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구현사제단 창립 50주년 기념 단독 인터뷰
“원해서가 아닌 시대의 요청 받고 태어난 사제단”
“고난 있었지만 민주주의, 자유해방 일깨운 은총”
“인혁당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가장 생각 나”
“독재와 싸우기 어려웠지만 교회 내부도 어려움”
“정치는 아름다운 건데 우리 스스로 거부하게 해”
“성숙한 언어, 방법으로 여야 정치인들도 대화해야”
“윤석열 정권, 아주 유아적이고 어린아이 같아 우려”
“민들레, 이태원 명단공개로 십자가…사제단의 빚”
“한국언론 바뀌려면 심장을 찢는 각오로 회개해야”
“늘 나라를 바꾼 건 청년 학생…이제 일어서달라”
[위클리 민들레] 독재와 싸워온 정의구현사제단 50년, 끝내 이기리라!. 2024.9.13.
1974년 9월 26일 창립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하 사제단)이 올해로 창립 50주년을 맞았다. 사제단은 오는 23일 명동성당에서 사제단 50주년 미사를 봉헌할 예정이다. 사제단은 한국 민주화와 인권의 상징이다. 박정희 유신 체제와 전두환 신군부에 맞서 한국현대사 한복판에서 주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50년 만에 정권이 처음 교체된 뒤에도, 2000년대에 들어 대통령이 처음 탄핵됐을 때에도 사제단은 시민의 편에 등불처럼 서 있었다. 지난해 3월엔 윤석열 정권의 폭정에 맞서 9년 만에 다시 시국미사를 봉헌하고 1년 동안 전국 각지를 돌며 신자, 시민들과 기도회를 가졌다.
13일 <시민언론 민들레>는 사제단 창립 주역이자, ‘한국사회의 양심’ ‘행동하는 성직자’로 불리는 함세웅 신부(82)를 서울 종로구 안국동 촛불행동TV 스튜디오에서 만나 사제단 반세기 역사와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역사의 산 증인인 함 신부는 사제단 50년에 대해 “사제단을 창립한 1974년이 고난의 해였는데, 고난이 아니라 우리 민족을 깨우쳐 준, 자유와 해방, 민주주의, 통일로 지향하기 위한 은총의 해였다”고 떠올리며 “50년을 회상하면서 또 다른 50년을 준비하는 그러한 시작의 의미로 (사제단 50주년을) 해석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2012년 은퇴했지만 여전히 ‘정의 구현’이 하느님의 뜻임을 설파하는 함 신부는 보수적이고 탈정치적인 교회와 한국 사회의 기득권을 형성하는 주류 세력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일갈했다. 그는 친일 외교, 친일 기조 정책으로 비판을 받는 윤석열 정권을 향해 “아주 유아적이고 어린아이 같다”며, 정치권이 예수의 지혜에 따라 “더 성숙한 언어와 방법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언론에 대해서도 “반성 작업이 없다”며 “심장을 찢는 죽을 각오로 변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아울러 젊은 세대에게는 역사를 바꾼 것은 청년, 학생이었다며 “일어서달라”고 호소했다.
다음은 함세웅 신부와 일문일답이다. 자세한 인터뷰 내용은 시민언론 민들레 유튜브 채널에서 확인할 수 있다.
-먼저, 2012년 은퇴 이후 근황은.
“상도동에 살고 있는데, 오전 시간에는 개인적으로 자유롭게 지내고 있다. 아침 기도하고, 동네 산책하거나 요가하고, 미사를 봉헌한다. 오후에는 신학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 인권의학연구소, 비상시국회의 등 여러 단체모임이 있어 참석하면서 많은 분들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있다. 저녁에 와서 하루 일과를 종합하고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면서 우리 민족 공동체를 위해 기도 올리면서 잠들곤 한다.”
-사제단이 창립 50주년을 맞았다. 당시 사제단을 창립한 구체적인 계기는 어떻게 되는지.
