍데기에 불과하다.
‘공’과 ‘과’를 주관적인 잣대로 평가하고 그 기준에 따라 ‘공’이 많으니 ‘과’가 적으니 하는 단순 무지한 논리를 주장하는 게 「뉴」라이트의 본질이다.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의준’하는 것은 역사시대 이후 인간이 공유해온 소중한 자산 중의 하나이다. ‘공’이 있으니 ‘과’를 덮자는 것은 ‘공’과 ‘과’를 주관적으로 수량화해서 더 많은 것을 기준으로 평가하자는 것이다. 설령 ‘공과론’으로 ‘공’을 포장한다 해도 ‘과’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우리 현대사에서 일어난 수많은 비극은 ‘공’을 잣대로 ‘과’를 숨기고 지우고 외면하는 데 진력해 온 비역사적이고 비인간적인 행태의 결과이다.
김형석 씨는 본인의 주장을 증명하는 게, 본인이 쓴 저술에 모두 담겨있다는 듯이 이야기한다. 기자들이 질문하면 책을 보란다. 책을 보고도 이해할 수 없으니 직접 이해할 수 있게 전달해달라는데도 말이다. 그러니 위에서 인용한 내용도 과히 ‘공과론’ ‘상황론’ ‘희생론’에 불과하다. 「뉴」라이트가 아니라고 강변하는 데 온통 말과 글이 「뉴」라이트, 더 나아가 현대판 ‘친일’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친일인명사전』의 오류를 바로 잡겠다고 하니,그 자체로 뭐라고 하지는 않겠다. 당연히 4,389명의 행적을 1차 자료를 기준으로 전 생애의 행적을 밝히다 보니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민족문제연구소는 여전히 『친일인명사전』을 수정·보완하고있을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자료를 수집해 데이터를 축적하고 있다. 현재까지 『친일인명사전』에 오류가 있다고 하더라도, 교정·교열 과정에서 놓쳤거나 자료에 따라 다르게 기록된 행적 등을 특정하는 과정에서 착오가 있었던 것이지 ‘친일 행위’ 자체가 잘못된 것은 한 건도 발견되지 않았다.
궁금한 것 하나. 김형석 씨 본인은 “『친일인명사전』을 다 보지는 않았으나 오류가 적지 않다”라고 하였다. 적어도 본인이 관심 있는 안익태와 백선엽은 검토했을 터이니 『친일인명사전』의 오류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지적해 주기 바란다. 극히 주관적이고 관념적이고 「뉴」라이트적이지 않은, 역사학자 다운 답변을 바란다.
이제 구체적으로 백선엽과 간도특설대의 행적을 이야기해보자. 백선엽은 일종의 ‘회고록’ 3개를 남겼다.
① 白善燁, 1989, 『(한국첫4성장군백선엽:6·25한국전쟁회고록)軍과나』, 대륙연구소
– 한글본으로 국내에서 발간
② 白善燁, 1993, 『對ゲリラ戰: アメリカはなぜ負けたか』, 原書房
– “대게릴라전: 미국은 왜 졌는가”, 일본어본으로 일본에서 발간
③ 白善燁, 2000, 『(白善燁 回顧錄)若き將軍の朝鮮戰争 TheKoreanWar』, 草思社
– “(백선엽 회고록)젊은 장군의 조선 전쟁”, 일본어본으로 일본에서 발간
‘회고록’이기는 하지만 일생을 모두 촘촘하게 담은 것은 아니다. 주로 한국전쟁 당시의 ‘영웅담’ 위주이고, 일부 간도특설대 관련 내용이 있다는 게 중요하다. ①의 한글본에는 그저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하다가 해방을 맞았다고 했으나, ②·③의 일본어본에는 간도특설대의 임무와 행위, 특히 본인의 역할과 소회를 나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1940년 12월 봉천군관학교 입학부터 간도특설대를 거쳐 옌지헌병분대 복무까지 전반적인 행적과 내용은 다음의 자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④ 「 ( 1941년 10월)만주군관학교생도명부(초)」(1941年 10月)滿洲軍官學校生徒名簿(抄)」[민족문제연구소 소장본]
⑤ 만주국군간행위원회(滿洲國軍刊行委員會), 1970, 『만주국군』(滿洲國軍), 난성회(蘭星會)
⑥ 김석범(金錫範)·정일권(丁一權), 1987, 『만주국군지』(滿洲國軍誌)
⑦ 에가시라 미유키(江頭幸), 1984, 『만주국군헌병의회고(오족의 헌병)』(滿洲國軍憲兵の懐古(五族の憲兵)), 만헌회기록간행사무국(滿憲會記錄刊行事務局)
⑧ 『20세기 중국조선족력사자료집(1)』(중국조선민족문화예술출판사,2005)
이상 8개의 자료와 다수의 2차 자료를 활용해 『친일인명사전』발간 당시에는 확인하지 못한 백선엽의 생애 행적 전반, 특히 황군 복무 시기의 행적은 꼼꼼하게 정리해 놓은 상태다.
