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이슈] ‘수준 미달’ 한국학력평가원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극우 세력이 준동하는 윤석열 정부에서 ‘진검승부’를 펼치게 될 줄 기대했건만 김이 제대로 새어버렸다. 박근혜 정부 시절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려는 시도가 반대 여론에 밀려 좌초된 후 뉴라이트 세력의 두 번째 ‘도발’이라는 점에서 나름의 수준과 품격을 갖춘 교과서일 줄 알았다. 올해 검정을 통과한 한국학력평가원(한학평)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이야기다.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심지어 독립기념관장까지 역사 연구와 관련된 다수 국책기관의 수장이 뉴라이트 논란이 있는 인사로 채워진 상황에서 한학평의 교과서는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그들의 역사 인식과 의도, 수준 등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로 여겨진 까닭이다.
최근 2022 개정 교육과정의 전면 시행을 앞두고, 교육부의 검정을 통과한 모든 과목의 견본 교과서가 일선 학교로 배부됐다. 과목별 교사들이 개별적으로 검정 교과서를 살펴본 뒤 점수를 매겨 평가한 뒤 합산해 내년에 사용할 교과서를 선정하게 된다. 현재 학교마다 모든 교사가 많게는 십수 권의 교과서들을 일일이 검토하느라 경황이 없다.
그런데 모든 과목의 교과서가 일괄적으로 배부됐는데도 유독 한국사만 나흘 뒤로 미뤄졌다. 검정 과정에 잡음이 있거나, 교육부가 교사와 여론을 상대로 간을 보려는 행태가 아니냐는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그렇듯 한학평의 교과서는 학교로 배부되자마자 모든 이의 이목을 집중시키게 되었고, 이는 장고 끝에 악수를 둔 형국이 됐다.
2022 개정 교육과정과는 전혀 무관한 아이들조차 찾아와 한학평 교과서를 구경할 수 없냐고 물을 정도가 됐다. 교과서 관련 뉴스를 봤다며, 사실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는 거다. 아직 교과서 선정 작업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한학평 교과서를 비하하는 별명을 짓는 아이들도 있다. 그때마다 그들 앞에서 (선정 작업 전)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라며 한학평 교과서를 두둔하곤 했다. 마음에도 없는 이야기라도, 아이들 앞에서는 중립적인 태도를 보여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교과서’라고 할 수 있을까?
거듭 고백하건대, 자칭 보수 세력이 만든 제대로 된 한국사 교과서가 나오기를 학수고대했다. 어차피 역사란 해석의 학문이고, 공론의 장에서 다양한 의견이 개진되고 수렴되는 과정에서 우리 역사의 ‘품’이 넓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좌우의 날개로 나는 건 새뿐 아니다. 다사다난했던 우리 역사도 좌우의 날개를 펼쳐 날 때라야 온전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이번 한학평 교과서는 좌우를 떠나 교과서라고 부르기 힘들 정도로 수준 미달이다. 기존의 역사적 상식을 무시했고, 철 지난 색깔론을 동원하는가 하면, 금기시된 식민사관을 드러냈다는 지적이 나온다는 점에서 우려를 자아낸다.
예컨대, 6.25 전쟁 이후 남과 북에서 이승만과 김일성의 독재 체제가 수립되었다는 건 이미 역사적 상식인데, 이승만의 ‘독재’는 ‘장기 집권’이라는 용어로 은근슬쩍 지웠다. 1946년 이승만의 ‘정읍 발언’은 분단으로 치달은 직접적 계기인데도, 그 책임을 오롯이 북에 넘기고 있다는 점도 위험하다.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한 수만 명의 제주도민과 여수, 순천 지역 양민들을 학살한 책임마저 북에 떠넘기려는 술책이다.
교과서 표지에 지난 연평도 포격 사건 삽화를 내건 것도 뜬금없다. 천안함 침몰 사건 이후 실시된 우리 군의 서해상 사격 훈련을 문제 삼아 북한이 도발한 것으로, 당시 국내외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북한의 정권 안정을 위한 기도라는 분석부터 과거 정부의 ‘햇볕 정책’ 승계를 거부한 이명박 정부의 대북 강경노선의 모순적 상황을 보여준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표지의 사진이나 삽화는 교과서 발행의 의도를 보여주는 지표다. 6.25 전쟁 관련 내용도 아니고, 연평도 포격 사건을 강조한 건 대놓고 반공, 반북의 기치를 높이겠다는 취지로 풀이된다.
