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건국절’ 주장은 ‘반한 마름 종족주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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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건국절’ 주장은
‘반한 마름 종족주의’이다

윤경로 식민지역사박물관 관장(전 한성대 총장)

올해 광복절 행사는 두 쪽이 났다. 초유의 사태이다. 자격 미달자를 독립기념관장에 임명한 것이 발단이었다. 결국 이 사단으로 그간 수면 아래 있던 ‘건국절 논쟁’을 다시 소환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정치·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건국절’ 논쟁으로 시끄럽다.

그동안 잠복해 있던 ‘건국절’ 주장이 윤석열 정부 들어서 다시 머리를 치켜든 것은 왜일까? ‘건국절 논쟁’의 핵심 요지는 대한민국의 ‘건국일’을 1948년 8월 15일로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후술하듯 헌법 정신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옳지도 않다. 이러한 사실을 ‘뉴라이트’ 쪽도 익히 알면서 왜 이토록 집요하게 1948년 8월 15일을 굳이 ‘건국절’로 주장하려는 것일까.

먼저 이러한 주장을 하는 뉴라이트에 대해 알아보자. 뉴라이트(New Right)의 뜻은 신보수우파로 2000년대 초반 등장했다. 1990년대 접어들며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권이 붕괴하면서 국내에서 사회주의적 이념에 경도되었던 일군의 지식인들 사이에 사상적, 이념적 전환이 일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 인물과 기관이 서울대 경제학과 안병직 교수와 그의 제자들로 결성된 낙성대경제연구소로 바로 뉴라이트의 진원지이었다.

여기에 마침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110층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빌딩과 워싱턴의 국방부 건물에서 알카에다 자살 테러가 발생했다. 9.11 테러사건이 터지자, 당시 미국 부시 정권 때 이른바 신보수주의, 힘이 바로 정의라고 주창하는 네오콘의 강경한 외교 노선이 전면에 나섰다. 이때부터 북한과 이란 등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였다.

이즈음부터 국내 뉴라이트 측은 ‘식민지근대화론’ 및 강제동원피해자와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성 부정을 공개적으로 주창했고 이들의 주장을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 정치적 이슈로 확장시키면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안병직 교수의 직계 제자 이영훈이 이승만학당을 운영하면서 본격적으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대한민국의 ‘국부(國父)’로 삼고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의 ‘건국일’로 정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이들은 민족 분단 이후 남한 정국을 휩쓸었던 반공주의를 ‘올드라이트’(Old Right)라고 하며 이를 대치할 새로운 이념인 ‘뉴라이트’ 곧 정치적 ‘신자유민주’와 경제적 ‘신자유주의 경제론’을 내세웠다.

이러한 뉴라이트의 주장을 담은 책이 2019년 『반일종족주의』로국내와일본에서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일제강점기 쌀 ‘수탈’은 ‘수출’(김낙년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이며 조선인의 강제동원은 ‘신화’(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에 불과하다고 했다. 심지어 이 책의 대표 저자인 이영훈은 도입부에서 “한국의 거짓말 문화는 국제적으로 널리 잘 알려진 사실”이라는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동시에 한국 역사학계의 주장을 ‘감정적 민족주의’라고 매도하면 서 정제되지 않은 통계지표와 허접한 수치 등을 근거로 “일본이 조선을 근대화시켰다”는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했다.

이영훈의 주장은 소설가 조정래의 『아리랑』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한다. ‘뉴라이트’ 측 기관지인 『시대정신』 2007년 여름호에 만경평야가 일본인에게 수탈당한 것으로 묘사한 『아리랑』 내용이 허구라고 했다. 얼핏 보면 이러한 비판이 그럴듯해 보이나 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님이 곧 밝혀졌다. 서울대 경제학과 동기인 충남대 경제학과 허수열 교수가 그 사실을 명증하게 밝혔기 때문이다.

이 분야의 최고 전문가인 허교수는 일찍이 국가기록원이 소장하고 있는 <일제하 수리조합·토지 개량사업>에 관한 실증적 자료 분석을 통해 “만경강 북쪽 옥구·익산·군산지역은 1909년에 이미 빈틈없이 수리조합이 있었음”을 명증하게 밝혔다. 더 나아가 만경강 남쪽 동진강 호남평야도 일제의 강점기 이전부터 이미 수리조합이 수립되어 운영되었음도 실증적으로 밝혀냈다. 이로써 만경평야 일대에서 일제에 의한 토지조사사업 이후 벽골제에 바닷물 유입을 막 는 방조제 등을 설치하면서 벼농사가 가능했다는 이영훈의 주장이 거짓임이 확실하게 입증되었던 것이다(허수열, 『일제초기조선의농업』, 2011).

