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다시는 “남의 자식 놀이터로 내어 맡기”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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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러일전쟁 답사기]

다시는 “남의 자식 놀이터로 내어 맡기”지 않기 위해

방학진 기획실장

우리 연구소는 청일전쟁 130년, 러일전쟁 120년을 맞아 7월 25일부터 30일까지 5박 6일 동안 중국 다롄, 뤼순, 옌타이, 칭다오 등을 답사했다. 이번 답사는 『전쟁과 인간 그리고 평화: 러일전쟁과 한국사회』와 『조선인들의 청일전쟁: 전쟁과 휴머니즘』의 저자인 조재곤 박사(지도교수)를 필두로 모두 24명이 참여했다.

첫째 날은 ‘다롄 진저우 남산 소련군 열사능원’(大連 金州 南山 蘇軍烈士陵園)을 찾았다. 이곳은 1904년 5월 러시아군이 강력한 요새를 구축한 탓에 가까스로 일본군이 요새를 점령했으나 당시 일본군 3군 사령관 노기 마레스케의 장남 노기 가츠노리가 전사하는 등 일본군이 고전을 면치 못한 곳이다. 현재는 일반인의 출입을 막고 있어 능원 입구에 있는 당시 러시아군을 기리는 탑만을 살펴볼 수 있었다. 현지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이곳을 찾는 중국인은 거의 없으며 자신도 이곳은 처음 방문한다고 한다. 다롄에는 러일전쟁 유적지가 대체로 잘 보존되어 있지만 이곳만은 예외인 듯싶다.

이어서 방문한 포대산공원(炮台山公园)은 청국 정부가 북양해군 설립에 발맞추어 1887년 다롄만 일대에 해안 방어시설로 만든 것이다. 원래 해발 약 90m였던 쉬자산을 20m나 깎아내어 평지로 만들고, 당시 세계 최고 성능의 독일 크루프사에서 구입한 상하좌우 회전하는 대포 16문을 설치하였다. 숙소에 도착한 답사단은 ‘청일전쟁·러일전쟁과 여순·대련의 전투’를 주제로 한 조재곤 박사의 특강으로 첫날 일정을 마무리했다.

종일 비가 내렸던 답사 둘째 날에는 러일전쟁의 격전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다롄시 뤼순구에 있는 동계관산(東雞冠山) 요새를 찾았다. 이 요새는 1898년 제정 러시아가 뤼순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건설하였으며 전체 규모는 둘레 496m, 면적 9,900㎡로 불규칙한 오각형 형태이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군이 이 요새를 공격하여 9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지만 결국 요새를 점령하여 사실상 러일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었다. 이 요새는 비교적 완벽하게 전쟁 현장이 보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유일하게 새로 건립된 러일전쟁전시관이 있어 제국주의 침략 범죄의 실상을 다양한 형식으로 상세하게 전해준다.

다음으로 뤼순을 방문하는 한국인이라면 반드시 찾게 되는 뤼순감옥과 관동법원을 찾았다. 방문 당시 뤼순감옥은 많은 중국인들로 혼잡했는데 중국인들 역시 안중근 의사 관련 설명문에는 발길을 멈추고 자세히 읽는 편이었다. 뤼순감옥에는 ‘뤼순의 국제 지사들’이라는 이름의 특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는데 안중근 의사를 비롯해 이회영, 신채호, 한인애국단 최흥식, 유상근 등 한국인 독립운동가에 대한 특별 전시관이다. 한중관계가 악화된 요즘이다 보니 전시관에 있는 주은래의 글귀가 더욱 다가왔다.

청일전쟁 후 중국·한국 양국 국민의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반대 투쟁은 금세기 초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부터 시작되었다.(<주은래 총리의 중한역사관계에 대한 담화>에서 발췌한 내용, 1963년 6월)

뤼순의 중심에는 서울의 남산 격인 해발 130m의 백옥산(白玉山)이 있다. 이곳은 뤼순항과 뤼순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지만 정상에서 러일전쟁 종전 후 일본 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와 식민지 당국의 주도로 일왕을 위해 목숨을 바친 장교와 병사를 기리기 위해 건립된 높이 66.8m 총알 모양의 표충탑(表忠塔)이 있다. 1907년 6월부터 1909년 11월까지 수만 명의 중국인들을 동원해 건립한 치욕의 탑이지만 중국 당국은 1986년 “러일전쟁의 현장 그리고 제국주의 중국 침략의 물리적 증거”라는 문구를 새겨 역사의 교훈으로 삼고 있다.

다음으로 찾은 만충묘(萬忠墓)는 일본이 뤼순을 점령한 1894년 11월 21일부터 25일까지 중국인 2만여 명이 학살당한 ‘뤼순대학살’ 희생자의 합장 묘지이다. 이 사건을 중국에서는 ‘여순대도살’(旅順大屠殺)이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여순학살사건’이라고 한다. 난징 대학살에 비해 다소 낯선 현장이었지만 답사단은 만충묘를 방문해 헌화와 묵념을 하며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었다.

러일전쟁박물관, 여순박물관, 중소우의기념탑(中蘇友誼記念塔)를 둘러본 후 마감시간에 쫓기며 203고지의 표충탑을 방문했다. 203고지까지 운행하는 전용 카트 운행시간이 끝나 비를 맞으며 30분 이상 오르막길을 올라야 했지만 운 좋게도 개인 승합차를 얻어 타고 203고지에 올랐다. 이곳은 러일전쟁 당시 뤼순항을 포위하려는 일본군과 이에 맞선 러시아군이 격전을 벌인 곳으로 이곳에서만 약 1만 명의 양군 병사가 전사했다. 당시 전투를 지휘한 노기 마레스케는 전투 뒤 이곳을 중국 현지에서 부르는 이름을 따라 이령산(爾靈山) 즉 ‘영혼이 드러눕는 산’에 표충탑을 세웠다.

