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 글방 15]
일본제철 강제동원 소송과 인권의 발견
김진영 선임연구원
최근 윤석열 정부의 외교정책, 인사정책을 둘러싸고 ‘뉴라이트’ 논쟁이 한창이다. 이 논쟁은 결국 대통령의 역사관에 대한 질문으로 연결되고 있다. 돌이켜 보면 대통령은 집권 초기부터 ‘한일·한미일 공조’를 강조했다. 정부가 국가관계를 조정하면서 과거사를 지렛대로 사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상호주의 원칙에 따르는 외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일본 측에 일방적으로 모든 것을 내어주고 있다. 혹시 대통령에게 국가운영에 필요한 철학은 없고 그 빈자리에는 무지와 독선이 가득 들어찬 것은 아닐까? 정말 측근에 밀정이 있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2022년 7월, 정부는 강제동원소송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사자와 각계각층의 의견을 경청하겠다”고 하며 민관협의체를 구성했다. 2018년 대법원판결 후 일본정부가 반도체 소재 수출을 규제하고 레이다 갈등이 벌어지는 등 강제동원소송 문제는 당시 한일간의 대표적인 외교현안이었다. 하지만 민관협의체에서 정부는 일본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제하고 있었다. 한일 간의 과거사 문제에서 국가의 역할을 고민하는 공간은 처음부터 없었다.
결국 2023년 3월 정부는 느닷없이 승소한 원고들에게 제3자인 한국정부가 기금을 모아서 대신 배상금을 지급하는 방식의 ‘정부해법’을 발표했다. “소송에서 이겼으니 누구 돈이든 받으면 되는 것 아니냐”는 논리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정부가 마련한 ‘해법’은 피해자들과 시민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일본제철의 성립과 강제동원
1894년 한반도에서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다. 농민군의 기세에 몰린 조정은 청에 지원군을 요청했다. 청군 3,000명이 아산만으로 들어오자 일본도 7,000명의 군인을 파병했다. 외세가 들이닥치자 동학농민군은 조정과 전주화약을 맺고 해산했다. 청은 일본에게 철병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일본은 청의 제안을 거절하고 역으로 함께 조선을 관리하자고 했다. 이미 조선을 수중에 두고 있다고 생각한 청은 일본의 제안을 거절했다. 결국 한반도에서 청과 일본의 전쟁이 벌어졌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이다.
그런데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겼다는 것은 기억하지만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청일전쟁의 결과 청은 일본에 배상금 2억 량을 지불했다. 원래는 일본이 랴오둥반도(遼東半島), 타이완(臺灣), 펑후섬(澎湖島)을 빼앗았지만 열강의 개입으로 배상금만 받기로 했다. 청이 지불한 2억 량은 당시 일본의 4년치 국가예산이었다. 처음으로 외국과의 근대전에서 승리하고 큰 이득을 챙긴 일본은 배상금의 80%를 다시 군비를 확충하는데 지출했다. 나머지 20%는 관영 야하타제철소(八幡製鉄所)와 철도 등 기반시설을 건설하는 데 사용했다. 1906년에 야하타제철소는 일본 내 철강의 90%를 생산했다. 청일전쟁으로 받은 배상금으로 만든 야하타제철소가 일본의 중공업, 군수산업의 기초가 된 것이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의 호황기에 과잉투자 된 일본의 철강산업은 1920년대에 심각한 적자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은 1933년 4월 5일 ‘일본제철주식회사법’을 제정하여 관련 회사들을 통폐합하기로 결정하고 야하타제철소, 가마이시제철소(釜石製鉄所), 와니시제철소(輪西製鉄所), 조선의 겸이포제철소(兼二浦製鉄所), 규슈제강소(九州製鋼所), 후지제강소(富士製鋼所) 등 6개 사업소를 합병하여 일본제철을 설립했다. 이렇게 설립된 일본제철은 1934년 2월 1일부터 영업을 시작했다. 당시 일본 정부가 일본제철에 출자한 지분비율은 56.8%에 달했다. 초대 사장 겸 회장이었던 나카이 레이사쿠(中井励作)는 아래와 같이 말하며 제철업을 국가가 직접 관리하기로 했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일본의 현재 제철업이 구미 등 세계의 제철사업에 대항하여 경제적으로 경쟁을 계속해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인데, 민관이 대립하고 있는 제철업을 현 상태로 두면, 생산비를 절감하고, 안을 굳건히 하여 바깥으로 뻗어 나갈 수 없다