뉴라이트 측이 주장하는 식민지근대화론은 서구 열강의 식민지 쟁탈 시대에 등장했던 ‘식민지 시혜론’과 무관하지 않다. 15세기 서구의 대항해시대 이후 기독교 전파 등을 명분으로 동양사회를 야만적 사회라 규정하고 기독교사회로 개종시켜야 한다는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침략 논리와 맥을 같이한다. 즉 서구제국주의의 식민지배 과정에서 발생한 침략, 수탈, 차별, 제노사이드 등은 서구적 근대화(westernize)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뉴라이트의 식민지 근대화론은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identity)을 포기한 망국적 주장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민족과 국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본주의라는 이들의 주장도 큰 문제다. 즉 일제강점기 한국경제가 발전할 수 있었던 주요 요인이 자본주의 도입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논리와 주장대로라면 독립운동을 추동한 독립운동단체와 독립운동가들은 한국 내 자본주의의 성장을 방해한 세력이 되고 만다. 한국 뉴라이트 대부인 안병직 교수가 “독립운동가 김구(金九)가 무엇을 했는가, 한국 역사 발전과 근대화에 무엇을 기여했는가, 학교를 세웠나, 공장을 세웠나, 철도를 놓았나”라고 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일제강점기 조선인 기업은 존재하지 않았고 따 라서 식민지 자본주의 주체는 일본 정부, 곧 조선총독부와 일본 기업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의 당시 한국경제를 식민지근대화 논리대로의 수치·통계만으로 재단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본질과 특징을 호도한 것이다. 무엇보다 식민 지배와 민족 차별이라는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실의 본질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즉 일제의 경제 수탈은 일제의 필요에 따라 일본 자본이 개발을 명분으로 한국경제와 사회를 수탈한 식민지 경제시스템이었을 뿐이다. 따라서 개발주체와 목적, 성과와 귀결, 한반도 경제와 산업 연관성 등을 고려하지 않은 ‘식민지 경제 성장론’에 불과하다.

이렇듯 뉴라이트 측은 정치(精緻)하지 않은 허접한 수치와 통계 등을 근거로 식민지 경제 성장론을 주장하고 있어 정확지도 않다. 일제강점기는 아직 국내총생산(GDP) 개념이나 측정 방법이 정립되기 이전이다. 따라서 당시의 경제성장 수치는 ‘추계’에 불과했다. 더구나 기준점이 되는 1910년대 전반기 통계는 통감부와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것으로 매우 부실한 통계였다. 예컨대 1910년 강제병합 이후 경제가 눈에 띄게 성장한 것처럼 보이나 1939년 본격적인 전시체제에 돌입하면서 절대치가 크게 감소했다. 따라서 이러한 부실한 통계자료만으로 일제강점기 경제총량이 증가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당시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보도에서 조선총독부가 쓰는 재정이 조선인들에게 돌아가지 않는다고 하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쌀 소비상황을 보면 일본인의 1인당 연평균 쌀 소비량(1.1석)이 안정적이었지만, 같은 시기 조선인의 소비량은 1911~1934년 사이 52%나 격감(0.79석→0.38석)했다. 한 사례로 1930년대 농촌 현실을 담은 채만식의 소설은 당시 조선인 농민 대부분이 소작농이었고, 고율 소작료와 특히 고리 부채 등에 매우 시달렸음을 보여준다. 경제총량이 늘었다면 그만큼 조선인 생활수준이 나아져야 할 것이 아닌가.

이렇듯 뉴라이트의 식민지근대화론은 ‘조선 경제’와 ‘조선인 경제’는 엄연히 달랐다는 사실도 구분하지 못했다. 1945년 해방 직후 일제의 식민지하에 있던 조선이 당시 식민지국가들 가운데 최빈국(最貧國)이었다는 사실도 하나의 반증이라 할 것이다. 일제에 의해 한국이 근대화되었다는 주장 또한 사실이 아니다. 근대사회의 개념과 전제로 흔히 ①자본주의 도입 ②주권 국가 ③개인의 자유 등을 꼽는다. 세 가지 중 일제하의 식민지 조선에서 가능한 것이 하나라도 있었는가. 일제강점기 자본주의는 국가의 주권을 상실한 상황에서는 식민지 자본주의였을 뿐이다. 또한 민족차별이 제도화된 식민지하에서 개인의 자유는 설 자리조차 없었다. 동화정책(同化政策)을 실시했다고 하지만 조선인에게 의무교육도 참정권도 주어지지 않았다. 보통학교, 소학교, 고등보통학교 교육이 차별화되었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가 부정당한 것은 물론 조선말도 자유롭게 쓸 수 없었다. 조선인 기업 활동 또한 극히 제한적이었다. 심지어 친일파 조선인들까지도 일본인에게 쏠린 시장과 금융의 민족 차별적 환경에 불만이 가득했었다. 이러한 제약과 차별에 주목할 때 1945년 해방공간 식민지 조선에 남은 것은 중국 침략을 위해 부설했던 철도와 약간의 사업체뿐이다. 이렇듯 식민지근대화론은 역사적 사실이 아닐 뿐만 아니라 한국인으로서의 민족적 자존감을 포기한 자학적 역사인식이다.

