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용문달양(龍門達陽)’은 태양의 나라 일본(日本)을 가리키는 표현

210

[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10]

‘용문달양(龍門達陽)’은 태양의 나라 일본(日本)을 가리키는 표현
통영해저터널 입구에 걸린 저 편액은 와타나베 경남도지사의 글씨

이순우 특임연구원

광복 60주년을 며칠 앞둔 지난 2005년 8월 10일 바로 그날, 문화재위원회(근대분과)를 긴급 소 집한다는 소식과 함께 유홍준 문화재청장 명의로 된 한 장의 사과문이 느닷없이 배포된 일이 있었 다. 알고 보니 앞서 7월 12일자 『관보』를통해게시된‘문화재청공고제2005-127호(경남지역 근 대문화유산 24건에 대한 문화재등록 예고)’에 ‘통영 태합굴 해저도로’라는 명칭이 버젓이 그 목록 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여기에 나오는 ‘태합굴’에서 ‘태합(太閤, 타이코)’은 임진왜란의 원흉인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의 관명(官名)이며, ‘굴(堀, 호리)’은 “땅을 파서 만든 수로(水路, 물길)”을 가리키는 일본식 표현이다. 따라서 ‘태합굴(太閤堀; 토요토미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인공수로)’은 그 자체가 전형적인 ‘왜색지명’의 하나였던 것이다. 이러한 분란은 결국 『관보』 2005년 9월 14일자에 수록된 ‘문화재청 고시 제2005-63호’를 통해 등록문화재 제201호 ‘통영해저터널’이라는 이름으로 정정되면서 마무리되었다.

예로부터 통영에는 좁은 해협을 이루는 특이한 지형이 있었고 이곳을 일컬어 ‘착포량(鑿浦梁)’ 또는 ‘착량(鑿梁, 판데목, 판뎃목, 판뎃목이)’이라고 하였는데, 근대개항기 이후 일본인들이 밀려들면서 그들의 언어습성에 따라 이내 이곳을 ‘태합굴’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던 사실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 대한제국 농상공부 수산국에서 편찬한 『한국수산지(韓國水産誌)』 제2집(1910년 5월발행)을 보면, ‘경상남도 용남군 서면(慶尙南道 龍南郡 西面)’ 관련항목(652~653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정리되어 있다.

[서당동(西堂洞)] 미륵도(彌勒島)와의 사이에 형성된 해협(海峽)의 최협부(最狹部, 가장 좁은 위치)에 있다. 이 섬의 남수동(南修洞)과 마주하며 교량(橋梁)으로 서로 접한다. 이 해협은 임진역(壬辰役, 임진왜란) 때 일본인이 개착(開鑿)한 것이라는 구비(口碑, 전설)가 있으며, 일본인(日本人)은 이곳을 ‘태합굴(太閤堀, 타이코보리)’이라고 부른다. 지금은 모래펄이 침체(沈滯, 쌓이는 것)되어 대선(大船)은 지날 수가 없고, 간조(干潮) 때에는 어선(漁船)도 통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인가(人家)는 36호가 있으며, 주민은 농상업(農商業)을 영위하고 어업(漁業)에 종사하는 사람은 없다.
[남수동(南修洞)] 서당(西堂)의 대안(對岸)인 미륵도에 있다. 인가는 39호이며, 주민은 농업(農業)을 전업으로 하고 어업에 종사하는 이는 없다.

그렇다면 통영과 미륵도 사이의 해협을 뚫어 운하(運河)를 파려는 생각은 애당초 어떻게 시작된 것이었을까? 이에 관한 얘기를 하노라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바로 야마구치 세이(山口精, 1876~?)라는 일본인이다.

그는 일본 기후현(岐阜縣) 출신으로 일찍이 1906년에 서울로 건너와서 경성일본인상업회의소(京城日本人商業會議所)의 서기장(書記長)을 역임하였고, 경성도서관(京城圖書館)을 창설(1909)하는 한편 『조선산업지(朝鮮産業誌)』(전3책, 1910~1911)를 저술하기도 했다. 그러한 그가 통영지역에 정착한 것은 나전칠기주식회사(螺鈿漆器株式會社)를 창립하던 1918년의 일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통영과 미륵도 사이의 해협을 확장하면 선박의 통행로를 확보하는 동시에 운항시간을 크게 단축하게 되며, 이에 곁들여 통영 일대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1920년 이후 통영운하의 개착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신문』 1932년 11월 20일자에 게재된 「동양일(東洋一)을 자랑하는 통영운하와 해저도로, 총독대리(總督代理)를 비롯하여 지사(知事) 이하 참렬, 오늘 성대한 준공식(竣工式)」 제하의 기사를 보면, 그 당시 통영읍장의 자리에 있던 야마구치 세이의 회고담 한 자락이 수록되어 있는데 바로 여기에 첫 시작에 대해 이러한 내용이 나온다.

