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는 교육부의 검정을 통과한 한국학력평가원의 고등학교 한국사 1·2 교과서에서 300여건의 오류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기초적 사실관계에 관한 오류뿐 아니라 식민지 근대화론과 같은 편향된 역사 인식이 근현대사 기술에 스며들었다고 분석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5일 역사학계 전문가와 교과서 집필 경험이 있는 현직 역사교사 13명에게 의뢰해 한국학력평가원 교과서를 검증한 결과 338건의 오류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연도, 단체명 등 기본적인 사실관계 오류뿐 아니라 용어 혼용, 음력·양력 표기 오류, 오타 등을 포함한 수치다. 시대별로 보면 전근대사 45건(13.3%), 개항기 32건(9.5%), 일제강점기 132건(39%), 현대사 129건(38.2%)의 오류가 발견됐다.
민족문제연구소는 한국학력평가원 교과서의 전근대사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식민사관, 식민지 근대화론이 깃든 서술이 여럿 발견됐다고 했다. 식민사관은 조선의 내부 문제로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이라는 일제의 지배 논리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일제강점기에 이뤄진 개발로 조선, 더 나아가 해방 이후 한국 경제가 발전했다는 관점을 담고 있다.
한국학력평가원 한국사 2 교과서 25쪽은 일제의 병참 기지화 정책을 다룬다. 집필진은 본문 하단에 한반도 남부, 북부 지역 공산액 비율 그래프와 일본 기업 작업장의 업종 비율 그래프를 탐구 자료로 제시하며 ‘일제의 병참 기지화 정책이 광복 이후 우리 경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아보자’는 질문을 던졌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병참 기지화 정책에 따른 한반도 공업화가 광복 이후 한국 경제의 바탕이 됐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뉴라이트적인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고 했다.
개항기 국권 수호 운동 단원에선 ‘항일 의병 투쟁보다 애국 계몽 운동이 합리적’이라는 편견을 갖게끔 하는 서술이 있었다. 한국학력평가원 집필진은 의병 투쟁과 애국 계몽 운동 중 하나를 선택해 자신의 생각을 주장해보자는 탐구자료를 제시했다. 그러면서 예시로 “국권 회복을 위해 총칼을 들고 일어난 의병의 애국 정신은 존경하지만 열악한 조건으로 일본군과 싸워 이기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 본다” “나는 순간의 분함을 참고 훗날을 도모하여 실력을 키우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 생각한다”는 내용의 글을 첨부했다. 항일 의병투쟁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쓴 글은 제시되지 않았다.
독립운동사 의미를 축소하거나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대목도 보였다. 민족문제연구소는 한국학력평가원 집필진이 한국사 2 교과서에서 김구와 김원봉의 분열을 한 페이지에 할애해 탐구 자료로 제시한 의도를 문제 삼았다. 집필진은 두 사람을 “한때 동지였지만 영원히 함께 할 수는 없었던 운명”이라고 소개했다. 이명숙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통화에서 “독립운동가의 정체성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민족주의 등으로 각기 다르지만 근본적인 목표는 독립운동이었다”며 “독립운동 진영 내부의 분열을 강조함으로써 독립운동 전체를 폄훼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해방 이후 근현대사 단원에선 역사왜곡 논란이 일었던 ‘교과서 포럼’이 만든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의 주장과 논지가 반영된 것으로 분석됐다. 교과서 포럼은 2005년 뉴라이트 인사로 분류되는 박효종·이영훈 서울대 교수가 만든 단체다.
한국학력평가원 집필진은 교과서에서 탐구자료로 ‘미국이 38도선을 제안한 배경’을 생각해보자고 제시했다. 탐구 자료에는 해방 이후 소련이 한반도 북부 지역을 점령하자 미국이 소련의 한반도 점령을 막기 위해 38도선을 제안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미국이 38도선을 제안한 배경에 대해 질문을 던지면서 강대국에 의한 한반도 분단보다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방점을 찍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교과서 포럼의 대안교과서에도 “미국은 한반도 전체가 소련군에 점령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북위 38도선을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한 미국군과 소련군 간의 군사분계선으로 황급하게 제안하였다”며 “38도선은 단순히 한반도의 분단을 불러온 것이 아니라 자유, 인권, 시장 등 인류 보편의 가치가 미국군을 따라 한반도에 상륙한 북방한계를 나타내는 선이었던 것”이라고 쓰여 있다.
38도선 서술에 담긴 논지는 남한 단독 정부론을 주장한 이승만 전 대통령의 ‘정읍 발언’을 옹호하는 서술로도 이어졌다. 정읍 발언을 다루는 탐구자료에는 교과서 포럼의 <한국현대사>가 그대로 인용됐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스탈린의 지시로 북한이 먼저 단독 정부를 세운 점을 강조하며 이승만의 정읍 발언은 이미 공산화된 북한에 대한 대응을 위한 용단이었다는 평가를 유도하고 있다”며 “교과서포럼 대안 교과서-교학사 교과서-국정교과서를 거쳐 이승만의 단독 정부 수립 책임론을 벗기기 위한 뉴라이트의 역사인식이 관철됐다”고 평가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사실관계·역사인식 등 오류가 많은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2022 개정 교육과정 고등학교 한국사 성취기준을 지목했다. 이명박 정부 시기 만들었던 2009 개정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만 봐도 일제강점기의 경우 “일제의 경제정책에 따라 경제상의 지표에 변화가 보였으나 이는 식민지 수탈 정책의 일환이었음에 유의한다”고 돼 있다. 하지만 2022 개정 교육과정 성취기준을 보면 “일제의 식민 통치가 초래한 경제구조의 변화와 그것이 경제 생활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다”고 바뀌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022 개정 교육과정에서 ‘수탈’ 대신 ‘변화’라는 가치중립적인 용어를 사용해 평가 기준을 느슨하게 만들었다고 봤다.
탁지영 기자
<2024-09-05> 경향신문
☞기사원문: 일본군과 싸워 이기는 건 불가능한 일?···민족문제연구소 “학력평가원 교과서 오류 338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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