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외전] 아들의 억울한 죽음으로 고통받은 항일투사 채충식
‘대구 10월 폭동’으로 많이 불렸던 사건이 지금 대구광역시에서는 ’10월 항쟁’으로 불린다. 2022년 10월 11일 개정된 ‘대구광역시 10월 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사업 지원 등에 관한 조례’는 입법 목적을 설명하는 제1조에서 “10월 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시기 무고한 민간인 희생자를 추모함으로써 지역에서 발생하였던 민족의 아픔을 치유하고 인권증진 및 평화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규정한다.
그 사건이 폭동이 아니었다는 점은 대구시는 물론이고 중앙정부 차원에서도 인정된다. 이명박 정부 때 발행된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제4권은 이렇게 말한다.
“대구10월사건은 해방 직후 미군정이 친일 관리를 고용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하며 식량공출을 강압적으로 시행하는 것 등에 불만을 가진 민간인들과 일부 좌익세력이 경찰과 행정당국에 맞서 발생한 사건이다.”
미군정이 친일청산을 방해하고 토지개혁을 지연시키며 식량 사정을 악화시키는 것에 맞서 대구 지역민들이 미군정 경찰과 행정당국을 상대로 일으킨 것이 10월 항쟁이다. 항쟁으로 부를 만한 이유가 충분한 사건이었다.
이것이 대구항쟁으로 불리는 것은 대구에서만 벌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대구에서 시작했다는 의미다. 또 10월 항쟁으로 불리는 것은 10월 한 달간 벌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10월에 시작했다는 의미다. “10월 6일까지 경북 지역으로 번졌고 12월 중순까지 남한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고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는 말한다.
대구에서부터, 10월부터 시작된 이 항쟁은 해방 이후에 폭발한 최초의 전국적 의거다. 이것은 한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한국인들의 선언이었다. 친일을 청산하고 경제체제를 개혁하는 쪽으로 한국이 전진해야 한다는 당시 국민들의 의지가 반영된 사건이었다.
제주4·3-여순항쟁-4·19혁명-부마항쟁-5·18민주화운동-6월항쟁-촛불시위로 이어질 해방 이후 첫 항쟁이 무자비하게 진압된 것이 현대사 비극의 출발점이다. 박정희의 형인 독립운동가 박상희 등이 참여한 이 의거가 빨갱이 폭동으로 매도된 것은 이승만과 친일파들이 득세하는 토대가 됐다.
23번이나 검거된 채충식
대구항쟁이 대구폭동으로 불리며 진실이 왜곡되는 현실을 슬프고 착잡한 마음으로 지켜본 독립운동가 중의 한 분이 채충식이다. 칠곡과 대구 지역의 저명한 활동가였던 그의 이름을 일제강점기 유력 일간지에서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가 34세 때 발행된 1927년 11월 19일 자 <조선일보> 5면 중간에 이런 기사가 있다.
“경북 칠곡군 신간회 총무간사 채충식 씨는 모사건 피의로 왜관경찰서에 검거되엇든바 지난 십오일에 경북경찰부로 호송하얏다가 그 이튿날인 십륙일 대구에서 방면되엇다고.”
일제강점기 신문보도에서는 독립운동 사건이 명시적으로 표기되기 힘들었다. ‘모(某)사건’이란 표현은 그런 분위기의 산물이다. 그가 ‘모사건’으로 끌려간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경북사학회가 발행하는 <복현사림> 제32집(2014년)에 실린 역사학자 김순규의 기고문 ‘좌파민족주의 독립운동가 채충식’은 “독립운동을 하면서 23차례의 검거와 투옥을” 당했다고 소개한다.
민족주의운동을 하던 작곡가 홍난파는 1937년 6월 구속돼 고문을 받고 두 달 뒤 석방된 다음에 11월에 가서 전향서 성격의 반성문을 썼다. 그런 뒤 다시는 이쪽에 발을 담그지 않고 친일파의 길을 걸어 나갔다. 23차례나 검거된 채충식은 8·15 해방도 감옥에서 맞이했다. 끈질기고 굽힘 없는 ‘모사건 전문가’였던 것이다.
그의 일생을 백과사전식으로 정리한 <디지털달성문화대전> 채충식 편은 출생 연도를 1892년으로 표기하면서 생일이 음력 11월 15일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임진년인 그해의 음력 11월 15일은 양력 1893년 1월 2일이었다. 음력 11월 15일에 출생한 게 맞다면, 위 사이트나 논문 등에 적힌 1892년은 1893년으로 정정돼야 한다. 위의 “34세”라는 표현도 1893년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지금의 대구시 동구 미대동인 달성군 공산면 미대동의 인천 채씨 집성촌에서 출생하고 대구농림학교를 졸업한 채충식은 일찍부터 민족주의운동에 뛰어들었다. 왜관청년회 산하의 여자야학부 및 동창학원에서 교사로 활동하고 칠곡기근구제회 창립을 주도했다. 또 칠곡·선산·상주 3개 지역 언론인 단체인 삼군기우단(三郡記友團) 결성에 참여하고, 여운형 등의 참여하에 농민생활 향상을 지향한 조선농인사(朝鮮農人社) 이사로 활동했다.