최초(最初) 대정 11년(1922년) 11월 23일 사이토 총독(齋藤總督)의 내통(來統, 통영방문)을 맞이하여 23일 아침 동운여관(東雲旅館)으로 총독을 방문하여 통영의 사정을 말하고, 동시에 태합굴(太閤堀)에 운하 개착하는 것의 국가적 유리(國家的 有利)를 설명하여 동일(同日) 오후 경비선(警備船)으로 현장에 가서 총독의 실지시찰(實地視察)을 청했던 바, 크게 찬성(贊成)을 얻었던 것이 최초(最初)이다.

이를 계기로 그는 1923년 6월에 통영항만운하기성회(統營港灣運河期成會)를 조직하여 스스로 회장이 되었고, 다시 아리요시 정무총감(有吉 政務總監)의 관저를 방문하여 직접 진정(陳情)하는 등 태합굴 개착사업에 관한 총독부 당국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일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본 것인지 1928년 5월 26일에 이르러 통영운하의 기공식이 거행되었으며, 이 공사는 해협의 양쪽을 완전히 물막이한 상태에서 무려 5년간이나 계속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통영운하의 개착이 막바지에 이르자 다시 1931년 7월 26일에는 해저터널공사의 착공식이 있었다. ‘해저터널’은 운하개착이 시작될 당시에는 전혀 확정되지도 않았던 계획이었으나,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면서 해저터널을 개설하는 일은 자연스레 논란의 중심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운하개착공사가 종료되면 어차피 물막이를 헐어내 통수(通水)가 되어야 하는데, 그 이후에 통영과 미륵도 사이를 연결하는 공사를 — 그것이 해상다리이건 해저터널이건 간에 — 재개하는 것은 비용증대와 난공사(難工事)의 문제를 야기할 것이 뻔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들이 내린 결론은 해저수도(海底隧道, 해저터널)를 구축하는 방식이었다. 이 공사는 운하의 바닥을 파낸 곳에다 다시 바닥을 더 파내어 콘크리트 구조물을 설치하는 방식이었으며, 이를 모두 완성하는 기간은 16개월 정도가 걸렸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그 시절의 명칭으로 ‘통영 태합굴운하’와 ‘통영 태합굴해저도로’의 준공이 이뤄진 것은 1932년 11월 21일의 일이었다.

이에 관한 내용은 조선총독부의 기관잡지 『조선(朝鮮)』 1932년 12월호, 132쪽에 수록된 「[휘보(彙報)] 통영운하(統營運河)와 해저도로 준공(海底道路 竣工)」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이 요약되어 있다.

