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헌 고려대 한국사학과 명예교수 인터뷰
2019년 출간된 책 <반일 종족주의>는 한국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근거 없는 ‘통념’을 반박한다는 이 책이 부정한 것은 일본제국주의(일제) 식민지배에 대한 한국사회의 인식이었다. 이들은 일제에 의한 쌀 ‘수탈’은 ‘수출’(김낙년 한국학중앙연구원장), 강제동원은 ‘신화’(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로 규정했다. 대표 저자인 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은 책 도입부에 “한국의 거짓말 문화는 국제적으로 널리 잘 알려진 사실”이라며 힘을 실었다. 이들은 이른바 ‘뉴라이트’라 불리며 여전히 유사한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주로 경제학을 전공한 이들이 제기하는 이러한 주장은 ‘일제가 조선을 근대화했다’는 해묵은 ‘식민지 근대화론’의 연장선에 있다. 그런데 학문적 자유를 토대로 한 ‘소수 이론’이 주목받는 만큼 이를 논박한 책, 논문 등도 주목받는 것은 아니다. 이는 식민지 근대화론은 수치나 통계와 같은 ‘과학적 근거’가 있지만, 주류 역사학은 감정적인 ‘민족주의’에 입각해 있다는 착각을 만든다. 실제로 이들 주장은 학계를 넘어 이제 정치권에서도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지난 8월 22일 정태헌 고려대 한국사학과 명예교수를 서울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정 교수는 <반일 종족주의>의 저자들처럼 경제사학을 연구했다. 하지만 이들과는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했다. 무엇이 차이를 만들었는지 물었다. “나는 단 한 순간도 우리 역사를 일부 수치와 통계만으로 비하하지 않았다.” 정 교수의 답변이었다.
-뉴라이트는 ‘일제가 조선을 근대화했다’고 주장한다.
“식민지 근대화론, 식민지 시혜론이라고 불리는 주장은 15세기 ‘대항해 시대’ 이후 지속해왔다. 기독교 입장에서 비기독교인을 야만으로 규정하고 개종시키는 것을 정당화한 것에서 시작해 자본주의 시스템을 활용한 제국주의의 식민지배까지 포괄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침략, 수탈, 차별, 제노사이드 등은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됐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창한 것 역시 침략의 주체들이었다. 그런데 한국 ‘뉴라이트’는 침략을 당한 쪽에서 이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마치 대감댁 머슴이 본인이 대감인 양 행동하는 꼴이다. 당연히 논리적 일관성도 정체성도 없다.”
-정체성이 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자신이 발 딛고 사는 곳이 사고의 중심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들 주장의 핵심은 결국 국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식민지배 하에서 ‘자본주의’가 도입됐고, 경제가 성장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독립할 필요도 없고, 독립운동가는 자본주의 성장을 방해한 세력이라는 인식을 한다. 그렇다고 ‘무정부 자본주의’를 주장하는 것도, ‘아나키즘’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면서 시장경제만 부르짖는 식이다. 자본주의는 민족경제, 즉 국가의 정책적 지원을 받으면서 출발했다. 자본주의 3대 주체가 개인, 기업 그리고 국가(정부)라는 사실을 망각하면 안 된다. 현대사회에서도 국가가 새로운 시장도 창출하고, 자국 기업을 보호하거나 이를 위한 정책을 만들지 않나. 그러나 일제강점기 조선인, 조선인 기업에는 그런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다. ‘식민지 자본주의’ 운영 주체는 일본 정부, 조선총독부, 일본 기업이었다. 즉 일본의 경제와 대륙침략을 위해 한반도 경제와 조선인들에게 ‘불공정한 교환’을 강요했다. 이러한 관계를 무시하고 무턱대고 자본주의적 교환이 이뤄졌다고만 하면 안 된다.”
-뉴라이트는 경제성장을 강조한다.
“하나 마나 한 이야기로 혹세무민하는 것이다. 제국주의가 식민통치를 효율적으로 한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제대로 뽑아 먹겠다’는 의미다. 그러기 위해선 ‘개발’을 해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다. 즉 일제의 필요에 따라 ‘일본 자본이 주체가 된 개발을 통해 수탈한다’는 것이 식민지 경제의 기본 시스템이라는 의미다. 개발 추진 주체와 목적, 성과와 귀결, 한반도 경제의 산업 연관성 여부 등을 논외로 한 채 무턱대고 식민지배로 ‘경제가 성장했다’고 강조하는 것은 무식한 이야기다.”
