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허영호
불교계에도 비밀 항일결사가 있었다. 석가모니 앞에서 민족을 구원하겠노라 서약한 조직이었다. 만(卍)자를 당명으로 사용한 만당(卍黨)이 그들이다.
국가보훈부의 전신인 원호처 산하의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펴낸 <독립운동사 제8권: 문화투쟁사>는 이용조의 글인 ‘한국불교 항일투쟁 회고록-내가 아는 만자당(卍字黨) 사건’을 근거로 “이 단체는 1930년 5월경 김법린·이용조·김상호·조학부(조학유의 오기) 등이 불전(佛前)에서 맹세하고 결사”한 조직이라고 소개한다.
1995년에 <한국학보> 제80집에 실린 김광식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원의 논문 ‘조선불교청년총동맹과 만당’에도 인용된 위 회고록에 따르면, 순교정신으로 만당에 참여한 그들은 억압하에 놓인 한국불교뿐 아니라 한민족을 구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만당 선서문에는 “2천만 동포가 헐떡이는 소리를! 우리는 참을 수 없는 의분에서 감연히 일어선다”라는 대목이 있다.
만당은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을 조직하고 각지에 총동맹 지부를 설치했고, 이를 바탕으로 불교계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회고록은 “교정(敎政) 운영에도 상당한 잠재 세력을 갖게 되어 교무원은 이사를 위시하여 중요 간부들까지도 당의(黨議)로 누구를 내세우자 하면 그대로 성공되기까지 이르렀다”고 말한다. 비밀 조직이 없었으면 총동맹 조직 과정과 교단 인사 개입 등이 노출됐을 것이고 그랬다면 일제의 감시와 훼방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면에서 비밀결사는 유용했다.
당원 수가 근 80명에 다다른 만당의 영향력은 일본에까지 미쳤다. 만당 도쿄지부가 그 산물이다. 이로 인해, 1928년부터 다이쇼대학 불교학과에서 유학 중이던 독립운동가 허영호도 이 활동을 하게 됐다. 허영호는 이용조 회고록에서도 거명됐다.
친일로 전향한 독립운동가
허영호는 일제 경찰들을 곤혹스럽게 만든 항일운동의 주요 인물이다. 대한제국 시절인 1900년에 경상남도 동래부에서 출생한 그는 초등학생들과 함께 거사를 일으켜 일제 경찰을 괴롭힌 ‘동래 범어사 학생 의거’의 핵심이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의 <독립운동사 제3권: 삼일운동사 하권>은 “3·1운동 전 동래 범어사에는 국민학교 과정의 명정학교와 중등학교 과정의 지방학림이 있었다”라며 이들이 의거를 주동하고 배후에 불교 지도자들이 있었다고 설명한다.
시위 예정일은 동래장날인 1919년 3월 18일이었다. 허영호를 비롯한 기획자들은 17일 범어사에서 열린 두 학교 졸업생 송별회 때 학생 30~40명에게 취지를 설명하고 동참을 촉구했다. 이때 독립선언서 1000장을 준비해 간 인물이 허영호다.
그곳에 모인 학생들은 그날 저녁에 귀가하지 않고 다음날 시위가 열릴 동래읍으로 곧장 이동했다. 전국적으로 만세시위가 한창일 때였다. 그래서 일경에 들키지 않기 위해 큰길 대신 뒷산을 타고 18일 새벽 1시경 동래읍 불교포교당에 도착했다.
그때 학생들은 배가 고파 그 밤중에 곶감을 사 왔다. 그것으로 야식을 하던 중에 일본 군경 20명이 들이닥치는 상황과 맞닥트리게 된다. 군경들은 핵심인물 일부를 연행하고 나머지는 해산시켰다. 명정학교 학생이 학교 교사인 나카무라에게 제보한 결과였다.
18일 시위를 막기 위해 대다수 학생들을 귀가시킨 군경의 조치는 결과적으로 ‘안이한 대처’가 됐다. 위 30~40명보다 더 많은 수의 명정학교·지방학림 학생들이 18일 밤중에 동래읍 서문에서부터 남문까지 행진하면서 독립만세를 외친 뒤 해산했다고 위 <삼일운동사>는 기술한다. 새벽에 일경의 기습을 받고 단단히 혼줄이 났을 어린 학생들이 더 많은 친구들을 데리고 밤중에 몰려나오리라고는 예상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일경은 19일에도 허를 찔렸다. 이날 오후 5시 이후에는 더욱 대담한 시위가 벌어졌다. 18일 밤중에 시위가 끝난 마지막 장소인 남문에서 학생 수십 명이 출현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더니 동래경찰서 앞으로 돌진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수십 명은 애초에 18일 시위 장소로 계획됐던 동래장터에 모여 시위를 개시했다. 스토리가 있는 시위가 연이틀 벌어진 것이다.
19일에 학생들이 뿌린 수백 장의 격문에 “일사막여득자유(一死莫如得自由)”가 적혀 있었다. 한번 죽는 것이 자유를 얻는 것만 못하므로 목숨 걸고 싸워 자유를 얻자는 호소였다. <삼일운동사>는 이 문구를 “허영호가 작성”했으며 시위 전에 장터 길목에서 배포했다고 말한다.
