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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추사 김정희 작품 있지만… 이런 전시회 정말 괜찮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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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성찰이 필요한 장택상 컬렉션

▲ 구미성리학역사관에서 열리고 있는 ‘창랑 장택상 선생 컬렉션’에 전시된 장택상의 여권사진 ⓒ 구미시

추석 연휴 직전인 지난 12일부터 고 장택상 총리의 예술품 컬렉션 전시회가 경북 구미시에서 진행되고 있다. 구미시가 구미문화원과 함께 구미성리학역사관에서 10월 31일까지 열게 될 ‘창랑 장택상 선생 컬렉션’에는 그가 수집한 청화백자와 추사 김정희 작품 등이 전시된다.

구미시가 이 행사를 여는 것은 꼭 예술적 목적 때문만은 아니다. 장택상이라는 인물을 조명하는 데에 큰 목적이 있다. 구미시가 지난 9일 발표한 보도자료는 “이번 전시는 구미 오태 출신 장택상 선생이 수집한 예술품을 통해 그의 예술적 안목과 인간적 면모를 조명하는 자리”라고 한 뒤 이렇게 설명했다.

“창랑 장택상 선생은 구미 오태동 출신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구미위원으로 활동하며 청구구락부 사건으로 투옥되는 등 항일운동에 적극 참여한 인물이다. 해방 후에는 초대 외무부장관과 국무총리를 역임하며 대한민국 정치사에 중요한 이름을 남겼다.”

보도자료에 따르면 김장호 구미시장은 “구미가 배출한 역사적 인물로서 구미시민의 자긍심을 높이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는 말로 이번 전시의 의의를 평가했다. 장택상의 삶과 정신을 알리는 게 이번 전시의 취지임을 알려주는 언급이다.

장택상이 예술품을 많이 수집해 문화 발전에 기여한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한 일이다. 동시에, 그런 수집의 밑바탕인 장씨 가문의 재산에 대해 성찰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래야 장택상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해가 가능해진다.

장씨 가문의 ‘친일 재산’

장택상의 아버지 장승원(1853~1917)은 임오군란 3년 뒤인 1885년 문과에 급제했다. 젊은 엘리트 선비들이 주로 임용되는 사간원 헌납과 홍문관 수찬 같은 이른바 청요직(淸要職)을 지낸 그는 1897년 이후의 대한제국 체제하에서 황제비서실 차장인 비서원승이 되고 뒤이어 청송군수 등을 역임했다.

그런데 그는 청요직 출신보다는 대부호로 훨씬 많이 알려졌다. 그의 사후에 보도된 1921년 6월 11일 자 <동아일보> 3면 우상단에는 “경상도 부호 장승원”으로 소개돼 있고, 1927년 1월 3일 자 <조선일보> 2면 좌중단에는 “경상북도 칠곡 부호 장승원”으로 적혀 있다.

경상도 부호나 칠곡 부호 같은 표현은 이 지역 내에서 최고 부자였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지역 출신의 대부호였다는 의미다. 오늘날의 인터넷 백과사전에서는 “한강 이남의 제일가는 부호”로도 소개된다.

그런데 아들 장택상의 인생에 영향을 주게 될 장승원의 재산은 한국 독립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이 재산은 국가보훈처가 1990년에 발간한 <독립유공자공훈록> 제7권에도 언급돼 있다. 공훈록은 의병장 허위의 제자이자 1910년대의 저명한 독립운동가인 박상진의 생애를 기술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는 대한광복회 명의로 포고문을 작성하는 한편 친일부호 처단의 명령을 내려 채기중·유창순·강순필·임봉주 등으로 하여금 1917년 11월 경북 칠곡군의 부호 장승원을 처단케 했으며”

장승원은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에 의해 친일부호로 규정돼 독립운동가들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그런 그의 재산을 기반으로 장택상의 삶이 펼쳐졌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재산과 관련된 장택상의 활동에 대해서는 신중한 평가가 당연히 필요하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15권 장직상(장승원 아들) 편에 따르면, 조선총독부에 도로부지를 두 번이나 기부한 이 집안은 장승원 피살 2년 뒤이자 3·1운동 시기인 1919년에 독립운동가 김좌진과 상하이 임시정부에 기부금을 보냈다.