1943년 12월 태평양전쟁 중에 일제는 ‘군수회사법’을 만들어 주요 기업들을 직접 통제하기 시작했다. 일본제철 또한 군수회사로 지정되어 국가가 재료확보‧저장‧운반, 기술개량, 노무감독 등에 관해 직접 명령할 수 있게 되었다. 생산책임자와 생산담당자에게는 공적인 성격을 부여하고 모집‧징용으로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를 관리하도록 했다. 일제가 조선인들을 끌어다가 규슈지역에서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질 좋은 석탄을 캐내게 하고, 그 석탄으로 규슈 북부의 야하타제철소에서 철을 녹여 주변국가를 침략할 무기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유명하다. 이렇게 일제가 운영하는 일본제철의 사업장에 동원되어 노동을 강요당한 것으로 확인된 조선인이 8,500여 명이다.
1945년 8월 15일, 전쟁이 끝났다. 일본은 경제·산업을 복구하기 위해 기업들이 부담할 막대한 채무를 해결해야 했다. 이에 일본은 「회사경리응급조치법」(1946.8.15), 「기업재건정비법」(1946.10.19)을 제정·시행했다. 이 법에 따라 ‘특별경리주식회사’로 지정된 일본제철은 1950년 4월 1일에 회사를 쪼개면서 부채를 안은 부분은 파산시키고 나머지 자산은 야하타제철(八幡製鐵), 후지제철(富士製鐵), 일철기선(日鐵氣船), 하리마내화연와(播磨耐火煉瓦)에 분할 출자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회사의 불량채권이 소각되었고 새로운 회사는 정상기업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자산은 남기고 채무만 소각하는 ‘꿈 같은’ 방식이었다. 1970년 3월 31일, 일본제철을 분할하면서 설립한 야하타제철은 상호를 일본제철로 변경하고 같은 해 5월 29일에는 후지제철을 다시 합병했다.
소송의 발단과 인권의 확장
1974년 9월, 도쿄에 있던 게이오쇼보(慶応書房)라는 헌책방에서 기업의 서류철 175권을 가게 앞에 내어놓았다. 중국 철강회사인 한예핑공사(漢冶萍公司)의 경영관계자료(漢治萍公司, 裕繁公司, 石原産業 3사의 자료)였다. 당시 중국경제사를 연구하던 후루사와 고조(古沢紘造)가 이 자료를 우연히 발견하여 고마자와대학 도서관이 매입했다. 그런데 이 자료 안에 ‘일본제철 총무부 근로과’가 작성한 『조선인노동자관계(朝鮮人労務者関係)』라는 서류철이 들어있었다.서류철에는 일본제철에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의 미불임금 공탁에 대한 설명과 공탁내역, 곧 일본제철에 동원된 조선인의 미불금 내역과 본적지 기록이 남아있었다.
1991년 6월에 고마자와대학의 고쇼 다다시(古庄正)가 이 자료를 분석한 『연행조선인미불금 공탁보고서』를 발표했다. 같은해 11월에 고쇼 다다시는 공탁서에 기록되어 있는 희생자의 본적지로 공탁기록 사본과 함께 편지를 보냈다. 50여 년 동안 희생자를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을 생각하면 그 자료를 전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인으로서 책임감 때문이었다. 이후 고쇼 다다시는 당시 68세였던 재일조선인 송병욱(宋秉郁)과 함께 한국에 와서 유족들을 만났다. 송병욱은 16살에 가마이시제철소에 동원된 후 귀국하지 못한 재일조선인이었다. 가마이시제철소에 동원된 후 도망했던 송병욱은 자신과 함께 지냈던 많은 ‘조선인’들이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공탁서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송병욱은 사망자 진혼과 유족 위로를 위해 나머지 생을 살기로 결심했다.