18일 새벽만 해도 학생 대부분을 방면했던 일제 경찰은 이날 시위를 보고 무자비한 탄압으로 대응했다. 허영호를 비롯한 34명이 재판에 넘겨지고 집행유예 6년을 받은 김영식·박재삼을 제외한 전원이 징역 6개월 내지 2년형을 받았다. 1990년에 국가보훈처가 작성한 ‘허영호 공적조서’에 따르면 허영호는 1년형을 받았다. 이때의 의거를 주동하고 그 뒤 신간회 동래지회에도 가담했던 허영호가 만당 도쿄지부에도 참여했던 것이다.
이랬던 허영호가 오래지 않아 친일로 전향했다. 1932년에 다이쇼대학을 졸업한 뒤 귀국해 조선불교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이 되고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 겸 학감이 되고 김해 해은사 주지 등이 된 그는 중일전쟁이 한창인 1930년대 중후반부터 친일 색깔을 드러냈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19권 허영호 편은 그가 1938년에 위 총동맹 경성연맹의 대일 협력을 주도했다고 말한다.
불교를 친일의 도구로… 해방 후엔 다시 변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는 “<불교 신(新)> 편집 겸 발행인(1937년 3월~1939년 1월)과 불교계 간부로서 권두언과 기고문, 시국간담회와 순회강연을 통하여 일제의 내선일체와 침략전쟁을 적극 선전·선동”한 것을 그의 핵심적인 친일행위로 소개한다.
1910년 국권침탈 이전부터 활동한 1세대 친일파들과 달리, (독립)운동권 출신 전향자가 다수인 1930년대 중후반 이후의 친일파들은 더 교묘하고 과감했다. 강제징용·위안부·강제징병 피해는 그들이 안면을 몰수하고 친일 선전전을 벌인 결과였다.
한때는 ‘일사불여득자유’를 외치며 일제에 항거했던 허영호 역시 그랬다. 직접 편집하고 발행한 1943년 4월호 <불교 신>에 실린 그의 글 ‘결전 제2년과 새로운 불교에의 구상’을 읽어보면, 부처님 앞에서 맹세하는 만당 당원이었던 그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 글에서 그는 “대동아 지역에 신질서가 건설되고 있는 이때에 각파각태(各派各態)의 불교를 정돈하고 지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지도불교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신질서에 맞춰 각종 교파를 이끌 새로운 불교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이다. 부처님의 시간표에 따라 불교계를 개혁하는 게 아니라 일왕의 대동아전쟁 시간표에 맞춰 그렇게 하자고 촉구한 것이다.
그는 “불교 교단 자체의 제도·의식·포교 내지 신앙 형태 등 모든 부문에 뻐치어 대동아공영권적 성격을 부여할 뿐 아니라 국민정신문화의 지도성을 가지도록” 하자고도 촉구했다. 또 불교가 민중이나 신도를 위해 무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일제가 말하는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할지를 불교가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 뒤 “승니는 국민의게 무엇을 주느냐의 해답 여하로 말미암아 불교의 필요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라고 친일적 결론을 내렸다.
전향 뒤 그는 조선불교중앙교무원 상무이사, 중앙포교당 포교사, 조계종 태고사 종경사서, 조계학원 이사와 더불어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 등이 됐다. 일본의 후원을 받는 가운데서 이런 지위들을 확보했으므로 여기서 발생한 수익은 친일재산의 성격을 띤다.
시국강연회와 순회강연에서도 수익이 발생했음은 물론이다. 자신이 발행하는 잡지에 친일 논설을 썼으므로 원고 기고로 인한 친일 수익은 따질 여지가 없지만, 그 잡지가 친일적이었으므로 잡지 운영에서 발생한 수익도 친일재산의 범주에 넣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그의 변신은 한 번이 아니었다. 1945년에 해방이 되고 그해 12월에 신탁통치 문제가 대두되자 반탁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상무위원이 되어 반탁운동에 뛰어든다. 외세에 의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반탁운동에 가담해 애국자 행세를 하는 친일파들의 대열에 가담한 것이다.
그런 속에서 정치·사회 활동도 맹렬히 이어갔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허영호 편은 “해방 후, 1945년 9월 혜화전문학교를 복구하여 교장을 맡았다”고 한 뒤 1946년 상황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같은 해 6월 혜화전문학교를 대학으로 승격시켜 동국대학으로 개명하고 1948년 11월까지 초대 교장을 맡았다”고 말한다. 또 1949년 1월에는 부산 갑구 민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고 한다.
부처님 앞에서 했던 서약을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항일진영에서 친일진영으로, 반탁진영으로 넘나든 그의 몸은 1950년에 또 한 번, 이번에는 강제적으로 옮겨진다. “1950년 7월 6·25전쟁 중에 납북”됐다고 위 사전은 말한다. 대한민국은 1990년에 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된 뒤인 2010년에 훈장을 취소했다.
김종성 기자
<2024-10-27>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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