동양일(東洋一, 동양 제일)이라 일컬어지며, 남선 다도해항운(南鮮 多島海航運)에 일신기(一新期)를 긋는 경남통영(慶南統營)의 태합굴운하(太閤堀運河)는 소화 3년(1928년) 3월 26일[5월 26일의 착오]에 기공(起工), 공비(工費) 30만 원(圓)을 들여, 4년 8개월의 세월을 거쳐 드디어 준공(竣工)되었고, 또 운하(運河)의 개착(開鑿)에 동반하여 대안 산양면(對岸 山陽面)과의 교통상(交通上) 없어서는 안 될 해저도로(海底道路)의 계획(計劃)도 운하개착중(運河開鑿中)에 진행하여 소화 6년(1931년) 7월에 기공(起工), 1년 4개월이 걸려 공비(工費) 18만 5천 원(圓)을 들였고, 이제 그 준공을 보아 11월 20일 성대한 준공식(竣工式)이 거행되어졌다.
이 양공사(兩工事)는 도(道)의 직영공사(直營工事)로 하여 만전(萬全)을 기(期)한 것인데, 운하(運河)의 깊이는 만조면하(滿潮面下) 6.7미터이고, 2천톤급의 선박(船舶)을 자유로이 통항(通航)시키며, 간조시(干潮時)라 하더라도 수심(水深)이 3미터가 되어 2백톤급의 선박(船舶)을 통항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운하의 폭원(幅員)은 상폭(上幅) 55미터이며, 저 항행선박(航行船舶)이 비상히 폭주(輻輳)하는 동경(東京) 니혼바시운하(日本橋運河), 칸다바시운하(神田橋運河)의 폭원 47미터에 비하여 여전히 8미터의 여유가 남는 것이다.
또 해저도로(海底道路)의 길이는 총연장(總延長) 482.5미터, 내해저부(內海底部) 302.5미터, 취합부(取合部) 180미터, 폭원(幅員)은 유효폭원(有效幅員) 5미터, 유효고(有效高)는 3.7미터, 구배(勾配)는 취합부 15분의 1, 해저부 400백분의 1로, 2대의 자동차가 완전히 엇갈려 다니는 것이 가능한 폭원을 가지고 있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른바 ‘태합굴운하’라는 명칭이 이로부터 불과 반년도 되지 않아 공식 폐기되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조선총독부관보』 1933년 4월 15일자에 수록된 ‘조선총독부 경상남도령 제13호’에는 “소화 7년 경상남도령 제16호 제명(題名) 및 제1조 중 ‘태합굴운하(太閤堀運河)’를 ‘통영운하(統營運河)’로 고쳐 소화 8년(1933년) 4월 15일부터 이를 시행한다”라는 내용이 들어있는 것이 확인된다.

그런데 — 한때는 ‘충무해저터널’로도 널리 알려졌던 — ‘통영해저터널’에 관한 얘기를 하노라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이곳 입구 양쪽의 상단에 붙어 있는 ‘용문달양(龍門達陽)’ 편액의 존재이다. 대다수의 2차자료에는 — 구체적인 근거자료는 제시하지 않은 채로 — 이것이 야마구치 통영읍장이 쓴 것으로 서술하고 있고, 나 역시 예전에 그렇게 글을 정리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관련자료들을 다시 꼼꼼하게 뒤져본즉 이 글씨를 쓴 이는 그 당시 경상남도지사인 와타나베 토요히코(渡邊豊日子, 1885~1970)였다는 사실이 새롭게 확인되었다. 그는 총독부 산림부장(總督府 山林部長)으로 있다가 1930년 12월 24일에 경상남도지사로 임명되었으며 그 이후 1933년 8월 4일에 총독부 학무국장(總督府 學務局長)으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2년 8개월가량 재임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경성일보』 1932년 11월 22일자에 수록된 「이름도 우아한 ‘용문달양(龍門達陽)’의 액(額, 현판), 지사(知事)가 염필(染筆, 휘호)하여 수도(隧道, 터널) 입구(入口)에 걸어」 제하의 기사에는 야마구치 통영읍장이 편액의 명칭을 고안한 다음, 와타나베 도지사에게 휘호를 청하여 걸기로 했다는 내용이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통영(統營)] 동양유일(東洋唯一)을 자랑하는 통영운하(統營運河) 해저터널(海底トンネル) 준공을 고하여 경사스러운 개통식(開通式)을 거행하였는데 터널 입구의 현판은 터널개착의 발안자(發案者)이며 그 계획의 공로자(功勞者)였던 야마구치 읍장(山口邑長)에 의해 그 명칭(名稱)을 연구한 결과 ‘용문달양’이라고 명명(命名)하기로 되었고 와타나베 도지사(渡邊道知事)에게 제자(題字)를 청하여 걸기로 되었는데, 야마구치 세이 씨(山口精氏)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통영은 예로부터 두룡포(頭龍浦)로 부르고 용궁(龍宮)의 고지(古地)라고도 일컬어지고 있다. 즉(卽) 정량리(貞梁里) 부근 일대는 용의 머리에, 운하(運河) 부근에서 인평리(仁平里)의 해중(海中)에 그 꼬리가 들어있다고 말한다. 이에 따라 살펴보면 지금의 통영은 용의 전신(全身) 모양이 되고, 대안(對岸) 산양면(山陽面)과의 경계에 있는 것이 해저수도(海底隧道, 해저터널)이니까 ‘용문’이라고 일컫는 것은 매우 적당하며, 통로가 빠지는 곳이 산양면이니까 양(陽)에 이르니, 곧 달양(達陽)이다. 또 용문은 어두운 것을 의미하고 양(陽)은 밝음을 의미하니까 박암(博暗)의 장소에서 밝은 곳에 도달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용은 또한 고금동서(古今東西)의 전설(傳說)에 많이 예로부터 신령(神靈)한 동물로 되어 있는 사령(四靈; 용, 기린, 봉황, 거북)의 하나이며 인충(鱗虫)의 장운(長雲)을 일으키고 비를 부른다고 일컬어질 정도이고, 불전(佛典)이랑 지나(支那, 중국)의 사실(史實) 등에도 다수 나타나 있는 유구(悠久), 구원(久遠)의 의의를 지녀 매우 연희(緣喜)가 좋은 것이므로 ‘용문달양’은 의의가 깊다고 믿는다.”

