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삼청동 세균검사실 시절에 총독부 경무국장의 글씨로 새긴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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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11]

저 멀리 청주 오송으로 옮겨진 ‘동물공양지비(1929년)’의 조성 경위
삼청동 세균검사실 시절에 총독부 경무국장의 글씨로 새긴 비석

이순우 특임연구원

절차적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대통령선거의 개표 결과가 나올 때마다 유달리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곤 하는 하나의 공간이 있다. 이른바 ‘정권인수위원회’의 사무실 용도로 곧잘 사용되는 ‘한국금융연수원(삼청동 28-1번지)’이 바로 그곳이다. 그러고 보니 일찍이 1987년 노태우 당선인 시절에는 ‘대통령취임준비위원회’가, 그 이후 2007년 이명박 당선인과 2013년 박근혜 당선인에 이어 2022년 윤석열 당선인 시절에도 각각 이곳에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잇달아 터를 잡은 적이 있었다.

이 구역 안에는 벽돌로 구성된 ‘번사창(飜沙廠, 1884년 6월 준공)’이라는 이름의 특이한 근대문화유산 한 채가 잔존하는데, 이것은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의 계청(啓請)에 따라 1883년 5월 23일에 설치된 기기국(機器局; 중국 천진에서 들여온 기계와 기술로 근대식 군기 제조와 수리 및 수매를 담당하던 관아)에 속한 기구의 하나였다. 옛 선혜청 북창(宣惠廳 北倉) 자리에 들어선 기기국 안에는 번사창과 더불어 기기창(機器廠), 목양창(木樣廠), 숙철창(熟鐵廠), 동모창(銅冒廠), 고방(庫房) 등의 시설이 함께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세월을 죽 거슬러 올라가면 이 자리는 무척이나 역사적 유래가 깊은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일찍이 이곳에는 5군영(五軍營)의 하나인 총융청(總戎廳)과 수어청(守禦廳)의 본영(本營)이 한때나마 자리했던 곳이며, 영조 24년(1748년) 이후로는 선혜청 북창(宣惠廳 北倉)이 터를 잡은 장소였다. 이곳 바로 앞 삼청동천(三淸洞川)에 걸쳐 있는 다리의 이름이 ‘북창교(北倉橋)’인 것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근대시기로 접어들어 이 자리가 기기국으로 변한 것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고, 그 이후 이곳에는 1904년 7월에 설치된 군기창(軍器廠, 각 병과에 필요한 군기와 탄약을 제조하고 수리하는 곳)이 들어섰다. 그 사이에 새로 짓는 — 러일전쟁 당시 일본 육군의 주력무기인 30년식 소총(三十年式 小銃)을 생산하는 기계설비를 갖춘 — 용산 병기창(龍山 軍器廠)이 1905년 3월에 완공되면서 그곳으로 옮겨가게 되자, 이 자리에는 육군연성학교(陸軍硏成學校)와 육군무관학교(陸軍武官學校)가 차례대로 들어서는 과정이 이어졌다.

하지만 군대해산과 군부(軍部)의 폐지와 더불어 두 군사학교가 사라지고 이곳의 관할권이 내부(內部)로 넘겨짐에 따라 또 다시 공간의 변화는 가속화하였는데, 이때 우선 내부 위생국(內部 衛生局)에 속한 두묘제조소(痘苗製造所)가 먼저 1910년 6월에 이곳으로 옮겨왔고, 곧이어 두 달쯤 지나 8월 말일에 대한의원(大韓醫院; 지금의 서울의대 부속병원 자리)에 있던 위생국 시험과(衛生局 試驗課)도 뒤따라 들어오게 된다. 이로부터 옛 북창 자리이자 기기국 번사창이 들어서 있던 ‘삼청동 28번지 구역’은 일제강점기가 지속되는 내내 ‘위생과 분실(衛生課 分室)’ 또는 ‘세균검사실(細菌檢査室)’이라는 이름으로 줄곧 통용되었다.

