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박마리아
1960년에 이승만 정권을 무너트린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새로운 대한민국 공화국을 세운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새로운 나라를 제2공화국으로 간주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해 그해 8월 15일자 <동아일보>는 ‘제2공화국 첫 광복절 맞아’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렇게 제2공화국이라는 표현이 사용됨에 따라, 그 이전의 대한민국은 편의상 제1공화국으로 불리게 됐다. 사실상 군주제로 운영됐던 이승만의 제1공화국은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회복된 제2공화국하에서 망국과 다름없는 취급을 받게 됐다.
제1공화국을 망국으로 전락시킨 인물 중 하나는 이기붕의 부인인 박마리아다. 1906년 생인 박마리아는 대통령 부인인 프란체스카(1900~1992)와 가장 가까운 한국 여성이었다. 2007년 8월 27일자 인터넷판 <신동아> 기사 ‘대통령 상전, 영부인 열전’에는 “프란체스카 여사의 마음에 꼭 드는 여성이 있었다. 이기붕 씨의 아내 박마리아씨였다”라고 설명돼 있다.
박마리아와 프란체스카는 사적인 친분만 유지한 게 아니었다. 이들은 공적 활동에서도 보조를 맞췄다. 두 사람은 대한부인회 활동 등을 통해 이승만 정권을 측면에서 지원했다.
법조인이자 여성운동가인 이태영은 1960년 5월 13일 자 <조선일보> ‘대한부인회를 해부한다’에서 이 단체를 “우리나라 최고 여성단체의 하나”로 지칭하면서 “총재에는 푸란체스카(이승만 박사 부인) 여사와 최고위원 고 박마리아·김철안·유각경 3씨를 비롯하여 총무부와 아홉 부(部)를 조직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라고 한 뒤 대한부인회가 “사실상 자유당의 손발”이었다고 지적했다. 두 달 전만 해도 3·15 부정선거에서 맹활약을 했던 박마리아 앞에 ‘고’를 붙인 것은 그가 2주 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박마리아와 프란체스카의 친분 관계는 이기붕이 이승만 정권에서 승승장구한 또 하나의 비결이다. 위 <신동아>는 “박씨는 한국말을 전혀 못 하는 영부인에게 세상 소식을 전하는 유일한 통로였다”라며 “대통령의 정치 구상이나 생각은 프란체스카 여사를 통해 박씨에게 전달됐고, 반대로 박씨의 뜻은 영부인을 통해 대통령에게 즉각 전달됐다”라고 설명한다.
박마리아의 친일 행위
박마리아는 이승만의 31번째 생일인 1906년 3월 26일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 고의대는 가사 도우미를 하며 박마리아를 키우다가 전도사가 됐다.
이런 배경 때문에 박마리아는 서울의 교회에서 성장하게 됐다. 그런 뒤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를 거쳐 미국에 가서 학사 및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유학 전에 호수돈여고보에서 교편을 잡은 적이 있는 그는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1932년에 이화여전 강사가 됐다.
이때까지 그가 교제한 두 남자는 훗날 세상이 다 알게 될 사람들이다. 세브란스의전 출신의 부유한 의사가 될 원용덕(1908~1968)을 이화여전 재학 시절 만났고, 근근이 노동 일을 하면서 유학 생활을 하는 이기붕을 미국 유학 중에 만났다.
강릉에서 개업의로 지내다가 1932년에 만주국 군대 군의관으로 입대한 친일파 원용덕은 해방 뒤에 헌병대사령관 등이 되어 이승만의 폭정과 장기집권을 지탱했다. 이기붕이 정치 분야에서 이승만 집권을 도왔다면, 원용덕은 군사 분야에서 그렇게 했다. 훗날 세상을 망칠 두 남자와 사귀었던 것이다. 원용덕과는 결혼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이승만 정권 하에서 동맹자 관계를 유지했다.
박마리아는 미국에서 돌아올 때는 교육자였지만, 몇 년 뒤부터 교육자보다는 친일 운동가로 더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화여전 강사를 그만둔 1935년 이후에 그는 친일 분야에서 지도적 위치에 올라섰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 박마리아 편은 “1941년 12월 조선임전보국단 지도위원을 맡았다”고 한 뒤 그가 시국강연이나 좌담회에서 발언하거나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기고한 이력 등을 소개한다.