그에 더해, 국내 최대의 좌우합작 민족주의단체인 신간회의 칠곡지회 의장으로도 일하고 신간회 본부의 중앙집행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해방 1년 전인 1944년에는 여운형이 이끄는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의 경북지부에서 활동했다.
조선건국동맹을 제외한 나머지 활동들은 대체로 ‘합법공간’에서 벌어졌다. 일제가 웬만하면 금지하지 않는 범주에서 이뤄졌다. 그런데도 23차례나 검거됐다는 것은 일제가 볼 때 그가 상당히 골치 아픈 존재였음을 의미한다.
장기간 투옥된 독립운동가들의 기여도도 높지만, 일제 경찰의 의심을 사면서도 결정적 빌미를 제공하지 않아 검거와 석방을 되풀이한 독립운동가들의 기여도 역시 높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로 일제의 탄압이 더욱 가중되는 속에서도 국내 항일조직이 붕괴하지 않은 것은 채충식 같은 활동가들이 끝끝내 버텨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회와 민족에 헌신하며 일제강점기를 보낸 그에게 답례가 되어 돌아온 것은 10월 항쟁을 계기로 아들을 잃은 일이었다. 위의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는 국가보훈부가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는 채충식을 독립운동가로 지칭하면서 “항일운동가 채충식의 아들인 채병기(1925, 달성군)는 대구10월사건에 참가한 뒤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피해 다니다가 1950년 6·25 직후에 대구경찰서 경찰에게 강제연행된 뒤 불상지에서 살해되었다”고 기술한다.
아들의 죽음… 후손들까지 피해 볼까 봐 노심초사
채충식 검거 및 석방을 보도한 위 <조선일보> 기사가 나왔을 당시에 아들 채병기는 두 살이었다. 그런 아기를 두고 감옥을 들락거렸으니 아들 채병기를 대하는 채충식의 심경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아들이 자신과 비슷한 일을 하다가 고초를 겪었다. 그의 아들도 친일청산을 방해하고 경제개혁을 지연시키는 미군정에 맞서 10월 항쟁에 참여했다. 이 때문에 아들은 경찰의 감시를 받고 전향자 단체인 국민보도연맹에 편입된 뒤 한국전쟁 때 어딘지 알 수 없는 장소에서 살해를 당했다. 아들에 대한 채충식의 마음은 이 때문에 한층 더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은 채충식이 손녀와 손자의 안위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원인이 됐다.
위 김순규 기고문은 “이후로 채충식은 자신으로 인하여 후손들이 피해를 볼까 노심초사해야 했다”며 유족의 증언을 근거로 “언제나 입단속을 하는 것이 그의 주된 일과였다”고 설명한다. 감옥을 들락거린 자신의 삶이 자손들에게 이어지지 않을까 불안했던 것이다.
그러나 독립운동가다웠다. 무조건 ‘쥐 죽은 듯 살아라’고 당부하지 않았다. 위 기고문에 따르면 그가 한국전쟁 때 집필한 <잡록>이라는 가훈에는 ‘대다수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참다운 민주주의 세상이 올 것이다’, ‘노동을 신성하게 여기고 노동하는 사람을 우대하라’는 등등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이는 그가 어떤 목적으로 항일운동을 했는지를 시사한다. 단순히 이민족의 지배가 싫어서 그랬던 게 아니라 노동자·농민을 위한 세상을 만들고자 그렇게 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제국주의와 친일세력 밑에서는 서민대중의 세상이 실현될 수 없기에 독립운동에 나섰던 것이다.
대구 10월 항쟁으로 인해 채충식은 눈물을 흘렸다. 그런 눈물을 가슴에 품고 1980년까지 생을 이어 나갔다. 반공 정권들은 그 눈물을 폭도 가족의 눈물, 빨갱이 가족의 눈물로 매도했지만, 그것은 진정한 해방과 좋은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항일투사의 눈물이었다.
국가보훈부는 그 눈물을 독립유공자의 눈물로 인정하지 않지만, 채충식이 아들 채병기의 비극을 보면서 흘린 눈물은 아버지의 눈물이자 독립운동가의 눈물이었다. 대구시 조례의 표현에 따르면, 그의 아픔은 “민족의 아픔”이었다.
김종성 기자
<2024-09-28>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아들 잃은 독립운동가… 후손에게 남긴 놀라운 ‘가훈’
※관련기사
☞오마이뉴스: 김종성의 히, 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