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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정로전국쌍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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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 61]

침략전쟁의 선전 도구로 이용된 쌍육 놀이 : 러일전쟁
⌈신안정로전국쌍육⌋(1904.1)

1904년 2월 러일전쟁 개전 후 일본군은 5월초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진격하여 일사천리로 구련성, 금주 등을 점령했다. 여세를 몰아 일본군은 8월부터 러일전쟁의 최대 승부처인 여순항 공략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간 맥없이 패주하던 러시아군도 여순항에 배수의 진을 치고 격렬히 저항하여 장장 5개월간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다. 양군에서 십수 만의 사상자를 낸 끝에 1905년 1월 2일 일본군이 여순항을 함락시켰다.

당시 일본 언론 매체들은 일본군의 승전보를 실시간 중계하듯 보도하였고 특히 러일전쟁의 전황만을 다루는 잡지와 사진화보집을 경쟁적으로 발간하였다. 『일로전쟁실기(日露戰爭實記)』라는잡지를 발행하고 있던 박문관(博文館)은 『일로전쟁실기』1905년 신년호의 판매부수 증대를 위해 사진화보부(寫眞畫報部)가 기획하고 일본화의 중진 화가였던 오타케 곳칸(尾竹國觀)이 그림을 맡은, 러일전쟁 승전을 테마로 한 쌍육판 「신안정로전국쌍육」을 부록으로 제작하였다.

1905년 1월 시점에서 일본의 승전을 상정하고 제작한 이 쌍육판은 기존의 쌍육 놀이와 차별화하기 위해 실제 러일전쟁에 참전한 일본 군단과 사령관을 게임 속에 구현하였다. 즉 플레이어는 일본군 6개의 군단―구로키 대장(黑木大將)의 제1군, 오쿠 대장(奧大將)의 제2군, 노기 대장(乃木大將)의 제3군, 노즈 대장(野津大將)의 제4군, 도고 대장(東鄕大將)의 도고 함대, 우에무라 중장(上村中將)의 우에무라 함대― 중 하나의 군단을 선택해서 그 군단(말)을 움직이는데 군단의 이동 방법은 각 칸의 지시에 따른다. 출발 칸인 ‘출정’을 보면 제1군부터 우에무라 함대까지 각 군단에 숫자마다 이동할 칸이 정해져 있다. 가령 플레이어가 제1군을 택했을 경우 주사위를 굴려 1~3 중 하나가 나오면 바로 위의 ‘압록강’으로 가고, 4~6 중 하나가 나오면 압록강 위의 칸인 ‘구련성’으로 간다. 이렇듯 각 플레이어가 번갈아 가며 주사위를 던져 자신의 군단을 가장 빨리 한가운데의 ‘적국항복’으로 이동시키면 승리한다.

쌍육판은 40여 칸으로 되어 있고 각 칸에는 인천 해전, 여순 개전, 기함 회의, 사할린 회복, 강행 정찰, 여순 함락, 금치 훈장, 봉천 점령 등이란 제목으로 가상 역사 현장과 주요 격전지를 묘사했고 각 칸마다 전황과 관련된 일본군 지휘관의 초상을 일일이 그려놓았다.

메이지·쇼와기의 일본화가인 오타케 곳칸(尾竹国観, 1880~1945)은 1880년 4월 21일 현재의 니가타시 곤야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카메키치(亀吉)이며, 아버지는 오타케 쿠라마츠(尾竹倉松)였다. 어릴 적에 사사다 운세키(笹田雲石)로부터 곳칸(国観)이라는 호를 받았다. 도쿄 학령관의 『소국민(小国民)』 전국 아동화 콩쿠르에 응모하여 1등을 차지하고,학령관의 주선으로 상경하여 고보리 도모토(小堀鞆音)의 문하에 들어갔다. 14세 때 토야마 박람회에서 3등, 16세 때 일본미술협회 1등상, 이듬해 같은 협회에서 동메달을 수상했다. 이 작품이 고보리 도모토의 눈에 띄어, 1896년 2월에 다시 도모토의 문하에 들어갔다.

20세 전후부터 일본회화협회 및 일본미술원 연합회화공진회에서 수상을 거듭했다. 1909년 제3회 문전(文展)에서 <유단(油断)>으로 2등상, 제5회 문전에서 <흉내(人真似)>로 3등상을 수상했다. 1910년부터 1912년까지는 박문관의 잡지 『문예구락부』에서 목판화를 그렸다.한편 곳칸이 줄곧 그려온 교과서나 잡지의 삽화, 펀치화, 그림책 등 매체 작업이 뒤늦게 주목을 끌기도 했다. 1945년 5월 20일 6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곳칸의 화풍은 인물화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천성적으로 데생력에 뛰어나, 종종 사람들의 시선 아래서 즉흥적으로 그림을 완성하는 것을 특기로 삼았다. 또한 독특한 화풍과 개성 있는 낙관(落款)의 글씨로도 유명하다.(日本語版 Wikipedia 참조)

• 박광종 특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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