지금까지도 일본 정부가 공식적인 사과와 배상을 거부하고 있는 ‘위안부’ 문제도 ‘끔찍한 삶을 살게 했다’는 한 줄짜리 문장으로 퉁치고 있다. 일제에 부역한 지식인들의 공과를 함께 평가하자는 탐구활동 주제에서는, ‘부역’이라는 표현조차 감춘 채 ‘협력’이라는 단어를 썼다.
임시정부에서 탄핵당하고 정부 수립 후 4.19혁명으로 쫓겨난 이승만을 대표적인 독립운동가(‘광복 후 우리 역사에 영향을 끼친 인물 7명’에 포함)로 앞세운 건 독립운동사를 희화화하는 행태다. 민족시인 윤동주와 친일 문인 서정주를 양시론적 입장에서 비교하는 건 역사를 타락시키는 행위다. 양시론과 양비론은 역사교육의 금기다.
눈에 띄는 건, 한국사 교과서 ‘1’과 ‘2’ 두 권 중 2학기 때 배우게 되는 2권의 내용이 유독 나머지 8종 교과서와 극단적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한학평 교과서 1권의 경우도 과거 국정교과서를 표절했다는 의혹에 휩싸여있어 일선 학교에서 교과서로 채택될 가능성이 크지 않다.
‘우파 ‘의 성과가 이 교과서란 말인가
한학평 교과서는 분단의 모순과 반공, 반북의 정서에 기대고 있다. 현 정부 들어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는 마음으로 이때다 싶어 제작했을 테지만, 서두른 티가 너무 역력하다. 민족문제연구소의 분석에 따르면, 사실 관계의 오류만도 무려 300건이 넘는다고 한다. 교과서는커녕 책이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하다.
이쯤 되니 검정을 담당한 교육부와 교육과정평가원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업체의 적격 여부부터 교과서 내용 검증까지 무엇 하나 제대로 걸러내지 못한 책임을 반드시 물어야 한다. 공직사회가 죄다 일손을 놓은 채 복지부동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지만, 적어도 미래세대의 교육을 책임지는 공직자라면 그래선 곤란하다.
보수를 참칭하는 극우 세력들은 입만 열면 교과서가 좌편향됐다고 부르댔다. ‘좌편향 교과서’로 수업한 전교조가 우리 교육을 망쳤다면서, 공교육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을 전교조 탓으로 돌리는 데 혈안이었다. 교육계에서도 이른바 ‘대안 우파’가 등장해 정치 세력화했고, ‘좌편향 교과서’에 맞서 ‘대안 교과서’ 제작에 발 벗고 나섰다.
그 오랜 성과물이 이 한학평 교과서라고 생각하니, 씁쓸하다 못해 얼굴마저 화끈거린다. 사상과 학문의 시장에서 경쟁하자고 대련을 신청하기엔 수준이 떨어진다. 마치 지난 2월에 개봉된 <건국전쟁>의 조악함을 떠올리게 한다. 최소한의 균형 감각조차 상실한 <건국전쟁>은 이승만의 업적을 재조명하기는커녕 우리 사회의 극단적인 이념적 양극화만 부추긴 꼴이 됐다.
한학평 교과서를 살펴보면서 엉뚱한 욕심이 생기기도 했다. 교과서를 두 권 선택해서 배워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것. 한학평 교과서와 다른 교과서를 서로 대조해 공부하다 보면, 아이들이 친일파가 미군정의 수족이 되어 이승만과 공생한 뒤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독재정권에 부역하며 승승장구한 참담한 역사를 자연스럽게 깨닫게 될 테니 말이다. 나아가 한학평 교과서 집필진의 숨은 의도까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덤으로 극우 세력의 실상도 알게 될 테고, 그들과 사상적 일심동체인 현 정부의 의식 수준을 평가할 수도 있다. 학교에서 교사들이 이번 사달을 교육에 잘만 활용하면, 아이들의 역사의식을 성장시키는 데 더없이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서부원 기자
<2024-09-10>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