이처럼 독립운동에도 기부금을 낸 일이 있지만, 이는 장직상의 친일행위로 인해 별 의미가 없게 됐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장직상 편은 장승원을 뒤이어 대부호의 길을 걸은 그가 전투기인 ‘애국기 경북호’의 헌납을 위해 거액을 일제에 희사한 일을 기술한다. 이외에도 그는 국민총력조선연맹 같은 친일 관변단체에 참여해 일제의 침략 전쟁을 지원하는 활동을 벌였다.

장승원 가문은 경북 대부호 가문으로만 알려진 게 아니라, 독립운동가들과의 충돌이나 친일행위로도 널리 알려졌다. 이런 가문의 재산을 기반으로 하는 예술품 수집과 관련해서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하지만 구미시의 보도자료에서는 장택상의 항일독립운동만이 강조돼 있다.

▲ 장택상 ⓒ 위키미디어공용

더불어 장택상의 독립운동 경력을 퇴색시키는 일들이 다른 사람도 아닌 그 자신에 의해 해방 이후에 벌어졌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장택상은 미군정하의 수도경찰청장이었다. 친일파들이 주축인 미군정 경찰이 중점적으로 벌인 것은 독립운동가들과 친일청산세력을 좌파 빨갱이로 몰아 진압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상식이 있는 독립운동가라면 그런 직책을 맡을 리 없었다. 해방 직후에 친일파들이 가장 막강하게 포진한 곳이 다름 아닌 미군정 경찰이다. 이런 데서 그런 사람들과 함께했다는 것은 장택상이 독립운동의 가치를 어떻게 여겼는지를 보여준다.

이승만의 장기집권 도운 장택상

구미시 보도자료는 그가 총리를 역임한 사실도 거론한다. 그가 총리를 지낸 기간은 한국전쟁 중인 1952년 5월 6일부터 10월 5일까지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장택상의 유일한 상관인 대통령 이승만이 이 시기에 가장 크게 심혈을 기울인 것은 전쟁 수행이 아니었다.

임기 4년 마감이 임박한 이 시기 이승만의 최대 관심사는 재선 성공이었다. 국회에서 대통령을 뽑던 시절이었으므로 재선에 성공하려면 유권자인 국회의원들의 마음을 얻어야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런 데는 무관심했다. 전쟁통에 직선제 개헌을 관철시켜 자신에게 배타적인 국회의원들의 투표를 무산시키는 것이 그의 관심사였다. 그래서 일어난 일이 그해 5월 25일의 부산정치파동이다.

그는 임시수도 부산에서 계엄령을 선포한 뒤 공포 분위기 속에서 그해 7월 4일 이른바 발췌개헌으로 불리는 불법개헌을 강행했다. 이 상태에서 8월 5일 대선을 치렀다. 그러고 나서 정확히 2개월 뒤에 장택상이 임무를 마치고 총리직을 떠났다. 이런 흐름은 그해 5월에 이승만이 장택상을 등판시킨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고도 남는다.

발췌개헌은 이승만이 헌법을 무시하고 장기집권으로 내딛는 출발점이 됐다. 이때 이승만을 대신해 정부를 지휘한 ‘만인지상’이 장택상이다. 1960년 4·19혁명의 한 가지 원인인 이승만의 불법 장기집권을 도운 장본인 중 하나가 장택상이었던 것이다. 장택상이 한국 현대사에 끼친 이 같은 악영향을 감안하지 않고 예술작품을 놓고 그의 생애를 조명하는 행사는 역사를 정확히 전달하는 데 한계가 있다.

광복회 지도자 박상진과 충돌한 장승원의 재산이 장택상의 예술품 수집에 기반이 됐고, 해방 직후의 독립운동진영 탄압과 한국전쟁 중의 발췌개헌 등으로 인해 그의 독립운동 경력은 사실상 무의미해졌다. 그에 더해 그는 이승만의 헌법 파괴를 도운 핵심 조력자였다. 이런 것들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없는 장택상 컬렉션 전시회는 세상에 선한 기여를 남기는 행사가 되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김종성 기자

<2024-09-21>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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