“로마에서 8년간 유학을 하고 끝낸 뒤 1973년 6월에 귀국했다. 바로 그 전 해인 72년 유신체제가 선포됐다. 귀국하면서 (한국 사정을) 잘 모르니까 동창 사제와 함께 지내면서 배우고 있었는데, 6월 25일 중·고등학생들이 서울역부터 서울운동장(구 동대문운동장)까지 반공 궐기 대회를 하는 장면을 처음 목격했다. 8년을 유학하고 처음 봤을 때 놀랐다. 청소년 학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느낌을 얘기했더니 동창 사제들이 말조심하라고 일깨워줬다.
그런 긴장 속에서 살고 있는데, 첫 번째 발령받은 곳이 연희동 성당의 보좌(신부)였다. 그해(73년) 8월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일본에서 납치됐다가 돌아왔다. 김 전 대통령이 가톨릭 신자니까 가족들이 요청해서 가정 방문을 했는데 중앙정보부(중정, 현 국가정보원) 요원들이 다 차단하니깐 들어갈 수도 없고, 하루 종일 끌려다녔다. 첫 보좌 생활 때 아픈 체험을 하면서, 세상에 대해서, 현 정치에 대해서 이의를 갖게 됐다.
그 다음 해인 74년 1월부터는 긴급조치 1·2·3·4호가 연달아 3~4개월 동안 발동되면서 장준하, 백기완 선생님이 구속되고, 박형규 목사님이 남산 부활절 예배를 한 사건으로 (74년 4월에) 구속이 됐다. 목사님도 구속되고 지성인도 구속된 상황에서 젊은 사제로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마음만 아프고 고심하면서 마더 테레사 책 번역에 집중하고 있었던 터에, 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이 일어나면서 대학생 수백 명과 목사님이 구속이 되고, 연이어 지학순 주교님이 (74년 7월에) 구속됐다.
우리 사제들을 깨우쳐 준 청년 학생들이 우리 시대의 교사였고, 감옥에 갇힌 지학순 주교님이 우리를 성당에서 역사 현장으로 이끌어냈다. 우리가 원해서가 아니라 시대의 부름을 받고 시대 요청에 의해서 응답했다. 선·후배, 동료 사제들이 함께 응답했다.”
-성직자들이 가지는 지향 가운데 정의, 평화, 사랑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정의를 특별히 택한 이유가 있었는가.
“그해(74년) 7월부터 한 달, 두 달, 석 달 쭉 기도하다가 사제단의 정체성을 위해서 이름이 필요했다. 지학순 주교님의 교구인 원주에 가서 성당에서 기도하다가 사제들이 모임을 가졌는데 많은 이름이 나왔다. 통일, 자유, 평등, 일치, 사랑 등 다 나왔는데, 그때 선교사 신부님 한 분이 저를 부르더니, ‘정의’를 선택하라고 했다. 정의라는 개념이 하느님의 특성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대표적 속성이고, 정의가 대표적인 가치니깐 그걸 선택하라 암시를 주셨다.
하느님의 이름이 수천수만 가지다. 정의로우신 하느님, 자비하신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 용서하신 하느님 등 여러 가지 이름이 있는데, 그 모든 이름을 다 포괄할 수 있는 이름의 대표적인 것이 정의다. 어떤 의미에서 정의는 사랑보다 더 큰 개념이다. 정의 때문에 하느님의 심판이 있다. 선한 사람들을 상 주시고 악한 이들을 벌주시는 내용은 사랑을 넘어서는 정의의 개념만으로 설명할 수 있다.
제가 신부님들과 대표 신부님께 말씀드리고, 신부님들이 논의하셔서 정의로 이름을 선택을 하게 됐다.”
-사제단이 50주년 지났는데 성과를 평가한다면.
“성과라기보다는 과정이다. 성경에서 아름다운 숫자는 40이다. 약속의 땅을 거쳐서 광야를 거쳐서 약속의 땅에 들어간 게 40년이라고 한다. 40년 여정도 긴데 그보다 더 긴 50년이 됐다. 성경에선 50년은 희년이라고 한다. 기쁨의 해다. 하느님과 화해하고, 이웃과 화해하고, 역사와 화해하고, 특별히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 노예들을 풀어주어는 자유와 해방의 의미를 지닌 것이 50년 희년이다. 교회는 50년마다 희년을 선포하면서 화해하고 용서하고 일치하고 아름다운 미래를 꾸리라고 얘기하고 있는데, 그 50년을 우리가 맞이했다.