-뉴라이트는 수치나 통계를 근거로 제시하는데.
“그럴듯해 보이지만 결국, 통계정치학이다. 심지어 정확하지도 않다. 일제강점기는 국내총생산(GDP) 개념, 측정 방법이 정립되기 전이기 때문에 당시의 경제성장 수치란 것도 결국 ‘추계’의 산물이다. 더구나 기준점이 되는 1910년대 전반기 통계는 통감부,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것으로 굉장히 부실하다. 즉 분모로 사용하는 1910년대 자료가 워낙 저점에 있다 보니 강제병합 이후 경제가 눈에 띄게 성장한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이마저도 1939년 본격적인 전시체제에 돌입하면서 절대치가 감소한다. 이들이 통계를 정말 일제강점기를 이해하기 위한 ‘학문’으로 접근했다면 당연히 많은 질문도 수반했어야 한다. 예컨대 ‘조선인과 일본인의 소득분배를 추론할 수 있는 자본소득비율(자본 소유주 소득/GDP)이나 노동소득비율은 어땠을까’, ‘조선인의 생활 수준을 유추해볼 수 있는 노동시간당 GDP(GDP/노동시간)는 어땠을까’, ‘식량 총생산량이 늘어났다면 쌀 소비량은 어떻게 변했을까’ 등이다. 그런데 덮어놓고 조선은 자본주의로 이행할 능력이 없었고, 일제강점기 경제총량은 증가했다로 얘기가 끝난다. 중요한 전시체제기는 논의조차 하지 않는다.”
-통계의 진실은 무엇인가.
“그 당시를 살아갔던 사람들이 남긴 연구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1931년부터 1935년까지 이여성, 김세용은 <숫자조선연구>라는 책을 통해 식민지 경제가 수치상 성장하고 있지만, 민족별 경제력 격차가 커지고 있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예를 들어, 당시 5개 도시(경성·평양·부산·대구·인천) 전체인구 중 약 74%를 차지한 조선인이 소유한 토지는 전체의 33%에 불과하지만, 약 26%의 일본인은 전체 토지의 63%나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1929년 기준 일본의 교육비는 세출의 8.1%였지만, 1930년 조선총독부의 교육비는 세출의 3.5%에 불과했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당시 교육 실태를 고려하면 이마저도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에게 대부분 쓰였다. 당시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도 조선총독부가 쓰는 재정이 조선인들에게 돌아가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쌀 소비로 당시 상황을 가늠해볼 수도 있다. 일본의 1인당 쌀 소비량(연 1.1석)은 안정적으로 유지됐지만, 조선은 증산에도 불구하고 소비량이 1911~1934년 사이 52%나 격감(연 0.79→연 0.38석)했다.”
-통계로는 볼 수 없는 현실은 어땠나.
“1930년대 농촌현실을 담은 채만식의 소설들이 있다. 소설 속 조선인 농민은 대부분 소작농이고, 고율 소작료와 고리 부채에 시달리고 있다. 경제총량이 늘어났다면 그만큼 조선인 생활 수준이 나아져야 할 것 아닌가. 1936년 울산 달리 지역에서 ‘농촌위생조사’가 진행됐다. 당시 사진촬영사로 참여한 미야모토 케이타로는 ‘조선 농촌에서는 1935년 전후에도 전등이 보급되지 않아 호롱을 사용하고, 이마저도 어려운 하층 농가는 어유를 태워 불을 밝힌다’고 썼다. 조사를 주도했던 최응석은 ‘동물 같은 원시적인 생활을 한다. 옷은 몸을 가리는 데 불과하고, 집은 흙으로 된 방이다. 길가에는 회충이 알을 까고 있다’고 적었다. 이 조사는 경제외적 수탈-약탈이 극심했던 전시체제기 이전에 진행됐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조선 경제’와 ‘조선인 경제’가 엄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경제가 성장했다고 하는데 한반도는 해방 직후 세계 최빈국이었다.”
-뉴라이트 주장을 보면 일제가 아니었다면 결코 자본주의로 이행할 수 없는 것 같다.