1995년 7월 13일 일본시민들은 ‘일본제철전징용공재판지원회’(이후 ‘지원회’)를 결성했다. ‘지원회’의 회칙 중 2조는 다음과 같다.
제2조 목적
(1) 이 모임은, 일본제철 전 징용공・유족의 미불금 반환 재판을 지원하고 그 승리를 실현하기 위해 활동한다.
(2) 전 종군위안부, 전 군인・군속, 강제연행자 등 아시아 전쟁피해자의 전후보상을 요구하는 싸움에 연대하고 또 그 실현을 위해 활동한다.
소송 지원을 위해 ‘지원회’가 결성되었지만 일본의 전쟁책임을 묻는 싸움에 동참하기로 결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95년 9월 23일 사망자의 유족 11명이 일본제철과 일본정부를 상대로 도쿄지방법원에 소를 제기했다. ‘지원회’는 1995년 10월, 서쪽으로 히로시마(広島)-고쿠라(小倉)-야하타(八幡)-나가사키(長崎)로, 동쪽으로 가마이시(釜石)-모리오카(盛岡)-센다이(仙台)-다카사키(高崎)-가와사키(川崎)로 이동하며 일본의 전쟁책임과 일본제철 소송을 알리는 ‘총행동’을 진행했다.
1997년에는 ‘지원회’와 연락이 닿은 생존자 2명이 오사카 지방재판소에 새로운 소를 제기했다. 일본 최고재판소는 원고들이 당한 강제노동을 인정하면서도 원고들이 동원되었던 (구)일본제철과, 1970년에 설립된 (신)일본제철이 다른 회사라고 하며 원고들의 청구를 기각했다. 일본제철의 임원, 직원에 큰 변화가 없고 공장도 그대로인데 다른 회사라고 하니 피해자들은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2005년에는 일본에서 기각당한 원고 2명과 새로 연락이 닿은 피해자 3명이 한국에서 다시 소를 제기했다. 2001년 9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지원회’와 민족문제연구소가 본적지 주소를 들고 마을을 찾아다니며 만난 피해자들이 원고가 되었다. 원고들은 소송을 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내가 돈 얼마 그걸 받기 위해서 소송에 내 이름을 넣은 것은 아니에요. 나는 수많은 그런 수탈을 당하고 강제동원이 되고 그런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라도 나서서 해야 할 것 아니냐 그런 생각에서 참여한 것이지, 얼마든지 법정에 가서라도 이야기할 수가 있어요. (2007.6. 김규수)
다행히 우리는 재판을 하지만, 재판이 뭔지도 모르고 그대로 돌아가신 양반들은 좀 거시기하지. 우리가 사는 데까지는 재판을 이겨가지고 그 사람들 소원을 다 풀어줘야만 좋지.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우리밖에 더 있어. 살아있는데 우리가. 그래야지 (그 사람들이) 늦게나마 눈을 감고 좋은 데로 가지. (2012.9. 원고 신천수)
원고들이 소송에서 청구한 배상금 안에는 금액으로 표현되지 않는 식민지배에 대한 분노와 책임감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12년 대법원은 이 사건에서 원고들의 청구를 기각한 고등법원의 판결을 파기환송 했다. 대법원은 제헌헌법과 현행헌법을 인용하며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규범적인 관점에서 불법적인 강점”이며 “일본의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나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로 인한 피해”, 곧 개인이 당한 인권피해는 한일협정과 관계없이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 판결은 2018년 10월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확정되었다. 당시 대법원의 판결이 알려지면서 ‘헌법정신에 근거하여 식민지배의 성격을 확정한 획기적인 판결’이라는 평이 잇따랐다. 이렇게 대법원이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면서 일제강제동원 문제는 더 이상 재론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파탄에 이른 정부 정책과 해결방안
2023년 3월 15일 윤석열 대통령은 요미우리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대법원 판결이) ‘모순되거나 어긋나는 부분이 있더라도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고 정치지도자가 해야 할 책무’라고 했다. 또 ‘제3자 변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구상권 행사로 이어지지 않을 만한 해결책이므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이 대한민국 대법원의 판결을 무력화해주겠다고 일본의 가해자들에게 약속한 셈이다.