(사제단을 창립한) 1974년이 고난의 해였는데 (지나고 보니) 그 해가 고난이 아니라 우리 민족을 깨우쳐 준, 자유와 해방, 민주주의, 통일로 지향하기 위한 은총의 해였다. 박정희 유신체제 억압이 (역설적으로) 우리 청년 학생들을 통해서 우리 민중 전체를 깨워준 은총의 해였다. 그래서 50년을 회상하면서 또 다른 50년을 준비하는 그러한 시작의 의미로 해석을 하고 있다.”
-50년 여정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면.
“아픈 사건이다. 1975년 4월 9일 박정희 유신 체제에서 여덟 분의 인혁당 관계자들이 사형을 당했다. 대법원 판결 나자마자 17시간 만에 사형 당하신 것이다. 나중에 서류를 보니깐 대법원 판결나기 전에 이미 교도소에 사형 통지서가 도착했다.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박정희가 가장 크게 잘못한 업보로 늘 기록되고 있는 것이 인혁당 조작 사건인데 여덟 분의 희생 사건이 늘 아프다. 그 가족들, 자녀들을 지금도 만나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두 번째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 87년 6월 항쟁의 계기가 됐던 박종철 청년학생의 고문치사 사건이다. 그 당시에 이부영 선생과 안유 보안계장, 한재동·전병용 교도관, 그리고 김정남 씨를 통해서 저희들한테 (고문치사 조작 사실이) 전달됐고, 유현석 변호사님이 그 서류들을 다 정리해 주셨다. 사건이 나면 우리가 구속돼야 하니까 발표문을 전부 다 변호사님이 검증해 주시고 발표를 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공개가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다는 것을 늘 마음속에 간직하면서 묵상하고 있다.”
-아쉬운 점은 없었나.
“제일 큰 아쉬운 점은 우리 교회의 반성이다. 74년 7월 10일 명동 성당에서 첫 기도회를 할 때 지학순 주교님이 잠시 풀려나셨다. ‘주교님이 풀려나셨으니까 됐다’ 그러고 대부분 많은 분들이 돌아갔다. 또 많은 사제들과 수도자들, 신자들은 지학순 주교의 석방으로 끝난 게 아니다, 감옥에 많은 청년 학생들, 목사님들이 계시는데 이분들을 우리가 같이 바깥으로 모셔와야 된다고 해서 철야 기도를 했다. 새벽까지 기도도 하고 토론도 했었다.
그때 한 조에서 나온 의견이 ‘이 모임이 지속되기 어렵다, 지금은 박정희 유신독재 때문에 이렇게 모였고 비상체제를 초래하기도 했지만 교회 속성상 주교님들이 언젠가 민주화가 되면 이 모임을 방해하고 견제하고 통제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서 일을 하는데 그럴 리가 있냐’라고 했는데, 그 해석이 예언이 됐다. 우리가 독재와 싸우는 것도 어려웠지만 교회 내에 권력이랄까, 통제하는 분들과 부딪치는 부분이 더 어려웠다.
예수님께서도 항상 집안을 잘 단속해라 그러셨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 교회 주교님들을 비롯한 구성원들 모두의 내적 쇄신과 회개, 이것이 전제되고 선행되어야 한다. 늘 교회에 쇄신을 위해서 더 기도하고, 또 호소했다.”
-가톨릭 교회가 보수화되고 극단적인 탈정치화 흐름으로 가고 있다는 평가들이 있다.
“보수라든지 정치화란 개념이 우리 한국 사회에서는 잘못 전달되고 있다. 79년 가톨릭의 가장 진보적인 신학자인 한스 큉 신부님이 한국에 오셨다. 그런데 그분의 강연이 평범했다. 예수님 말씀, 성경 말씀, 진리, 정의, 사랑, 이런 원칙적인 말씀을 하셨다. 그래서 한스 큉 신부님에게 강연이 끝난 다음에 ‘신부님은 진보적인 신학자인데 가치관은 어디서 나오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신부님이 자신도 보수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 그래서 어떻게 보수주의자냐고 했더니, 하느님의 말씀을 보존하고 간직하고 지키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 그 사람이 진보주의자라고 했다. 보수와 진보는 한 짝인 것이다.