그는 친일행위를 할 때 유학 경험을 적극 활용했다. <친일인명사전>에 정리된 바에 따르면, 그는 1941년 12월 19일자 <매일신보>에 기고한 ‘내가 본 미국 여성’이란 글에서 자기가 본 바로는 미국 여성들이 애국심이 없으므로 그런 미국과 전쟁하는 ‘우리’의 승리가 확실시된다는 논지를 폈다.
“충군애국이란 그들에게는 이해키 어려운 문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여성을 가진 국가를 상대로 한 우리 일억일심 국가총력전 깃발 아래는 어느 날인가 그들의 빳빳한 개인주의, 이기주의, 자존심은 머리를 굽힐 날이 단연코 있을 줄 압니다.”
그는 유학 경험뿐 아니라 여성의 지위도 활용했다. 다음 해 5월 13일자 <매일신보>에 게재된 ‘자식 둔 보람, 어미된 면목’에서는 어머니의 관점에서 일제 강제징병을 합리화했다. “징병령이라는 것은 천황폐하께옵서 내리신 여간한 큰 은사가 아닙니다”라고 한 뒤 “황은에 어그러짐 없이 충용하고 훌륭한 황국신민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이 혜택에 보은하는 최선의 길입니다”라고 썼다.
1973년 5월 19일자 <경향신문> 5면의 춘원 이광수 특집에 따르면, 이광수는 1932년 2월 <삼천리>에 쓴 글에서 자신이 소설 <무정> 126회를 1917년 1월부터 6월까지 연재하는 동안에 벌어들인 원고료 수입을 소개했다. “원고료는 처음엔 한 달에 5원씩 보내주더니 나중에는 10원씩 보내주었습니다”라고 말했다.
히로히토 일왕 저격미수의 주역인 이봉창 의사가 16세 때인 1917년에 약국에서 받은 월급은 숙식 제공과 10원이다. <무정>이 인기를 끌기 전에 이광수가 받은 월 원고료가 5원이었으니, 한 달 내내 신문 원고만 쓰는 것으로는 생활이 힘들었다.
박마리아는 이광수처럼 글을 많이 쓰지도 않았고 이광수만큼 필력을 인정받지도 못했지만, 기고도 하고 강연도 하고 토론회에도 나가는 투잡·쓰리잡 방식으로 친일행위를 이어 나갔다.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친일 강연이나 기고도 당연히 있었을 것이므로, 충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의 친일 수익이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쟁쟁한 친일파들에 비해 친일 수익은 적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의 친일은 적어도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데는 기여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해방 다음 달인 1945년 9월 그는 한국애국부인회 문화부장이 됐다. 이 단체는 위 기고문에 언급된 대한부인회에 흡수됐다.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활동이 이런 활동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가 충성을 바친 것은 번번이 망했다
남편 이기붕은 미국 유학 경력 등에 힘입어 미군정 통역이 되고 이승만 비서가 됐다. 이는 박마리아가 프란체스카 비서가 되어 비선 실세가 되고 이기붕이 더욱 승승장구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박마리아가 막후 실세가 된 이승만 정권은 친일청산을 탄압하는 일뿐 아니라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반공 편 가르기를 하는 등의 방법으로도 세상을 어지럽혔다. 그는 3·15 부정선거 때도 대한부인회를 동원해 이승만의 영구집권을 획책했다. 세상을 망치는 방법으로 그의 나라를 이어가고자 했던 것이다.
박마리아가 충성을 다한 일본제국은 그가 별 것 아니라고 폄하한 미국의 발 아래 무릎을 꿇었다. 그 뒤 그는 충성의 대상을 이승만 정권으로 바꾸었다. 그는 친일하듯이 ‘친이’도 열심히 했다. 그 결과, 그는 히로히토의 나라에 이어 이승만의 나라가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게 됐다. 그가 충성을 바친 나라는 번번이 다 망했던 것이다.
이승만이 하야성명을 발표하고 이틀 뒤인 1960년 4월 28일 오전 5시 40분, 그는 이승만의 양자가 된 큰아들 이강석의 총격과 함께 생을 마감했다. 남편 이기붕과 작은 아들 이강욱도 그 총에 죽임을 당했다. 이강석 본인도 그 총으로 생을 마감했다. 히로히토를 섬기고 이승만을 섬기며 세상을 망친 박마리아의 삶은 그렇게 파탄이 났다.
김종성 기자
<2024-09-08>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영부인 마음 얻고, 남편 출세시킨 그 여성의 실체
※관련기사
☞오마이뉴스: 김종성의 히,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