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이두황
1년이 11개월밖에 없었던 해가 있다. 음력으로 을미년 11월 16일은 양력으로 1895년 12월 31일이다. 이 날을 마지막으로 조선에서 음력이 폐지되고 다음날부터 양력이 사용됐다. 음력에 익숙해 있었던 조선인들은 11월의 절반과 12월이 뚝 잘려 나가는 인식상의 대혼란을 겪게 됐다.
마지막 음력의 해인 그해 8월 대보름 직후였다. 이때 조선인들은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다. 음력으로 고종 32년 8월 20일 자(양력 1895.10.8) <고종실록>은 “왕후가 곤녕합에서 붕서했다”라고 알려준다. 44세의 명성황후는 일본인들이 자행한 을미사변의 결과로 세상을 떠났다. 왕후가 국모로 추앙되던 시절에 일본인들에 의해 그런 참극이 자행됐으니 당시 사람들의 충격은 클 수밖에 없었다.
추석의 흥취가 아직 남아 있는 음력 8월 20일에 그런 불상사가 벌어지고, 그 여세를 몰아 일본이 제4차 김홍집 내각을 출범시키고 이른바 을미개혁을 시행해 단발령과 양력제 등을 발표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8월 보름달이 뜬 직후에 대중의 머리카락이 잘려 나가고 음력 12월이 잘려 나가는 변고가 이어졌으니, 그해 추석 명절이 그 시대 사람들에게 낭만적으로 기억되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을 도와 시해에 가담한 이두황(1858~1916) 같은 친일 군인들은 그것을 변고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한일 협력’을 위한 일이라고 자부했다. 일본을 견제하고자 ‘한러 협력’을 추진하는 고종 부부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라고 합리화했던 것이다.
이두황과 함께 을미사변에 가담한 한국인 중 하나가 군부협판(국방차관) 이주회다. 1993년에 발행된 <친일파 99인> 제1권에 실린 강창일 배재대 교수의 글에 따르면, 이주회는 사변 3년 전인 1892년에 극우 승려 다케다 한지에게 “조선을 망친 것은 민비이기 때문에, 조선을 구하고 조선과 일본의 협력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민비를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 한일 협력을 위해서라면 명성황후를 얼마든지 희생시킬 수 있다는 발상이 친일파들의 머릿속에 있었던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 가담하고… 11년 일본 망명 생활
1895년의 추석을 그렇게 망친 친일파 이두황은 철종 임금 후반기에 한양의 평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 이두황 편은 “1882년 2월 무과에 급제하고, 3월 친군좌영 초군에 임명되었다”고 알려준다.
24세 때 무관 말단직이 된 그는 그 뒤 고속으로 승진했다. <친일인명사전>은 “1886년 1월 훈련원 주부를, 1887년 12월 훈련원 첨정을 맡았다”라며 “1889년 9월 흥해군수에 임명”됐다가 곧바로 다른 관직으로 옮겨갔다고 말한다. 서민 가정에서 태어난 인물이 무과 급제 7년 만인 31세 때 잠시나마 지금의 ‘포항 시장’을 지냈던 것이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894년, 일본군이 자국민 보호와 동학혁명 진압을 빌미로 조선 땅에 무단으로 들어왔다. 한국 역사학계가 ‘일본 침략’보다는 ‘일본 파병’이나 ‘일본군 상륙’ 등으로 부르는 이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일어난 일은 그가 어떤 방식으로 지위를 높여갔는지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친일파 99인>에 실린 강창일 교수의 또 다른 글인 ‘이두황: 이토 히로부미의 총애를 받은 친일 무관’은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이 이 땅에서 엉뚱하게도 청일전쟁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고 이두황이 자진해서 일본군에 투항했다고 알려준다. “그는 일단의 조선인 병사를 데리고 일본군 제5사단장 노즈 중장을 찾아가 참전시켜 줄 것을 간청해서 종군하게 되었다”고 이 글은 설명한다.
일본군 자원봉사를 신청한 그는 통역도 해주고 정탐도 해줬다. 청나라 전사자들의 시신을 매장하라는 일본군의 명령을 받고 그 일도 거들었다. 조선의 녹봉을 받는 무관이 독단적으로 ‘한일 군사협력’에 나섰던 것이다.
이 시기에 그가 벌인 일은 그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반외세 항쟁인 동학혁명을 진압하는 조선군의 양호우선봉장(兩湖右先鋒將)으로도 활약했다. 호남·호서의 동학군을 진압하는 이 직책을 수행하면서 <양호우선봉일기>를 남기기도 했다.