그래서 기자들을 만날 때마다 설명을 했다. 나는 진보주의자가 아니라고 했지만, 기자들이 안 듣는다. 우리는 친미, 친일이라고 하면 보수라고 한다. (친미, 친일은) 반민족이다. 그게 어떻게 보수인가. 구태여 말한다면 수구다. 옛날 것만 간직하는 수구지 보수가 아니다. 단어 자체를 잘 선택해야 되겠다. 언어가 때가 묻었다.
탈정치와 관련해서는,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정치적 존재다. 70년대 마다가스카르에서 신학자들의 선언이 나왔다.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정치적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투표 행위, 언어행위, 정치에 대한 의견 표명, 언론, 이게 다 정치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하느님의 구원의 정치라고 한다. 성경에서 정치를 빼면 남는 게 없다. 바티칸이 정치하는 거 아닌가. 교회는 선교 정치다. 정치는 아름다운 건데 이것을 우리가 너무 거부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아름다운 보수일 뿐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시민이 돼야 한다. 하느님께 기도하는 게 정치적인 선언이다. (웃음)”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항일독립선열선양단체연합(항단연) 회장으로서 현 정부의 외교정책에 대해 평가한다면.
“외교관들이 ‘메이 비(May be, 어쩌면)’ 그러면 그게 ‘노(No, 안 된다)’이고, ‘예스(Yes, 된다) 그러면 ‘메이 비(May be, 어쩌면)’이고, 슈어(Sure, 확실하다)라고 해야지 ‘예스(Yes, 된다)라고 한다. 외교관들의 어법은 속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이끄는 대화의 한 방법이라고 한다. 그런데 현 정부의 외교정책을 보면 아주 유아적이고 어린이 같다.
교황님이 몇 해 전 한국에 오셔서 말씀하실 때, ‘여러분들은 남과 북이 같은 언어를 쓰고 있지 않습니까. 같은 말을 쓰고 있다면 어머니가 같다는 뜻입니다. 어머니가 같으면 한 형제자매입니다. 조금 여유 있는 여러분들이 어려운 북한을 도와주는 것은 아름다운 형제자매입니다’ 이렇게 말하셨다. 이 선택이 평화로 나아가는 길인데, 이 (윤석열 정권) 사람들은 짓궂은 어린이, 심술궂은 말썽쟁이로 일을 하고 있다.
더군다나 우리를 36년 침략한 침략국인 나라와도 동맹을 하자 그러는데 이건 정신 나간 일이다. 이제 미국도 우리나라를 위해서 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자국을 위해서 한다. 그럼 이것을 분명히 인식하면서 내 정체성을 가지고 외국과 관계를 잘 맺어야 되는데, 이 사람들 정말 철부지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야, 이거 나라를 팔아먹겠다, 거덜나게 하겠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데, 정말 가슴 아프다.
실제로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을 때, 그 당시에 왕과 대신, 공직자들이 미숙해서 나라를 빼앗겼지 않은가. 이 (정권) 사람들이 얘기할 때 ‘선조들의 미숙함 때문’이라고 하는데 바로 그 미숙함을 자기들이 하고 있는 것이다. 너무 가슴이 아프다. 정말 깨어나면 좋겠다.”
-의료대란 등 쌓여있는 문제들을 보면 정치권에도 하고 싶으신 말씀들이 많으실 것 같다.
“2000년 전에도 정치권이 혼란했다. 가진 사람과 안 가진 사람이 싸우고, 또 율법학자들과 시민들, 평민들의 다툼이 있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꼭 동네 아들 패싸움 하는 거 같다며, 성숙하고 지혜롭고 어른스러워라 했는데 저희 모두가 다 그래야겠지만 여야 정치인들은 더 성숙한 언어와 방법을 쓰면 좋을 것 같다.