김형석 씨는 줄곧 백선엽은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했을 뿐이지 간도특설대의 만행과는 관련이 없다고 강변한다. 그러면서 백선엽이 ‘회고록’에서 밝힌 간도특설대 관련 언급을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학술세미나 발표문(PPT)의 「백선엽의 해명」 부분을 보자[붉은색(편집상 이탤릭체로 바꿈)과 강조 표기도 원본임].
백선엽의 해명
백선엽은 친일반민족 행위진상규명위원회로부터 질문을 받고 “간도특설대 초기의 동족 간 전투와 희생에 대한 가슴 아픈 소회를 밝힌 것일 뿐, 본인은 전투행위 사실이 전무했다. 명월구로 이동하여 주로 홍군 소속 게릴라를 상대했는데 나타나지 않아서 우리는 정보 수집이나 선무공작을 벌였다”고 해명하였다.
1. 백선엽이 말하는 ‘우리’는 ‘우리 부대’ 즉, 간도특설대를 가리킨다.
“우리 부대는 게릴라를 토벌하던 부대지만, 내가 부임했을 때는 게릴라 활동이 없어 순찰을 나가도 게릴라와 교전하는 일이 없었다.”
2. 백선엽은 간도특설대의 역사와 부대의 성격을 설명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문법적 문맥상으로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3. 따라서 당시 상황을 담은 사료들과의 비교를 통해 판단해야 한다.
“문법적 문맥상으로는 이해하기가 어렵다.”라는 것은 김형석 씨 개인이다. 문법적으로나 문맥상으로나 전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래서 “당시 상황을 담은 사료들과의 비교를 통해 판단”해 보자(다만, “당시 사료”라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래서 역사학에서는 1차, 2차, 3차 자료를 비교·분석해 가설을 세우고 이를 입증하는 방법론이 역사학 연구의 기본이다. 김형석 씨의 전공인 중국사 관련 연구도 그렇지 않은가?)
백선엽은 1920년 11월 평남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에서 태어나 6∼7세 때 평남 평양부 신리 216번지로 이사했다. 1939년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만주로 건너가 만주국이 초급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펑톈(奉天)에 세운 ‘봉천군관학교’에 1940년 12월에 입학해 1941년 12월 제9기생으로 수석 졸업했다.
갑자기 출신과 주소를 언급하는 것은 그의 창씨개명(創氏改名)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친일인명사전』의 「백선엽」항목에는 창씨명이 없다.당시에도 창씨명이 이것 또는 저것이라는 말이 많았고 제보도 있었으나 자료에서 검증되지 않아 보류해 놓은 상태였다. 그러다 ④의 자료(「(1941年 10月) 滿洲軍官學校生徒名簿(抄)」)의 일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 자료는 만주군관학교 동창회편집위원회가 작성한 것으로 ‘전우(戰友) 명부’ 중에 ‘현주소’가 유일하게 ‘조선’으로 기재된 ‘白川正雄’이 눈에 띄었다. 이하 주소는 ‘朝鮮 平壤府 新里 216番地’이고 당시 ‘21세’였다. 그래서 이 주소를 추적해보니 다름 아닌 백선엽이 6∼7세 때 이사한 ‘평남 평양부 신리 216번지’였다. 즉, ‘봉천군관학교’ 졸업 직전인 1941년 10월 현재 ‘시라카와 마사오=백선엽’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바오칭(寶淸)에 주둔하고 있던 만주국군 보병 제28단[연대]에서 3개월간 견습 사관으로 있다가 1942년 4월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해 헤이룽장성 자무쓰(佳木斯) 신병훈련소 소대장으로 복무하였다.