1894년에 침략한 일본군은 조선 군대를 제압한 뒤 청일전쟁을 일으켜 승리를 거두고, 뒤이어 동학군을 초토화시켰다. 이로써 마음 놓고 조선 정국을 장악하게 된 일본은 명성황후와 고종이 이 상황을 타개할 목적으로 러시아 쪽을 바라보자 을미사변이라는 초강수를 내놓았다.
일본군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려고 경복궁을 침범한 날, 이두황은 일본군을 위해 광화문에서 망을 봐줬다. 그가 망을 봤다는 점은 일본 극우단체 흑룡회가 1966년에 펴낸 <동아 선각지사 기전(記傳)>에서 확인된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12권에 인용된 <동아 선각지사 기전>은 이두황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그는 제2대대장으로서 광화문을 경위하고 있었는데”라고 말한다. 이날 그는 광화문을 지키다가 친러시아파 연대장인 홍계훈에게 칼을 맞을 뻔했다. 일본군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날 광화문 앞에서 피를 흘리고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일본이 비호해준다 해도 중전 살해에 가담한 조선 군인이 이 땅에서 무사히 살 수는 없었다. 명성황후의 남편인 고종이 자리를 지키는 한 그랬다. 양력 기준으로 을미사변 3개월 뒤인 1896년 1월 7일, 그는 체포령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11년간 계속될 망명 생활의 시작이었다.
그의 일본 생활은 망명객의 생활답지 않았다. 목숨을 걸고 일본을 도왔다는 자부심 때문인지, 일본 정부의 비호를 받으며 꽤 요란스럽게 생활했다.
위 <친일파 99인>은 이두황과 함께 일본에서 생활한 망명객들이 “마치 영웅호걸인 양 활개를 치고 다녔다”라며 “얼마나 설치고 다녔는지 이들을 돌보아주고 있던 일본 근대화의 기수 후쿠자와 유키치도 ‘자기 나라 국모를 죽인 자들이 은인자중하지 않는다’고 질책할 정도였다”고 설명한다. 일본을 움직이는 사상가의 눈에도 꽤 한심하게 비쳤던 것이다.
이두황이 달아난 지 11년 뒤인 1907년에 고종황제가 강제 퇴위를 당했다. 이두황은 그 직후에 특별사면을 받고 귀국해 이토 히로부미의 후원하에 중추원 부찬의, 전북관찰사, 전북재판소 판사 등을 역임하고, 1910년 일제 강점 뒤에 전라북도장관과 전북토지조사위원장 등을 지내다가 1916년에 사망했다.
이두황의 친일 재산
일본은 그에게 답례를 많이 했다. 청일전쟁 직후와 고종 퇴위 이후에 그가 역임한 관직들은 일본이 준 것이었다. 여기서 발생한 친일 녹봉 외에도 많은 친일재산이 그에게 주어졌다.
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에는 그가 1910년 이후에 일제로부터 받은 상금 내역이 도표로 정리돼 있다. 이에 따르면, 조선총독부로부터 1910년에 160원 66전 및 이와 별도의 5천 원, 1911년에 420원, 1912년에 250원, 1913년에 295원, 1914년에 220원, 1915년에 150원, 일본 정부로부터 1916년에 1000원이 상금으로 지급됐다.
1911년 4월 8일 제정된 헌병보조원규정에 따르면, 한국인 헌병보조원의 월급은 침식 제공 없이 원칙상 7원에서 16원 사이였다. 이두황이 받은 위 상금 중 가장 적은 액수인 1915년의 150원은 평균적인 헌병보조원의 연봉보다 많았다. 총독부는 1910년 10월 1일 상금 5천 원을 수여하면서 “부지런히 일한 것이 적지 않기에 전기(前記) 금액을 하사함”이라고 시상 사유를 밝혔다. 일본이 볼 때에 꽤 근면하게 친일을 했던 것이다.
사망한 달인 1916년 3월, 그는 서보장이라는 훈장을 받았다. 한국병합기념장, 일본적십자사 유공장, 다이쇼’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 등을 받은 상태에서 서보장까지 받은 것이다.
1888년에 제정된 이 훈장의 의미에 관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3-1권은 “국가 또는 공공에 대해 공로가 있고 공무 등에 장기간 재직하여 성적을 올렸던 자를 수여 대상으로 하였다”고 설명한다. 일제가 볼 때 그는 부지런할 뿐 아니라 장기간 지속적으로 공로를 세우는 친일파였다.
후쿠자와 유키치처럼 ‘은인자중 못하는 친일파’로 한심하게 바라보는 일본인들도 있었지만, 일본 국가가 공식적으로 볼 때 그는 상당히 모범적인 친일파였다. 1895년의 추석을 망쳐 놓은 친일파 이두황은 일본에 대해서만큼은 한없이 충직한 인물이었다.
김종성 기자
<2024-09-15>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일본인도 경악한 친일파의 화려한 망명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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