의료대란과 관련해선 하나씩 우리가 풀어가야 문제인데, 이분(대통령)이 노동자를 탄압했기 때문에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라고 착각해서 해석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의사들을 누르면 또 되겠다라고 아주 얄팍한 술수로 시작했는데, 안 먹히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약하지만, 의사들은 집단이 크니까 목숨 걸고 대드니깐 못 하는 거다.
(그렇지만) 의사들도 의학도로서 히포크라테스의 정신을 늘 가지면서 초심을 가지면 참 좋겠다. 정치인들도 정치를 시작했을 때는 봉사하기로 마음을 먹는데, 그게 없어지고 장악하고 뭘 가지려고 한다. 그런 욕심들을 서로 제거하면서 원자리로 왔으면 좋겠다. 지금 시대는 너무 민감하기 때문에 조심스러워서 침묵을 지키면서 아픈 마음으로 지켜보고 기도만 하고 있다. 양측에 대고 호소만 하고 있다.
추석 연휴 때 정말 편찮으신 분들 생기면 큰일인데, 그런 의미에서 공동체를 위해서 함께 기도하고 있다.”
-현재 언론에 대해 평가한다면.
“우선, 시민언론 민들레가 이태원 참사 희생자 명단 공개로 애썼다. 이 기회에 민들레에 감사를 드린다. 저희들이 반성하는 거는, 원래 사제단에서 기도를 통해서 (희생자) 명단을 알리기로 했는데 주저했다고 한다. 그래서 민들레가 먼저 발표를 하고 십자가를 먼저 졌다. 그 부분은 저희들이 빚이 있다. 평가를 드린다.
언론에 대해선 제가 평화방송·평화신문을 만들 때 언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이다, 목소리와 문자를 통해서 (말씀이) 나가면 이 건물을 넘어서는 공간 전체가 성당이고 공간 전체가 하느님의 영역이다, 이 성당을 넓히는 것이 바로 선교라고 신자들한테 호소했다. 성경 자체가 언론이다. 저는 방송과 신문을 이렇게 하느님의 신문과 방송으로 해석했다.
그랬는데 이것이 왜곡을 하면 또 (문제가) 큰 것이다. 언론의 역기능을 잘 봐야 한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은 일제시대나 북한이 남침했을 때 대문짝만하게 보도했지만 자기들의 부끄러운 역사를 고백하지 않는다. 가톨릭도 나쁜 짓을 많이 해서 항상 고백한다. 완전하지 못했지만, 중세 마녀사냥부터 갈릴레오 사건, 히틀러 때 침묵했던 사건 등을 항상 반성한다. 반성 작업이 중요한데 언론은 반성 작업이 없다.
언론이 변화하면 종교도, 세상도 바뀔텐 데 안 된다. 성서에서 회개하라고 그러는데 성서의 회개는 옷을 찢지 말고, 재를 뿌리지 말고, 심장을 찢으라고 한다. 심장을 찢으면 죽지 않는가. 죽을 각오로 변해야 된다는 것이다. 회개해야 한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심장을 찢는 마음으로 응해야 된다는 예언서의 말씀을 되새겨본다.”
-마지막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사제가 될 때 신학교에서 또 다른 그리스도다, 또 다른 예수다, 이렇게 교육을 받았다. 신앙을 위해서, 정의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쳐야 된다고 배웠다. 민족과 역사와 공동체를 위해서 바치는 삶이 사제의 삶, 아름다운 시민의 삶, 또 선조들을 따라가는 삶이 아닐까 생각한다.
특히 우리 시대 젊은이들에게 대화하고 호소하고 싶다. 일제시대 때 나라를 빼앗겼을 때, 나라를 찾기 위해서 앞장선 분들은 청년 학생이었고, 독재와 싸웠던 분들도 청년 학생들이었다. 요새 여러 가지 어려움 때문에 청년 학생들이 이런 가치를 조금 놓치고 있지만, 청년 학생들이 깨어나야지 그 민족과 공동체에 희망이 있다. 이제 청년 학생들이여, 일어나 주십시오. 고맙습니다.”
인터뷰 = 유상규 에디터, 이지은 변호사 / 정리 = 김성진 기자
<2024-09-14> 민들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