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노보효, 일본 첫 민간 강제동원 박물관
“일제강점기에 조선인 노동자들의 묘비도 없이 조릿대 밑에 묻혔다는 곳은 어디인가요?”
지난 28일 일본 홋카이도 호로카나이초 슈마리나이에 있는 ‘일제강점기 조선인 노동자 추도묘’를 찾은 이들 사이에서 질문이 나왔다. 이날 안내를 맡은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은 “무덤 뒤편으로 조릿대들이 흔히 보이죠? 이 인근이 전부 당시 강제동원됐던 조선인과 일본인 하층 노동자들이 숨졌을 때, 무덤도 없이 묻혔던 매장지로 추정됩니다”라고 설명했다.
이곳에는 ‘우류댐 공사, 신메이선 철도 공사 희생자들이 매장된 땅’이라는 안내판과 함께 덩그런 무덤 하나가 서 있다. 앞에는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기억하기 위해 만들어진 민간단체 ‘평화 디딤돌’이 이런 비명을 새겨놨다. “아시아 태평양 전쟁 중 홋카이도 슈마리나이(우류)댐과 신메이선 철도 공사에는 수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동원되어 혹독한 강제노역으로 45명이 희생되었다. 가족들조차 생사 여부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 그 유해들은 이역 땅 조릿대 수풀 밑에 묻혀서 잊혀져갔다.”
일제강점기 참혹한 조선인 강제노동의 현장이던 슈마리나이에 이날만큼은 모처럼 박수 소리와 웃음이 퍼졌다. 이날 홋카이도 우류군 호로카나이에 일제강점기 슈마리나이에 일본 정부가 전쟁을 치르기 위해 강제동원했다가 희생된 이들을 기리기 위한 ‘사사노보효 강제노동박물관’이 개관했다. 두 줄로 마주 본 어른들이 양팔을 들어 올려 ‘손 터널’을 만들자, 일제강점기 강제노동 희생자들의 유골함을 든 학생들이 그 사이를 지나 박물관에 유골을 안치했다. 사물놀이패가 흥겨운 음악을 연주하고, 박물관 앞 행사장을 가득 채운 150여명의 한·일 시민들이 함께 기뻐했다. 일본에는 2차 대전 당시 강제노동 끝에 이름도 없이 숨진 원혼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이 세운 위령비가 전국 곳곳에 있지만, 시민들의 자발적 힘으로 세운 민간 박물관 자체가 드문데다 ‘강제노동’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도쿄에서 비행기로 1시간30분, 다시 삿포로 신치토세공항에서 차로 3시간 넘게 달려 도착한 슈마리나이는 홋카이도 북부 원시림이 있는 곳이다. 한때 동양 최대였고, 지금도 일본 최대인 인공호수 슈마리나이호와 우쓰나이호를 중심으로 자연공원이 위치하고 있다. 동시에 이곳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동원 노동자들이 비참한 삶을 살다 무덤조차 없이 인근 조릿대 밭에 버려진 죽음의 한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1935년 일본은 슈마리나이와 40㎞쯤 떨어진 나요로를 잇는 철도 부설 공사를 시작했다. 당시 이곳에는 ‘다코베야’라고 불리던 일본 하류 계급 저임금 노동자들이 일했다. ‘다코베야’ 또는 ‘다코’는 노동자를 사실상 감금한 상태에서 노동을 강요하는 형태로 홋카이도에서 많이 횡행해 악명이 높았다. 그런데, 일본은 중일전쟁 발발 한 해 뒤인 1938년부터 전시 체제에서 필요했던 전력 공급을 위해 이곳에 당시 동양 최대 규모의 수력발전 댐을 세우기로 하면서, 일본인 다코베야 노동자뿐 아니라 조선인들을 강제동원했다.
45.5m 높이의 댐으로 우류천을 막아 5만㎾ 출력 전기를 만드는 대형 공사 대부분이 노동자의 인력에 기대는 방식이었다. 게다가 슈마리나이는 일본 전역에서 역대 최저인 영하 41.5℃를 기록할 만큼 손꼽히는 강추위와 폭설로 유명한 곳이다. 태평양 전쟁으로 총동원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국책사업인 공사는 혹독한 겨울이 찾아왔다고 쉬어가지 않았다. 식민지에서 끌려온 노동자들이 얼마나 고통받으며 작업을 했을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전시실에 기록된 자료를 보면, 당시 댐 공사에 끌려왔던 한 조선인은 이렇게 증언했다. “도망치다 잡히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본보기로 구타를 당했어. 정신을 잃을 정도로 때리고, 정신을 잃으면 물을 뿌려 깨워 또 때렸어. 이런 걸 몇번이나 되풀이해서 죽어 버린 경우도 있었어. 다치거나 병에 걸린 사람 함바(숙소)에 남기지 않고 삼태기에 메고 작업장으로 끌고 가 앉혀놓고 짚을 꼬아 삼태기를 고치는 일 등을 시켰어.”