“‘가정의 정치학’이다. 자본주의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기존 신분 주도 사회에서 돈이 주도하는 사회로 바뀌는 것이고, 그러한 변화를 국가정책의 뒷받침을 통해 제도화하는 것이다. 조선 후기에 몰락 양반이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고, 개성상인이나 경강상인 등이 세를 드러내고, 흥부가 매를 맞아 돈을 버는 모습은 신분에서 돈이 주도하는 사회로의 이행을 보여준다. 변화의 흐름은 분명했지만 국가의 정책적 뒷받침이 취약한 가운데 일제가 자기 편의에 맞게 식민지화해버린 것이다. 변화가 지속했다면 어땠을지는 ‘가정’이기 때문에 말하지 않겠다. 반대로 일제에 의해 중단된 변화를 평가절하하는 것 역시 ‘가정’에 불과하다.”
-일제에 의해 우리가 근대화된 것은 맞나.
“근대의 특징은 ‘자본주의’, ‘주권 국가’ 그리고 ‘개인의 자유’다. 이 세 가지 개념 중 식민지 조선에서 적용 가능한 것이 하나라도 있나. 첫째로 일제강점기 자본주의는 국가를 상실한 식민지 자본주의라고 이미 지적했다. 둘째로 당연히 우리 민족의 ‘주권 국가’는 없었다. 셋째로 민족차별이 제도화된 식민지에선 ‘개인의 자유’는 설 자리가 없었다. 일제가 동화정책을 선전했지만 조선인에게 의무교육, 참정권 등은 없었다. 심지어 보통학교-소학교, 고등보통학교-중학교처럼 학교 명칭조차 징병을 위해 통일될 때까지 달랐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도 마찬가지다. 조선말이라도 자유롭게 쓸 수 있었나. 기업인이라고 다를 것 같나. 1910년대에는 회사령 때문에 회사를 설립하려면 조선총독부에 허가를 받아야 했다. 심지어 친일파도 일본인에게 쏠린 시장과 금융의 민족차별적 환경에 불만이 컸다. 이 모든 것을 제외하고 나면 중국 침략을 위해 부설한 철도 부설 정도만 남는다. 이것을 근대화라고 하기에는 너무 실체가 없는 것 아닌가.”
-일제강점기가 한국이 달성한 경제발전, 근대화의 초석이란 주장은 어떻게 보나.
“이런 얘기 자체가 국가 주권 문제를 가볍게 보는 천박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식민지 경제와 해방 후 경제가 어떻게 동일 선상에서 이어지나. 질적으로 다르다. 한국이 달성한 경제발전은 국가 주권을 회복하면서 비로소 가능했다. 한국 정부가 화폐·금융 주권을 발휘하고, 경제정책을 주도하면서 달성한 것이다. 기업가들은 경영환경 자체가 달라진 상황에서 활발하게 회사를 일궜다. 일제강점기는 청년 정주영이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없어 사채를 얻어 사업을 해야 했던 시대였다. 이런 식민지 상황에서 어떻게 현대나 삼성 같은 세계적 기업이 나오나. 상식적인 주장을 해야 한다. 기업인 중에도 뉴라이트 주장에 동조하는 경우가 있다. 국가의 존재 여부가 기업의 경영환경에 얼마나 영향을 끼치는지를 모르는 무지의 소치다.”
-같은 경제사학자임에도 뉴라이트와 정반대 분석을 한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나.
“첫째로 나는 그들처럼 ‘한국사’를 비하하지 않는다. 그들의 특징을 보면 모든 기준이 ‘나’가 아닌 ‘남’이다. ‘국민의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중요한 건 일본의 마음’이라고 하지 않나. 둘째로 그들처럼 ‘자본주의’만 보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성장 ‘수치’가 아닌 그 시대를 살아가는 구성원들의 ‘삶’이고 이들이 만들어 가는 ‘국가’다. 그렇기에 주권을 되찾고 식민지 자본주의를 극복하려 한 독립운동에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수치·통계만으로 모든 걸 재단해 정작 자본주의의 본질적 특징을 호도한다. 식민지배나 민족차별이라는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경시하면 그 시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차별이 제도화된 식민지 자본주의 현실을 외면하고 역사를 보면 그들처럼 허상의 세계에 취하게 된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2024-09-02> 주간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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