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의 히,스토리] 여순사건을 반란으로 규정한 한국사 교과서, 바로잡지 않으면 반복된다
여순사건을 반란으로 규정한 교육부의 한국사 교과서 검정 결과에 대해 여수시민들이 반발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여수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와 여수시의회는 12일 공동성명을 통해 반란 표기 삭제와 해당 교과서의 검정 취소를 촉구했다.
여수시민들은 교육부 검정을 통과한 한국사 교과서 5종이 “반란군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으나 도주한 반란군의 일부는 지리산 등에 숨어 게릴라전을 하며 저항하였다”라는 식의 서술을 통해 사건 관련자들을 ‘반군’, ‘반란 폭도’, ‘반란세력’ 등으로 폄하한 것에 항의하고 있다.
2021년 개정된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5·18특별법)’ 제1조의2 제1항은 “5·18민주화운동이란 1979년 12월 12일과 1980년 5월 18일을 전후하여 발생한 헌정질서 파괴범죄와 반인도적 범죄에 대항하여 시민들이 전개한 민주화운동”이라고 정의했다. 광주 5·18을 전두환 신군부의 헌정질서 파괴에 맞선 의거로 규정한 것이다. 이에 비해, 작년 8월 개정된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여순사건 특별법)’ 제2조 제1호는 이렇게 정의한다.
“여수·순천 10·19사건이란 정부수립의 초기 단계에 여수에서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14연대 일부 군인들이 국가의 제주 4·3사건 진압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사건으로 인하여 1948년 10월 19일부터 지리산 입산 금지가 해제된 1955년 4월 1일까지 여수·순천 지역을 비롯하여 전라남도·전북특별자치도·경상남도 일부 지역에서 발생한 혼란과 무력 충돌 및 이의 진압 과정에서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국군 제14연대가 4·3 진압명령을 거부한 것이 발단이 됐다고 했다. 이 거부가 옳았는지 아닌지에 대한 가치 판단은 배제했다. 5·18의 경우에는 전두환 측의 행위를 헌정질서 파괴범죄로 명확히 규정하고 시민들의 행위를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한 것과 대비된다. 이렇게 가치 판단을 배제한 상태에서 여순사건 특별법은 무력 충돌 및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을 ‘여수·순천 10·19 사건’으로 정의했다.
이승만 정권의 부당한 명령에 맞선 국군의 출동 거부가 옳았는지 아닌지에 대해 명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만큼의 사회적 역량이 구비되지 않아 그렇게 된 측면도 있지만, 가치 판단을 배제하는 이런 방식은 극우 뉴라이트 세력이 여순사건을 공산주의 반란으로 매도할 여지를 남긴다.
여순사건에 대한 애매한 서술
5·18을 북한 사주에 의한 폭동으로 몰아가는 역사왜곡이 현저히 줄어든 데는 이미 1990년대부터 전두환을 악인으로 공식 규정해둔 것과 무관치 않다. 여순에 대해서는 그런 규정이 없기에 이번 교과서 검정과 같은 일이 앞으로도 재연될 가능성이 남아 있다.
금년 1월 개정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4·3특별법)’ 제2조 1호 역시 “제주 4·3사건이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함으로써 여순사건 특별법과 비슷한 방식으로 사건을 정의하고 있다.
뉴라이트세력이 5·18에서 4·3으로 공격의 초점을 옮기는 것은 이 같은 개념 정의의 허점과도 관련이 있다. 이런 방식은 극우세력이 4·3처럼 10·19에 대해서도 그 허점을 파고들 수 있게 만든다.
사건 자체에 대한 가치 판단을 보류한 채 희생자 및 유족 예우에만 집중하는 접근법은 지금 당장에는 파장을 줄일 수 있지만, 길게 보면 일을 두 번 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사건 자체의 성격 규정을 자꾸만 미루게 만들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희생자 및 유족에 대한 배상에도 지장을 주게 된다. 또 사건의 성격을 명확히 정리하지 않기 때문에 신속한 진상규명도 방해를 받게 된다.
여순사건을 일으킨 국민들이 나쁜 목적을 갖고 궐기했던 것은 아니다. 이들의 동기는 광주시민군과 다를 바 없었다. 정권의 부조리한 명령에 대한 반대와 저항을 표시하고자 일어섰을 뿐이다. 이들은 출동 명령을 거부한 직후에 ‘제주토벌 출동거부 병사위원회’를 조직해 아래와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이 진압되고 한 달 뒤인 1948년 11월 30일 <동아일보> 2면 좌상단에 나온 내용이다. 당시의 표기법 그대로 인용한다.