무얼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올해 3월 대통령은 “한·일 관계 정상화는 결국 우리 국민에게 새로운 자긍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며 우리 국민과 기업들에게 커다란 혜택”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국가 간의 관계를 정상화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국민이 갖는 자긍심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떠오르게 하는 발언이었다. 정부는 오로지 ‘한일관계 정상화’를 위해 이 사건을 법정 밖에서 기술적으로 뒤집으면 된다고 판단한 듯하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이 소송은 정부가 뒤집는다고 해서 뒤집어지지 않는다. 문제는 소송으로 표출되었지만 그 안에는 인간의 존엄에 관한 질문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현재 ‘제3자 변제’를 위한 기금은 필요한 만큼 모이지 않았다. 정부는 공탁으로 원고들에게 배상금을 ‘강제지급’하려 했지만 법원이 정부의 요청을 반려했다. 시민들이 십시일반 기금을 모아 고령의 피해자들을 지원했다. 현재 일본정부는 물컵의 반을 채울 의사가 없어 보인다. 오히려 “한국이 과오를 뉘우치고 있으니 대승적으로 수용하겠다”는 자세다. 올해 2월 국제노동기구(ILO)는 전문가위원회의 보고서를 통해 일본정부가 “생존 피해자와의 화해를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문제를 둘러싼 모든 부분에서 정부는 고립됐다. 정부의 해법은 파탄에 이르렀다.
‘그럼 어쩌자는 거냐?’. 이런 문제에는 항상 상상력, 공감능력이 필요하다. 1945년 11월 뉘른베르크 국제법정에서 나치 전범들을 상대로 ‘인도에 반하는 죄’와 ‘제노사이드’라는 개념이 처음 제안되었다. 사람들은 단어가 담고 있는 의미를 바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원래 인류는 새로운 경험을 통해 새로운 개념을 발견하면서 인권을 확장해 왔다. 오늘날 ‘인도에 반하는 죄’와 ‘제노사이드’는 국제인권문제를 설명할 때 사용하는 일반적인 용어가 되었다.
우리에게는 오랫동안 공동체가 역사를 함께하며 합의해 온 헌법과 식민지배와 인권피해에 관해 국제사회가 공유하는 기준이 있다. 이에 따르면 된다. 가해자는 책임을 지고, 피해자는 사과를 받고, 우리는 진실을 기록하고 기억하면 된다. 현 정부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참고문헌
古庄正, 「連行朝鮮人未拂い金供託報告書」, 『經濟學論集』, 第23卷 第1號, 駒澤大学經濟學會, 1991.6.
古庄正 「日本製鉄株式会社の朝鮮人強制連行と戦後処理-朝鮮人労務者関係を主な素材として」, 『駒沢大学経済学論集』, 1993.6.
日本製鉄元徴用工裁判を支授する会 虹, 『日韓民衆のかけ橋-日鉄裁判のあゆみと資料集』, 1995.
山田昭次·田中宏 編著, 『隣国からの告発-強制連行の企業責任2 創史社』, 1996.9.
Philippe Sands, 정철승‧황문주 옮김, 『인간의 정의는 어떻게 탄생했는가-‘제노사이드’와 ‘인도에 반하는 죄’의 기원』, 더봄, 20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