뉴라이트를 언급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 일본으로부터 상당한 자금지원을 받았다는 점이다. 익히 아는바 뉴라이트 측 대부인 안병직 교수는 1980년대 중반 일본 도요타(豊田) 재단의 재정적 지원을 받고 〈한국의 경제발전에 대한 역사적 연구〉를 수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프로젝트를 수행한 후 본인이 앞서 주장해 왔던 ‘식민지 반봉건주의론’을 전면 수정했다. 더 나아가 한국 자본주의 발전의 기원을 일본의 ‘식민지 근대화정책’에서 찾았다. 어떠한 요인과 원인으로 이렇듯 학자가 평생을 생명과 같이 견지해 오던 자신의 학문적 이론과 논리를 저버리고 정반대 입장으로 급선회할 수 있을까. 무엇이 그를 이렇듯 회절시켰을까.

그의 제자 이영훈 또한 도요타 재단의 지원을 받아 <근대 조선의 수리조합 연구>를 수행하면서 그 이전까지 주장해 왔던 ‘좌파 이론’과 결별하였다. 마치 미국의 포드 재단이나 록펠러 재단이 서유럽과 제3세계에 연구기관을 설립하고 연구비를 지원했던 수법을 일본 또한 그대로 답습한 것이 아닐까. 본래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은 단 1원도 손해나는 곳에 투자하지 않는 법”이라는 원칙이 그대로 적용된 것은 아닐까. 이뿐만 아니다. 일본전쟁범죄자인 사사카와 료이치의 아들인 사사카와 요헤이가 주도한 사사카와 평화재단이 연세대학을 비롯한 한국의 유수 대학에 ‘아시아연구기금’ 명목으로 상당한 금액을 지원한 바 있다.

최근 국가안보실 제1차장 김태효가 작금 한일문제를 언급하면서 “중요한 것은 일본의 마음”이라 하여 파장을 일으켰다. 이러한 공개적 발언에서 그의 친일적 ‘속내’가 여실히 드러났다. 자신은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스스로 일본의 ‘밀정’이었음을 고백한 것이며, 그렇다면 그는 ‘마름형 친일파’에 해당한다 해도 지나친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 그가 일본 수상 나카소네 야스히로 상을 받기까지 했다니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끝으로 뉴라이트 측이 왜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 건국절로 그토록 집요하게 주장하는 이유에 대해 짚어보자.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일제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날을 ‘광복절’, 국경일로 기리며 기념하고 있다. 그런데 뉴라이트 측은 이러한 광복절과 달리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 곧 대한민국이 건국한 날로 정하고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국부(國父)로 삼자고 한다.

이러한 주장에는 상당히 음흉한 정치적 목적이 숨어 있다. 익히 아는 대로 우리는 1945년 해방되었으나 곧 북쪽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점령하였다. 이후 미군정은 남한에서 일제 치하에서 친일 부역했던 자들을 다시 요직에 앉히기 시작했다. 해방공간에 줄기차게 남북분단을 막기 위한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던 여운형이 혜화동에서(1947.7.19), 백범 김구가 안두희에게 암살(1949.6.26) 당하는 등 해방정국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렇듯 해방정국 이 매우 혼미한 가운데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까지 강제해산 당하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한 직후인 1948년 10월 제헌의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 1949년 1월부터 반민족행위자 박흥식, 김연수, 이광수, 최남선 등을 체포하였다. 그러나 곧 “반민특위 안에 공산당이 있다”는 허위 악선전이 퍼지는 가운데 악질적인 친일경찰 노덕술을 체포하자, 대통령 이승만은 “반민특위가 치안을 혼란시키고 위원들 가운데 남로당 프락치(간첩)가 있다”면서 반민특위 위원들을 구속하는 동시에 반민특위 자체를 강제 해산시켰다.

이로써 해방 이후 반드시 결행했어야 했던 반민족세력 청산은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혼미했던 해방 초기에 숨죽이고 있던 친일파 군상들이 3년간의 미군정 하에서 재등장, 정부 요직을 맡으면서 ‘역사 쿠테타’가 벌어진 것이다. 일제 치하에서 친일매국에 앞장섰던 자들이 이승만을 국부로 내세우며 자신들의 개인적 신분 세탁을 넘어 마치 대한민국을 새롭게 건국한 대한민국 건국공로자로 둔갑하려 한 것이다.

이렇듯 뉴라이트의 1948년 8월 15일 건국절 주장은 이렇듯 음흉한 정치적 목적 다시 말해 반역사적, 반민족적 친일 군상들을 대한민국 건국 공로자들로 역사화, 정당화하려는 요절복통할 억지 주장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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