“우리들은 조선 인민의 아들, 노동자·농민의 아들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사명이 국토를 방위하고 인민의 권리와 복리를 위해서 생명을 바처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제주도 애국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직전에 조선 사람의 아들로서 조선 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 인민의 복지를 위하여 총궐기하였다.”
이들은 제주도의 동족들을 내 손으로 죽일 수 없어 궐기한다고 천명했고, 이 명분에 따라 불법·부당한 이승만 정권에 맞섰다. 제주도를 위하는 척하면서 제주도민들을 살상한 이승만 정권의 명분·행위 불일치가 이들에게서는 없었다. 옳은 명분을 내세우고 이 명분에 따라 행동했다면 의거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군복만 입고 있었을 뿐, 이들은 광주 시민군과 다를 바 없는 의병들이었다. 이들의 행동이 정의롭지 않았다고 말할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까지 이들을 반란군으로 매도한 것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것이었다.
검정교과서 논란 반복 막으려면
제14연대 군인들의 궐기 명분에 더해 이들의 조직 구성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국군에 속해 있었지만, 실상은 여수 주민들의 군대였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가 펴낸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제6권은 “14연대 모병이 마을마다 할당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연대 의무병 곽아무개의 증언을 소개한다.
박정희의 친구이자 제4연대장이었던 이한림은 자기 휘하의 부연대장인 이영순을 제14연대장으로 파견할 당시에 이영순 휘하의 병력이 얼마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한림 회고록인 <세기의 격랑>은 “이영순 소령은 기간요원과 제1대대 병력을 인수받아 가지고 여수로 내려가 항공부대 자리에 제14연대를 창설하였다”고 회고한다.
1948년 창설 당시 제14연대의 정원은 3천 명이었다. 지난 6월 30일 <호남학> 제75집에 게재된 노영기 조선대 교수의 논문 ‘제14연대의 창설과 변화’에 따르면, 이영순은 “제14연대를 창설하는데, 제4연대에서 기간요원 50명을 데리고 여수에 가서 창설하였다”고 회고했다. 기간요원 50명과 1개 대대 병력밖에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머지 병력은 의무병의 증언처럼 여수·순천 현지에서 충원할 수밖에 없었다.
노영기 논문에 따르면, 제14연대의 어느 하사관은 “여수·순천·광양·구례로 돌아다니면서 모병을 해오는 거예요”라며 신병 충원 방식을 설명했고, 여수 백야도 출신의 14연대 군인은 “입대하면 배고픔은 면하겠다는 생각으로 마을 청년들과 함께 자원 입대를 하였다”고 구술했다.
제14연대가 주로 현지 청년들로 구성됐다는 것은 4·3 진압명령을 거부한 이 부대의 행위가 지역민들의 정서와 상충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현지인 사병들의 협력을 받아 현지에서 거사를 벌이는 소수의 리더들이 현지인들의 정서도 고려하지 않고 일을 벌였을 리는 만무하다. 민족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소수의 군인들이 주동적으로 나선 것은 사실이지만, 현지 출신 병사들이 호응해주지 않았다면 여순사건은 일어날 수 없었다.
봉기한 무장세력 중에는 제14연대뿐 아니라 현지 민간인들도 섞여 있었다. 1882년 임오군란이 명칭과 달리 하급군인뿐 아니라 한양 주민들에 의해서도 주도됐듯이, 여순사건 역시 군인과 주민들의 협력하에 전개됐다. 2천에서 5천 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하고 그중 상당수가 민간인이었던 것은 이 사건이 민중의 참여 속에 전개됐음을 방증한다. 애매하게 희생된 민간인들도 있었지만, 현지 출신 군인들에 더해 현지 주민들의 지지가 있었기에 이 사건은 파괴력을 띨 수 있었다.
여수·순천과 이웃 지역 출신의 제14연대 군인들과 현지 주민들이 출동명령 거부에 공감을 표시한 것은 남북분단을 거부하는 제주도민들에 대한 진압 명령이 부당하고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명분으로 궐기한 바다 건너 제주 이웃에 대한 이승만의 탄압이 옳지 않다는 지역민들의 항의 표시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의거이고 항쟁이었다는 전제하에 사건을 해결하지 않으면 이번 교과서 검정 같은 일이 앞으로도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다. 5·18처럼 여순사건도 의거였다고 공식적으로 못을 박을 필요가 있다.
김종성 기자
<2024-09-18>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여수·순천 군인들 두 번 죽인 교과서… 두고두고 문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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