조선시대 이래 ‘삼청동 28번지 구역’의 공간변천 연혁

총융청 본청(總戎廳 本廳, 현종 10년~영조 23년) → 선혜청 북창(宣惠廳 北倉, 영조 24년) → 수어청 본영(守禦廳 本營, 정조 1년~정조 6년) → 기기국 번사창(機器局 飜沙廠, 1883년; 삼청동 북창) → 군기창(軍器廠, 1904년 7월; 1905년 3월 용산 군기창 준공) → 육군연성학교(陸軍硏成學校, 1906년 12월~1907년 8월) → 육군무관학교(陸軍武官學校, 1908년 1월~1909년 9월) → 두묘제조소(痘苗製造所, 1910년 6월) 및 내부 위생국 시험과(內部 衛生局 試驗課, 1910년 8월)

특히 이곳은 대한제국 시기에 내부 위생국에 속한 시험과(試驗課, 1909년 2월 창설)이던 것이 경술국치 이후 총독부 내무부 지방국 위생과로 전환되었다가 1912년 3월 27일 칙령 제28호 「조선총독부 경찰관서 관제(개정)」에 의해 종전의 ‘위생사무(衛生事務)’ 일체가 경찰관서의 고유업무로 귀속되면서 경무총감부(警務總監部)의 소관부서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위생과’와 관련한 업무가 일괄하여 총독부 경무국(總督府 警務局)의 편제로 전환된 것은 거족적인 삼일만세운동의 저항이 분출된 결과로 이른바 ‘헌병경찰제도’가 폐지되면서 경무총감부가 사라지게 되던 1919년 8월에 와서야 벌어진 일이었다.

‘총독부 위생과’ 계통의 기구편제 변동 연혁

(대한제국) 내부 위생국 시험과 신설(1909년 2월; 대한의원 구내) → 시험과 이전(1910년 8월; 삼청동 옛 육군무관학교 터) → 조선총독부 내무부 지방국 위생과(1910년 10월) 및 경무총감부 위생과(보건계+방역계) → 경무총감부 위생과 방역계 업무확장(1912년 4월; 두묘, 혈청, 기타 세균학적 예방치료품 제조에 관한 사항 추가) → 총독부 수역혈청제조소 분리(1918년 4월; 두묘 제조 및 시험 업무 이관) → 총독부 경무국 위생과 전환(1919년 8월; 경무총감부 폐지) → 총독부 후생국 보건과 설치(1941년 11월; 후생국 신설) → 총독부 경무국 위생과 부활 (1942년 11월; 후생국 폐지) → 위생국 설치(1945년 9월 미군정 법령 제1호; ‘경무국 위생과’ 폐지) → 보건후생국 개칭(1945년 10월 미군정 법령 제18호; 후생 관련 업무 확장) → 보건후생부 개칭(1946년 3월 미군정 법령 제64호) → 사회부 신설(1948년 7월 법률 제1호; 노동부+보건후생부) → 보건부 분리(1949년 3월 법률 제22호) → 보건사회부 통합(1955년 2월 법률 제354호; 보건부+사회부)

이곳 세균검사실의 기본적인 역할은 “각종 전염병(傳染病)을 연구하고 혈청(血淸)과 예방주사액(豫防注射液)의 제조”에 있었는데, 이와 관련하여 조선총독부가 펴낸 『시정이십오년사(施政二十五年史)』(1935), 503~504쪽에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 구절이 남아있다.