여기를 보면 야마구치 읍장이 직접 ‘용문달양’의 뜻풀이를 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는데 “용문, 즉 해저터널을 통해 건너편 산양면[미륵도]에 도달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외견상의 풀이일 뿐이고, 알고 보니 실제로는 “해저터널의 양쪽 출구가 모두 동쪽을 향해 있으며, 이는 저 멀리 태양의 나라인 일본(日本)으로 그 밝음이 이어진다”는 것이 ‘용문달양’이라는 구절이 나타내고자 했던 숨은 뜻이었다.

이 말은 곧 『부산일보』 1932년11월20일자에수록된「해저수도입구(海底隧道入口)의 액(額, 현판), ‘용문달양(龍門達陽)’의 풀이, 통영읍장(統營邑長) 야마구치 세이씨(山口精氏) 담(談)」 제하의 기사에 그대로 적시되어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통영(統營)은 예로부터 두룡포(頭龍浦)로 부르고 용궁(龍宮)의 고지(古地)라고도 일컬어지고 있다. 즉(卽) 정량리(貞梁里) 부근 일대는 용의 머리에, 운하(運河) 부근에서 인평리(仁平里)의 해중(海中)에 그 꼬리가 들어있다고 말한다. 이에 따라 살펴보면 지금의 통영은 용의 전신(全身) 모양으로 되어 있고, 대안(對岸) 산양면(山陽面)과의 경계에 있는 것이 해저수도(海底隧道, 해저터널)이니까 ‘용문’이라고 일컫는 것은 매우 적당하며, 통로가 빠지는 곳이 산양면이니까 양(陽)에 이르니, 곧 달양(達陽)이다. 터널은 출입구가 모두 동쪽으로 향해 있으므로 가까이는 산양면, 멀리로는 내지(內地)의 산양도(山陽道), 일본(日本)은 일체 태양(太陽)을 주로 하고 있으니까 조신(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을 비롯하여 국기(國旗)도 히노마루(日の丸)이다. 곧 태양의 나라라서 양(陽)인 고(故)로 ‘달양’은 일본을 가리키고 있다. 또 용문은 어두운 것을 의미하고 양(陽)은 밝음을 의미하니까 박암(博暗)의 장소에서 밝은 곳에 도달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하략)

일찍이 이른바 ‘태합굴’에 운하를 개착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실제로 이곳에다 ‘통영운하’와 ‘해저터널’의 구축을 이끌어냈던 야마구치 세이는 1929년 3월에 통영면장(統營面長)으로 선임된 이래 1931년에는 읍승격과 함께 통영읍장(統營邑長)이 되어 이곳에서 장기간 재직하였다. 그러다가 1938년 10월에는 동래읍장(東萊邑長)으로 자리를 옮겼고, 다시 1941년 8월에는 울산읍장(蔚山邑長)이 되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런데 듣자 하니 부산 금강공원(金剛公園;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안에는 거대한 바위면에 토쿠토미 소호(德富蘇峰, 1863~1957)의 글씨로 새겨놓은 ‘황기이천육백년기념비(皇紀二千六百年記念碑, 1940년 11월 10일 제막)’가 있다는 것이다. 가서 보니 그 아래에 ‘금강원지(金剛園誌)’라는 내용이 따로 정리되어 있는데, 이 글의 말미에도 바로 “동래읍장 종7위 야마구치 세이(山口精)”라는 표시가 또렷이 남아 있다. 이곳 역시 그가 이 땅에 남겨놓은 고약한 기념물의 하나라는 점을 새삼 기억해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