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자료 톺아보기 62]
대표적인 관제 여성단체의 10년간 총후활동 기록
『대일본국방부인회기념사진첩』(1942)
이번 호에 소개하는 소장자료는 1942년 6월 대일본국방부인회총본부(大日本國防婦人會總本部)가 동회 결성 10주년을 기념해 간행한 『대일본국방부인회기념사진첩(大日本國防婦人會記念寫眞帖)』이다. 이 사진첩은 총 142쪽이며, 앞부분에 국방부인회를 지원하는 일본 황족, 육해군 장성, 국방부인회 임원 사진을 게재하고 본문에서 일본 도쿄사단관구(東京師團管區)부터 조선, 대만, 만주, 중국 관내 등 일본이 점령한 지역에 설치된 지방본부들의 총후활동 사진을 각 지방본부마다 한두 페이지씩 실었다. 맨 뒤에 대일본국방부인회 회세표(會勢表) 즉, 75개의 국방부인회 지방본부와 900만에 달하는 회원 수의 통계표를 첨부하여 1942년 2월 당시 국방부인회의 위세를 과시하고 있다(참고로 조선 지역본부 수는 6개, 회원 수는 약 204,000명).
조선지역 국방부인회의 총후활동 사진은 10페이지에 걸쳐 실려 있으며 조선군 제19사단이 관할한 나남사단관구(함북·함남)와 제20사단이 관할한 경성사단관구(경성·대구·광주·평양)의 지방본부 임원 사진과 주요 총후활동을 소개한다. 평양지방본부의 사례를 살펴보면 평양지방본부장 등 임원 사진을 싣고, 평양제조소분회의 탄환 도장(塗裝) 작업, 순천분회의 헌납 면화의 제1회 풀베기작업, 은율분회의 폐품회수, 평양지부의 모포 헌납(1938.8), 순안분회의 순안신사 조영공사, 성천분회의 헌납 목화 파종(1941.5.4), 평양지방본부대회 기념촬영 등 다양한 총후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대일본국방부인회는 1932년 10월 24일, 일본 군부의 총력전 체제 및 국방국가 체제 구축에 전면적으로 협력하는 취지로 설립된 일본 최초의 군국주의적 여성단체이다. 전신은 오사카 국방부인회였다. 이 단체는 군사 원호 사업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일본 부덕(婦德)의 고취’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대중여성의 정신교화에 진력하였으며, 군부를 배경으로 가정주부와 노동여성을 주된 구성원으로 삼았다.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총후 지원 강화 활동, 소비 절약 및 폐품 회수 운동, 담요 헌납 운동 등을 출정 군인 환송 및 영접 사업과 함께 정력적으로 전개하였다. 총력전체제가 본격화하는 1940년 12월에 이르러서는 일본과 식민지 전체의 국방부인회 회원 수가 900만여 명에 달했다.
1934년경 경남 진영 지역에서 진영국방부인회의 활동이 보이듯이 일부 지역에서 국방부인회가 조직되었는데 조선에서의 국방부인회 결성이 본격화한 것은 중일전쟁 이후이다.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1937년 5월 개성, 동년 7월 군산, 9월 이천과 수원, 11월 경성과 부산, 12월 거창 등에서 국방부인회가 잇따라 결성되었다. 1937년 11월 중순까지 국방부인회 회원수 추계를 보면 총 8만여 명이고 그중 조선인은 12,403명이었다. 경기도 여주지부와 개풍지부는 특히 조선인의 회원 가입이 엄청났는데 각각 1,240명(일본인 90명)과 300여 명(일본인 60명)이었다고 한다(『조선일보』 1937.12.6.2면).
한편 총력전체제가 가속화하던 1942년 2월, 일제는 기존의 여성 관변단체를 통폐합하는 조치를 취해 국방부인회와 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 내무성 계열, 1901년 창설), 대일본연합부인회(大日本連合婦人會, 문부성 계열, 1931년 창립)를 대일본부인회(大日本婦人會)로 통합하였으며, 조선에서도 대일본부인회 조선본부가 만들어지고 기존의 국방부인회 지역본부가 대일본부인회 지부로 개편되었다. 이후 대일본부인회는 고도 국방국가체제에 발맞추어 일반여성의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를 강화하고 침략전쟁을 지원하는 총후활동에 진력하였다.
• 박광종 특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