1943년 2월 젠다오성(間島省) 옌지현(延吉縣) 명월구(明月溝)에 주둔하고 있던 간도특설대로 전임해 근무하다 중위로 진급하였다.
백선엽은 간도특설대 복무 당시를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번호는 위 소개한 자료임).
① 백선엽, 『(한국 첫 4성 장군 백선엽: 6·25 한국전쟁 회고록) 軍과 나』, 111쪽
“봉천만주군관학교를 마치고 42년 봄 임관하여, 자므스부대에서 1년간 복무한 후 간도 특설부대의 한인부대에 전출, 3년을 근무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 그동안 만리장성 부근 열하성(熱河省)과 북경 부근에서 팔로군(八路軍)과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간도 특설부대에서는 김백일(金白一), 송석하(宋錫夏, 소장 예편), 김석범(金錫範, 중장 예편·해병대사령관), 신현준(申鉉俊, 중장 예편·초대 해병대사령관), 이용(李龍, 소장 예편), 임충식(任忠植, 대장 예편·국방장관 역임·작고), 윤춘근(尹春根, 소장 예편), 박창암(朴蒼岩, 준장 예편) 등과 함께 근무했다. 나는 45년 8월 9일 소만(蘇滿) 국경을 돌파해서 만주의 중심부로 진격하는 소련군을 만나 명월구(백두산 등반로의 입구)에서 무장해제를 당했다.”
② 白善燁, 『對ゲリラ戰 : アメリカはなぜ負けたか』
“1943년 2월 간도성(현재 길림성吉林省 동부) 연길현 명월구에 주둔하고 있던 간도특설대로 전임하였다. 여기서 처음으로 게릴라를 봤고, 토벌이란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다.”(24쪽)
“이러한 항일게릴라전이 가장 강력하게 가장 끈질기게 전개되었던 지역이 만주 동부의 백두산 산악지역이었다. …… 여기서 활동한 게릴라는 중국공산당의 지도로 조직되어 나중에 소련의 지원을 받았다고 한다. 중핵이 되었던 부대는 항일연군 제1로군이라 칭하고 중국인인 양정우(楊靖宇)를 총사령으로 하고 있었다. 그 밑에는 김일성(金日成), 최용건(崔庸健), 최현(崔賢), 오진우(吳振宇) 등이 있었고 후에 북조선의 수뇌가 되는 인물들도 있었다고 한다.”(26쪽)
“내가 간도특설대에 착임한 때는 게릴라 활동도 미약해져 있었고, 순찰은 자주 나갔으나 게릴라와 교전한 경우는 별로 없었으며 백두산에도 오를 수 있었다. 1939년 10월부터 1941년 봄까지 만주국군과 관동군 독립수비대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게릴라 활동도 봉쇄되어 있었다. …… 그런데 장기간에 걸친 만주 동부에서의 대(對) 게릴라전에서 간도특설대의 전과는 항상 대서특필되었다. 왜 간도특설대는 이러한 전과를 올릴 수 있었던가에 대해 설명하겠다. 여기에 대 게릴라전의 비결이 있다고 생각된다. 간도특설대는 당시까지 있던 국경감시대를 해산하고 그 하사관을 기간 요원으로 하여 1938년 12월에 편성되었다. …… 부대장과 중대장의 일부가 일본인, 나머지는 전부 한국인이었다.”(27쪽)
“왜 만주국에서 한국인부대가 편성되었는가 하면 이이제이적(以夷制夷的)인 발상으로 처음부터 게릴라를 토벌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아니라고 말할 수 없으나 내가 아는 한 일종의 특수부대로서 일본과 소련이 개전하면 소련 영내로 침투하여 교량과 통신시설 등 중요 목표를 폭파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 유일한 한국인 무장집단에 근무하고 있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간도특설대는 정예 그 자체였다.”(28쪽)
“이처럼 소규모이면서도 군기가 잡혀 있는 부대였기에 게릴라를 상대로 커다란 전과를 올렸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가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주의주장이 다르다고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여 반대로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그 때문에)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29쪽)
“간도특설대에서는 대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런 기분을 가지고 토벌에 임하였다.”(31쪽)