[세균검사실의 설치] 조선에서 전염병은 사계절 거의 끊이질 않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각도(各道)에 세균검사실의 설치가 없는 것은 방역상(防疫上) 지대한 결함이었다. 원래 조선에서 세균검사실은 구(舊) 한국시대의 두묘제조사업(痘苗製造事業)을, 병합후(倂合後)에 승계한 본부(本府, 조선총독부) 세균검사실이 최초인데, 그 후 동실(同室)에서는 두 묘 이외에 콜레라(コレラ), 장티푸스(腸チプス), 적리(赤痢, 이질) 등의 예방주사액, 진단액 및 혈청(血淸) 등을 제조 배급했고, 두묘 제조만은 대정 7년(1918년) 수역혈청제조소(獸疫血淸製造所)에 이관했으나, 이후 예방액, 혈청 등의 종류를 증가시켜 소화 2년도(1927년도)부터는 새로이 40여 종류를 더하여 종래의 제품과 합쳐 64종(種)을 제조했으며, 각종 전염병의 예방액 및 진단액류를 각도(各道)와 각 경찰서에 배급하여 무료예방주사를 여행(勵行)해왔다. 그러나 각도에 세균검사실을 설치하여 전도의 통제(統制)를 기하는 것은 가장 긴요한 일에 속했는데, 때마침 대정 9년(1920년)에 있어서 콜레라의 유행을 기화로 삼아 각도에 세균검사실을 설치하여 전염병의 예방검색상 커다란 이편(利便)을 얻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저 멀리 충북 청주 오송보건의료행정타운(오송읍 연제리 643번지)의 구내에 자리한 식품의약품안전평가원의 실험동물자원동 건물 후면을 찾아가면, 총독부 위생과 세균검사실 시절이 남겨 놓은 흔적 하나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름하여 ‘동물공양지비(動物供養之碑)’라고 새겨놓은 비석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뒷면에는 ‘一九二九年 三月 二十三日(1929년 3월 23일)’이라고 적혀 있는데, “一九二九” 부분이 시멘트 덧칠 위에 새로 새겨진 글자인 걸로 보면 원래 이곳에는 필시 “昭和四(年)”이라는 일제 연호가 새겨져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 당시 실험동물에 대한 공양탑(또는 공양비)이 세워진 것으로는 총독부의원(지금의 서울대의대 부속병원) 자리에 들어선 ‘실험동물공양탑(實驗動物供養塔, 1922년 7월 15일 건립)’의 사례가 이미 있었고, 또한 비슷한 시기에 저 멀리 부산 암남동 소재 수역혈청제조소(獸疫血淸製造所)의 구내에도 ‘일살다생 나무아미타불(一殺多生 南無阿彌陀佛, 1922년 11월 18일 건립)’이라고 새긴 실험동물 위령비가 만들어진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 비석은 어떠한 연유로 만들어진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경성일보』 1929년3월22일자에수록된「시험동물(試驗動物)의 공양탑(供養塔), 세균검사실(細菌檢査室)에 세운다」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채록되어 있다.

본부(本府, 조선총독부) 위생과(衛生課)의 세균검사실에서 1개년에 연구(硏究) 또는 세균채취용(細菌採取用)으로 희생되는 동물(動物)은 큰 것으로 마우(馬牛)로부터 작은 것은 몰못트, 서(鼠, 쥐)에 이르기까지 산양(山羊), 부타(ブタ, 돼지), 견(犬, 개), 묘(猫, 고양이), 계(鷄, 닭) 등 2천여 필(匹)에 달하는데, 위생과에서는 이들 인류의 희생이 되는 동물의 영(靈)을 위로코자 전부터 공양탑 건립의 계획이 있었으며 금회(今回) 마침내 250원(圓)을 던져 삼청동(三淸洞)의 위생과 세균시험실에 세우는 것으로 되었다. 준공(竣工)은 3월말이며, 준공과 동시에 제막식(除幕式) 겸 공양회(供養會)를 거행하며, 덧붙여 말하면 비문(碑文)은 아사리 경무국장(淺利 警務局長)이 명필(名筆)을 잡은 것이다.