가혹한 노동이 끝난 뒤에는 ‘다코베야’라고 불리던 감옥형 숙소에 갇혀야 했다. 강제동원 노동자들은 문어(다코)잡이에 사용하는 항아리처럼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오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한다는 ‘다코베야’에서 비참한 삶을 살았다. 댐 공사 도중 추락사한 이들은 그 위로 콘크리트 더미가 덮어지면서 사라져갔다. 또 추위와 강제노동에 시달리다 죽음에 이른 이들은 공사장 인근에 펼쳐진 조릿대 숲속에 집단 매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조선인 강제노동 희생자 40여명 정도가 확인됐지만, 당시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동자가 3천여명에 이르는 점을 고려하면 훨씬 많은 희생자가 있었을 것이란 짐작이 가능하다.
만리길 타국에서 가혹한 노동 끝에 목숨을 잃고, 이름도 없이 버려진 이들의 영혼을 위로한 것은 1934년 이 지역에 세워진 절 고켄사(광현사) 였다. 1976년 가을, 슈마리나이 호수를 찾았던 도노히라 요시히코 스님(현 강제연행 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 포럼 공동대표)은 우연히 마을의 한 할머니로부터 “고켄사에 죽은 이들의 원혼을 위로하는 위패가 무슨 사연으로 저리 잔뜩 있는지 모르겠다”는 얘기를 듣는다. 상주 스님이 없고, 곧 허물어질 위기였던 고켄사에는 댐 건설 당시 강제노동으로 희생당한 일본인 다코베야 노동자와 조선인 노동자의 위패와 유골이 수십년간 기막힌 사연을 묻은 채 안치돼 있었다.
도노히라 스님은 그해 ‘소라치(홋카이도 북서부 내륙 지역의 지명) 민중강좌’를 만들어 일제강점기 희생된 조선인 노동자 유골을 발굴하고, 유족들을 찾는 작업을 시작했다. 곧 사라질 위기였던 고켄사도 인수했다. 여기에 뜻있는 한·일 시민들이 합류해 ‘강제노동 희생자 유골발굴 한일 대학생 공동 워크숍’(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으로 명칭 변경)이 발족했다. 이후 매화장 인허가 자료와 고켄사에 남아 있는 위패 등을 조사해 1930~40년대 노동자 200여명(일본인 포함)이 댐과 철도 공사장 주변 조릿대 숲속에 집단으로 매장됐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댐 밑으로 추락해 주검 수습이 어려울 때는 공사 과정에 콘크리트로 덮는 등 신원조차 확인이 어려운 경우가 많고, 특히 조선인 강제노동자들은 창씨개명을 했던 터라 국적조차 확인이 어려운 사례가 많았다.
이 절은 1995년 전시 강제동원 노동자 역사를 기억하는 ‘사사노보효(조릿대의 묘표) 전시관’으로 이름을 바꿨다. 슈마리나이 인근에 집단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강제동원 노동자들이 묘표도 없이 땅에 묻혔을 때, 무성한 조릿대만이 그들의 죽음을 기억했다는 뜻으로 전시관 이름을 지었다. 2015년에는 이 지역에서 발굴된 유골 가운데 조선인으로 확인된 4구의 유해를 포함해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노동 희생자 유해 115구를 한국에 돌려보내는 ‘70년 만의 귀향’도 진행했다.
그러나 2020년 말 이 지역에 악명 높은 눈보라가 몰아쳤고,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의 지붕이 무너졌다. 이후 두 나라 뜻있는 시민들과 단체들이 성금 6억5천만원을 모았고, 이날 박물관이 새로 개관했다. 야지마 쓰카사 사사노보효박물관 초대 관장은 한겨레에 “박물관이 일제강점기 고통받았던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를 기억·추모하는 현장으로 성장했으면 좋겠다”고 기대했다.
슈마리나이/글·사진 홍석재 특파원 forchis@hani.co.kr
<2024-10-02>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