③ 白善燁, 『(白善燁回顧錄)若き將軍の朝鮮戰争 The Korean War』
“1943년 2월 나는 만주 동부의 한반도에 접한 간도성에 있던 간도특설대에 전임되었다.”(71쪽)
“간도성 일대는 게릴라의 활동지역이었기 때문에 계속하여 치안작전을 수행하느라 바빴는데, 간도특설대의 본래의 임무는 잠입·파괴 공작이었다.”(73쪽)
“내가 간도특설대에 착임한 1943년 초에는 게릴라의 활동은 거의 봉쇄되어 있었으나 그때까지는 대단했다고 한다. 관동군 독립수비대와 만주국군은 1939년 10월부터 1941년 봄까지 여기 동부 만주에서 대규모의 게릴라 토벌 작전을 수행하였다.…… 그중에서도 항상 대서특필할만한 전과를 올렸던 것은 간도특설대였다.”(74쪽)
일본제국주의의 황군 장교로 복무한 간도특설대에서 접한 게릴라는 ‘항일무장 독립군’이고, 이들을 ‘토벌’하면서 ‘토벌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이다. 이곳은 “게릴라의 활동지역”이어서 백선엽은 “치안작전을 수행하느라 바빴”으며 ‘항일 게릴라’를 ‘토벌’하는 “유일한 한국인 무장집단”인 ‘정예 간도특설대’에 근무하고 있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당연하게도 간도특설대는 부대이고 혼자 활동한 것이 아니므로 “우리”가 될 수밖에. 백선엽이 아니더라도 어느 누가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 ‘바로 나’라고 하겠나. 백선엽의 ‘회고’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 사례들이 적지 않고, 특히 주어가 없이 서술함으로써 교묘하게 책임을 회피하려는 표현이 특징적이다.
1944년 말 리허성(熱河省) 청더(承德)에 집결하여 장성선(長城線)을 넘어 중국 북부지방으로 들어가 이후 일본의 패전까지 주로 베이징(北京)의 동남지역인 기동지구(冀東地區)에서 팔로군 소탕 작전에 참여하였고, 그 공로로 여단장 상을 받았다.
이후 1945년 ‘헌병 중위’에 임명된 백선엽은 옌지헌병분단에 배속되어 복무하였다. 이 시기 백선엽의 행적은 만주국군 헌병으로 복무했던 자들의 모임인 만헌회(滿憲會)라는 곳에서 발간한 자료
⑦(『滿洲國軍憲兵の懐古(五族の憲兵)』)에서 확인된다. 여기에 1945년 5월 1일 옌지 헌병분대장으로 부임한 소네하라 미노루(曾根原實)가, 부하였던 백선엽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있다. 두 개의 파트인데 하나는 「옌지헌병의 회고(패전)」(延吉憲兵の懷古(敗戰)) 중의 일부이고, 또 하나는 「헌병과 출신 한국의 장군들」(憲兵科出身の韓國の將軍たち)에서 소개한 ‘백선엽’이다.
소네하라는 만계(滿系) 20명과 선계(鮮系) 20명으로 구성된 헌병분단원 40명을 거느렸다. 군관(軍官)은 3명(일·만·선 1명씩)이었는데 소네하라는 일계(日系), 백선엽은 선계, 나머지 1인은 만계였다. 소네하라는 일본제국주의가 패망하기 직전인 1945년 5∼8월까지 백선엽의 상관이었다. 4개월여의 짧은 기간이었으나 강렬한 인상을 받았나 보다. 1945년 8월 패망으로 만주국군이 해체되자 평양으로 돌아가면서 백선엽이 소네하라에게 거금 300엔을 건넸다고 한다. 이 돈은 백선엽의 어머니가 비상금으로 쓰라고 남겨둔 돈으로 ‘대장[소네하라]은 한 푼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쓰시라’고 했다는 것이다. 또 해방 후 여러 차례 일본을 방문한 백선엽이 도쿄(東京)에 갈 때마다 소네하라에게 전화를 걸었고, ‘옌지헌병분대 시절 짧은 기간 상관이었을 뿐인 내게 아직도 경의를 표하였다. 매우 의리가 있고 애정이 풍부한 인물이다.’라고 평하였다.
특히 소네하라는 「헌병과 출신 한국의 장군들」에서 ‘백선엽(白善燁) 구성(舊姓) 백천의칙(白川義則)’이라고 소개하면서 간략한 만주국군 경력과 함께 해방 후 ‘한국 최초의 육군 대장, 외교관으로 전직, 교통부 장관, 1982년 현재 한국종합화학공업주식회사 사장’이라고 덧붙였다. 해방 후 경력과 이름이 누가 봐도 백선엽이다. 궁금할 수밖에 없다. 앞서 1941년 10월 현재 ‘백선엽=시라카와 마사오(白川正雄)’였는데, 언제 다시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로 개명했을까? 오랫동안 항간에 떠돌던 ‘시라카와 요시노리=백선엽’이 맞는다는 것을 기록으로 확인한 것이다.