여길 보면 이곳 세균검사실에서 실험동물의 용도로 희생되는 각종 동물 2천여 필에 대해 공양탑 건립의 계획을 세웠으며, 글씨는 — 세균검사실이 속한 총독부 경무국의 최고 기관장이 되는 — 아사리 경무국장(淺利 警務局長; 재임기간 1926.9.28~1929.11.8)의 휘호에 따른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사리 사부로(淺利三朗, 1882~1966)는 원래 일본 각 지역의 경찰부장과 내무부장을 두루 지낸 고위 행정관료 출신이며, 총독부 경무국장으로 옮겨오기 직전에는 카가와현 지사(香川縣 知事)를 지냈고 퇴임 이후에 다시 토치기현 지사(栃木縣 知事)의 자리로 복귀한 인물이다.

이로부터 해마다 가을철이 되면 따로 날을 정하여 이곳 ‘동물공양지비’ 앞에서는 대개 총독부 경무국장이 직접 참석한 가운데 실험동물을 위한 공양제(供養祭, 위령제)가 성대하게 벌어지곤 했다. 예를 들어, 『경무휘보(警務彙報)』 1932년 12월호, 141~142쪽에 수록된 「인축보건(人畜保健)의 희생(犧牲)에 쓰러진 동물공양제(動物供養祭), 매우 정중히 집행되었다」라는 제목의 글에는 이 행사의 진행상황을 이렇게 그려놓고 있다.

11월 16일 오후 5시부터 본부(本府) 위생과 세균검사실(衛生課 細菌檢査室) 주최(主催) 아래 동실(同室)에서 인축보건(人畜保健)을 위해 희생이 된 동물의 공양제가 불식(佛式, 불교식)으로 매우 정중히 집행되어졌다. 제장(祭場)은 동실 구내의 후방 송림중(松林中)에 미리 건립되어 있던 동물공양비(動物供養碑)에 면(面)하여 세워졌으며, 그 주위에는 만막(幔幕, 휘장)을 두르고 비전(碑前)에 제단(祭壇)을 설치하여 부(麬, 밀기울), 건초(乾草), 근채(根採), 기타의 공물(供物), 좌우(左右)에는 경성양토회사(京城養兎會社)로부터의 조화(造華)를 바치고 동물공양제로서 보기 드물게 성스럽고 엄숙하였다.
이날은 아침부터 천기(天氣, 날씨)가 청랑(晴朗)하였고 오후에 이르러서도 한 조각의 구름도 없이 만추(晚秋)의 석양(夕陽)은 비면(碑面)과 제단에 비추어 지하(地下)에 잠든 존귀한 그들의 영혼을 조위(弔慰)하는 것 같았는데, 가늘고 길게 이어져 피어오르는 향로(香爐)는 송뢰(松籟, 솔바람)에 흔들려 사라지고 부근(附近)에 있던 한 무리의 소양(小羊, 어린 양)은 무언가 생각하는 것이 있는가 그 자리를 떠나기 어려운 풍정(風情)이 있었음은 참렬자(參列者)의 마음을 몹시 당기었다.
정각(定刻)에 이르자 세균검사실장(細菌檢査室長) 아마기시 기사(天岸 技師)의 유도(誘導)로 일동 착석하여 식(式)은 박문사 승려(博文寺 僧侶)의 독경(讀經)으로 시작되고, 이어서 이케다 경무국장(池田 警務局長)이 비 앞에 참행(參行)하여 정중하게 예배를 하면 니시카메 위생과장(西龜 衛生課長), 기타 참렬자 일동이 참배하였으며, 오후 6시 식을 마치고 별실(別室)에서 아마기시 기사로부터 공양제에 관해 대요(大要) 다음과 같은 애찰(挨拶, 인사말)이 있자 일동 건배(乾盃)하고 산회(散會)한 것이 오후 7시였다.
세균실의 주최로서 집행된 또 기념해야 할 공양제는 이리하여 무사히 종료를 고하였던 것이다. (이하 생략)