탑의 모양은 당시 일본 육군에서 사용하던 30년식 소총의 탄환 모양인데 중국 문화대혁명 당시 파괴되었던 것을 복원한 것이다. 203고지 정상에 서면 백옥산과 뤼순항이 한눈에 들어와서 군사 요충지였음을 실감하였다. 다음으로 1905년 1월 5일 일본군 제3군 사령관 노기 요시노리와 제정 러시아의 뤼순 사령관 스테셀이 러시아군의 항복문서에 서명한 수사영회견소(水師營會見所) 옛터를 방문하고 둘째 날의 답사를 마쳤다.

셋째 날은 다롄, 뤼순에서의 마지막 일정으로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상륙한 작은 포구인 화원구(花園口)를 방문했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중국 침략을 위해 다롄 만에서 압록강까지의 해안을 탐사해 마침내 청국군 요새가 없는 화원구를 상륙 지점으로 결정하고 후에 ‘육지에는 오야마, 바다에는 도고(陸の大山, 海の東郷)’라는 명성을 듣게 되는 육군대신 오야마 이와오(大山岩)를 앞세워 1894년 10월 24일 단 한 발의 총성도 없이 24,049명의 병력과 2,740마리의 군마 등을 12일에 걸쳐 화원구에 상륙시켰다.

중국으로서는 치욕의 전장임에도 기념비 하나만 있는 화원구를 뒤로하고 다롄으로 돌아온 답사단은 대련박물관, 러시아 거리를 잠시 둘러본 후 이회영 선생님이 체포, 순국한 일본수상경찰서 건물을 보고 늦은 밤에 다롄항에서 옌타이를 향하는 여객선에 승선했다.

넷째 날은 옌타이항에 도착하여 옌타이 전망대만을 서둘러 관람한 후 웨이하이의 유공도(劉公島)를 들어가는 배에 올랐다. 셋째 날까지는 거의 종일 비가 내렸으나 웨이하이에서는 뜨거운 날씨가 답사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이날이 일요일인 관계로 유공도에 있는 갑오전쟁박물관을 찾는 관람객이 끝도 없이 몰려들었다. 중국은 청일전쟁을 갑오전쟁이라 부른다. 1985년에 만들어진 이 박물관은 총면적 100,000㎡가 넘는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데 1994년에는 당시 국가주석 장쩌민이 ‘중국갑오전쟁박물관’이란 현판을 썼다. 1887년 청국의 북양해군 사령부가 자리잡은 유공도는 1894년의 황해해전에서 겨우 빠져나와 웨이하이웨이 방어에 전념하다가 결국 패전한 북양 수사제독 정여창(丁汝昌)이 자결한 곳이기도 하다.

갑오전쟁박물관은 규모뿐 아니라 내용면에서 현재 중국의 애국주의 교육의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완벽하게 일본에 패배한 갑오전쟁을 교훈으로 삼아 “잠자는 중국의 천년 꿈을 깨웠다”거나 “나라의 치욕을 잊지 말고 중국의 꿈을 실현하자”(勿亡國恥 圓夢中華)는 내용은 아편전쟁박물관, 9.18기념관(만주사변), 난징대학살기념관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즉 치욕적인 역사일망정 반면교사의 교훈, 더 나아가 국가 발전의 동기를 국민들에게 심어주겠다는 의지이다.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가 갖는 기본적인 역할일진대 이를 애국주의, 국가주의로만 치부할 일은 아닐 것이다. 특히 청일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을 맞은 우리나라에서 동학혁명을 되돌아보는 움직임이 예년에 비해 눈에 띄게 적은 것과 비교해 너무도 아쉬운 대목이다.

답사 다섯째 날과 마지막 날은 장보고기념관, 칭다오맥주박물관, 캉유웨이 옛집 등 다소 여유로운 일정이었다. 그런데 칭다오 중심가인 중산로에서 뜻밖에 독립운동 현장을 볼 수 있었다. 국권 피탈을 눈앞에 둔 1910년 4월 조성환, 김희선, 이갑, 안창호, 이강, 유동열, 신채호, 김지간, 이종호, 이종만, 방영로, 정영도, 서초, 김효신, 김영, 유일 등은 당시 메트로폴 호텔(현 중산로 67호)에서 비밀리에 모여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했던 이른바 ‘칭다오 회의’를 열렸던 곳이다. 하지만 현재 이곳은 아무런 표식이 없고 독립기념관 국외 독립운동사적지에도 찾아볼 수 없다. 향후 관련 조사와 연구가 진행되어 작은 표식이라도 설치해야 할 것이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당시 세계적 이목이 집중된 국제전쟁이었고 그 시작은 모두 우리 땅이었지만 그에 비해 학계는 물론 국민적 관심이 덜하다. 이름에서 보듯이 마치 남의 나라의 전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많은 듯하다. 하지만 국권 피탈 당시 우리 독립투사들은 이들 전쟁에 대해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장백산 밑 비단 같은 만리낙원은 반만년래 피로 지킨 옛집이어늘, 남의 자식 놀이터로 내어 맡기고 종 설움 받는 이 뉘뇨(<신흥무관학교 교가> 2절)

우리 스스로 자주적, 주체적 역사의식을 망각한 채 외세를 끌어들여 청나라, 일본, 러시아 등의 전쟁터가 되었던 역사가 반복될 조짐이 농후한 요즘이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다시금 고민해 보는 답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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