짧은 기간이었으나 만주국군 시절 백선엽의 직속 상관이었고 패망 당시 백선엽이 건넨 거금을 받았으며 해방 후에도 교류했던 소네하라가 백선엽의 창씨명을 헛갈릴 수가 있을까?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렇다면 왜 하필 ‘마사오’를 ‘요시노리’로 개명했을까? 1940년 2월 창씨가 시행되면서 일제의 선전대로라면 80% 이상이 창씨를 하거나 일부는 개명까지 했다. 강제와 위협 속에서 형식적으로 한국 성(姓)을 일본 씨(氏)로 바꾸는 ‘창씨’만 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백선엽은 창씨(백천)와 개명(정웅)을 동시에 했을 뿐만 아니라 어느 시점에 다시 개명(의칙)한 것이다.
‘요시노리’는 1932년 1월 상하이(上海) 파견군 사령관으로 부임했고 이해 4월 29일 홍커우공원(虹口公園)에서 윤봉길의 폭탄 의거로 중태에 빠졌다가 5월 사망한, 바로 그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를 떠올리게 한다. 소네하라가 일본인들의 우상이자 육군의 살아있는 전설이었고 일본군 사령관으로서 일본 전쟁사에서 국난으로는 처음으로 ‘순국’했다는 ‘요시노리’와 자신의 부하였던 ‘백선엽=요시노리’를 헛갈렸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윤봉길 의거는 만주를 넘어 중국 관내, 한반도, 바다 건너 해외까지 널리 알려졌다. ‘사령관 요시노리’는 중태에 빠졌다가 한때 회복의 기미가 보이자 일본 언론에서 연일 대서특필했고 일왕은 욱일대훈장과 남작 작위까지 하사하였다. 그러나 시라카와의 상태는 다시 나빠져 위장과 대장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으나 결국 5월 26일 오전에 사망했다. 상하이 파견 일본군 고등군법회의는 시라카와가 사망하기 전날 윤봉길 의사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일본제국주의는 이해 12월 19일 윤봉길 의사의 무릎을 꿇리고 십자가 형틀에 묶은 채 총살형을 집행했다. 잔인하고 무자비하고 야비한 만행이자 보복 행위였다.
끝으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 지배에 맞서 자주와 독립을 염원하며 투쟁하다 잔혹한 만행에 쓰러져간 ‘대한민국’인들은 김형석 씨에게 경고합니다. 일본제국주의와 나치에 협력하고 전쟁 범죄를 저지른 안익태를 함부로 안중근 장군이나 손기정 선수와 비교하지 마십시오. 백선엽이 황군 장교로서 항일 부대를 ‘토벌’하고 동포를 ‘학살’한 간도특설대에서 저지른 만행을 비논리적이고 모순된 수사로 가리지 마십시오. 윤봉길 의사의 폭탄 세례를 받고 ‘시라카와 요시노리’가 사망하자 상하이에는 만세 소리와 함께 폭죽이 터졌습니다. 냉담하던 중국인들도 ‘대한민국’인의 기개를 치켜세우며 술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런 백선엽의 창씨명이 ‘시라카와 마사오’이자 ‘시라카와 요시노리’인 것은, 자신도 일왕의 신민이자 ‘겉’과 ‘속’까지 일본인이기를 바랐던 간절함의 발로였을 것입니다. 뼛속까지 일본인이고자 했던 백선엽을 존경하는 김형석 씨도 이제 ‘혼네(本音)’와 ‘다테마에(建前)’를 분명히 밝히시기를 바랍니다. 덧붙여 김형석 씨가 존경해 마지않는 또 한 사람. ‘혈서(血書)’로 일본제국주의에 ‘일사공봉(一死奉公)’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짐하고 만주 육군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으며 황군 장교로 복무하면서 항일 부대를 ‘토벌’한 다가키 마사오(高木正雄), ‘대통령’ 박정희(朴正熙)의 친일 행적도 거짓이라 왜곡하지 마십시오.
역사학자라면, 가감 없이 역사를 직시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