이러한 연례행사는 1938년의 시기에도 계속되었던 것으로 파악되는데, 이때의 행사에 대해서는 역시 『경무휘보』 1938년 12월호, 101쪽부분에수록된「세균검사소(細菌檢査所)동물공양(動物供養)」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간략히 정리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당과(當課, 위생과) 세균검사소에서 세균검사의 공시재료(供試材料)가 되고 또는 혈청(血淸)의 제조재료가 되어 질병치료약이 되거나 혹은 진단액(診斷液)이 되어 질병의 진정(診定)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혹은 또 각종 전염병 예방의 자재(資材)가 되어 인류(人類)의 질병예방치료상 다대한 공헌을 했던 희생동물(犧牲動物)은 마(馬), 우(牛), 양(羊), 견(犬), 토(兎), 몰못트(モルモット), 마우스(マウス) 등이며, 소화 11년(1936년) 중에는 총수(總數) 5,989두(頭), 소화 12년(1937년) 중에는 9,307두, 소화 13년(1938년)에는 10월말까지에 있어서 6,850두의 다수(多數)를 헤아리는 상황인데, 세균검사소에서는 이들 존귀한 희생동물의 위령(慰靈)을 위해, 11월 5일 오후 1시부터 동소(同所) 구내 동물공양비(動物供養碑) 앞에서 춘무산 박문사 승려(春畝山 博文寺 僧侶)가 도사(導師, 법요를 주재하는 역할)가 되고, 니시카메 위생과장(西龜 衛生課長) 이하 관계 직원 80여 명 참렬하여 매우 엄숙히 공양이 올려졌다.

그런데 이와 같은 동물공양제의 흔적은 더 이상 발견할 수 없고, 한참의 세월을 건너뛰어 『동아일보』 1967년 5월 30일자에 와서야 「연구용(硏究用)으로 비명(非命)에간 동물위령제(動物慰靈祭) 거행」 제하의 기사가 수록된 사실이 눈에 띈다.

30일 오전 11시 반 국립보건연구원(서대문구 녹번동 산 5번지) 뒷동산에 세워진 동물공양비 앞에서는 연구실험용으로 비명에 간 말, 돼지, 소 등 5만여 마리 동물들의 원혼을 달래는 동물위령제가 조계사(曹溪寺) 스님들이 은은한 독경 속에 거행됐다.
해마다 한 번씩 베풀어지는 이 위령제는 한 해 동안 실험용으로 죽어간 동물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것인데 이날 위령제엔 홍문화(洪文和) 보건원장을 비롯한 1백여 명의 연구원 직원들과 조계사 스님들이 참석, 밀기울, 건초를 비롯, 바나나, 건빵, 막걸리 등 40여 종의 제물을 차려놓고 분향하여 실험용으로 죽어간 동물가족들의 원혼을 달랬다.

이 기사에 담긴 내용을 보아하니 위령제의 진행절차가 일제 때 세균검사실 시절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 다만, ‘동물공양지비’의 소재지가 ‘삼청동’이 아닌 ‘녹번동(통칭 불광동)’으로 바뀐 것이 달라진 부분이다. 여기에 나오는 ‘국립보건연구원’은 해방 이후 세균검사소와 방역연구소, 그리고 국립보건원 시절을 거쳐 1967년 2월 1일부터 직제 개정에 따라 사용하기 시작했던 옛 총독부 세균검사실의 후신(後身) 기관에 해당한다.

이 기관은 1959년에 서울 서대문구 녹번동에 — 당시의 명칭으로 — 중앙방역연구소(中央防疫硏究所) 신축부지를 마련하여 위생기재 공작소를 지었고, 1962년 6월에는 방역연구소와 화학연구소를 묶어 국립보건원(國立保健院)에 통합할 계획에 따라 이 구역 안에 국립방역연구소(國立防疫硏究所, 1960년 8월에 개칭)의 시설확장공사를 개시하여 그해 12월 29일에 낙성식을 올린 바 있었다. 삼청동에 있던 종전의 방역연구소 자리에는 1960년에 중앙보건원(中央保健院) 청사가 신축된 것으로 확인되며, 1963년 12월에 통합 국립보건원의 편제로 바뀐 이후에는 이곳이 국립보건원 훈련부(訓練部)의 용도로 바뀌게 된다.

해방 이후 ‘세균검사실’ 계통 연구기관의 직제개편 연혁


▲ 총독부 경무국 위생과 세균검사실(세균검사소) → 세균연구소(해방 직후) → 조선방역연구소(1946) → 국립방역연구소(1947) → 중앙방역연구소(1949) → 국립방역연구소(1960) → (통합)국립보건원(1963, 피흡수)


▲ – ① 중앙보건소(1949.7.14) → 중앙보건원(1960.1.1) → 국립보건원(1960.8.12) → (통합)국립보건원(1963.12.17; 국립화학연구소, 국립방역연구소, 국립생약시험소 일괄 흡수)
▲ – ② 중앙화학연구소(1949.11.7) → 국립화학연구소(1960.8.12) → 국립보건원 피흡수
▲ – ③ 중앙방역연구소(1949.12.7) → 국립방역연구소(1960.8.12) → 국립보건원 피흡수
▲ – ④ 중앙생약시험장(1954.1.18) → 국립생약시험소(1960.8.12) → 국립보건원 피흡수


▲ (통합)국립보건원(1963.12.17; 미생물연구부) → 국립보건연구원 (1967.2.1) → 국립보건원(1981.11.2) → 국립보건안전연구원(1987.12.5; 국립보건원 안정성연구부 분리) → 식품의약품안전본부 독성연구소(1996.4.6)→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소(1998.2.28) →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2002.5.27) →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과학원(2007.9.14) → 식품의약품안전청 식품의약품안전평가원(2009.4.30) → 식품의약품안전처 식품의약품안전평가원(2013.3.23)


(*) 국립보건안전연구원의 분리(1987.12.5) 이후 ‘국립보건원’은 ‘질병관리본부’로 개편(2003.12.18)되었다가 다시 ‘질병관리청’으로 승격(2020.9.12)되는 과정을 거쳤고, 그 사이에 이곳 소속으로 별도의 ‘국립보건연구원’이 신설(2003.12.18)된 상태이다.


녹번동(지금의 ‘서울혁신파크’ 자리)으로 옮겨온 이후에도 실험동물 위령제는 — 비록 드문드문 신문지상에 소개되는 정도에 그쳤지만 — 그대로 지속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다가 지난 2010년 11월에 국가기관 지방이전사업의 일환으로 서울 녹번동에 자리했던 질병관리본부, 국립보건연구원, 식품의약품안전청, 보건복지인력개발원이 일괄하여 오송보건의료행정타운으로 이전함에 따라 ‘동물공양지비’ 역시 그곳으로 함께 옮겨졌다.

듣자 하니 지난 2014년 10월에 이르러 ‘동물사랑 생명존중 조형물(조각가 이기수 작품)’이 새로 만들어지면서 이곳 앞에서 ‘실험동물 생명존중행사’를 벌이는 방식으로 변경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더 이상 옛 ‘동물공양지비’ 앞에서 위령제가 벌어지는 일은 없어졌으므로 이는 참으로 다행한 사실이 아닐 수 없겠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상기해 두어야 할 사실은 애당초 죽은 동물에 대해 공양비를 세우고 그 앞에서 공양제(혹은 위령제)를 올리는 것이 — 예전에 다른 글을 통해 ‘잠령공양탑’과 ‘잠령제’의 유래를 정리하면서 누차 지적한 바 있지만 — 그야말로 전형적인 일본식 풍습에서 비롯된 일이며, 일본 신도(神道)나 불교에서 행해지는 방식과 직접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그것도 하필이면 가장 폭압적인 경찰기구의 최고 우두머리였던 총독부 경무국장의 글씨로 새겨진 비석 앞에서 — 해방되고도 무려 7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도록 — 꼬박꼬박 식민통치자들이 행했던 방식을 답습해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러한 무심함에 대해 분명 상당한 반성의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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